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이영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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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읽으면 늘 들뜬다.

그의 글이 나를 선동하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고무되어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동안 나의 들뜸은 소설의 주인공이 나에게 투영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또 들뜬다.

가슴이 벅차올라 가만히 있을 수 없다.

70세를 바라보는 노 작가의 글은 달관의 경지에 있고, 그것은 나의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그렇다고 이 책이 데모를 부추기는 사상서란 말은 아니다.

그리고 나도 선동을 당할 말한 나이도 아니다. 

이 책은 정원을 가꾸는 정원 집사의 사계절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런 마음을 들게 하는 것은 그의 글 솜씨 탓이기도 하겠지만

사계절의 정원에서 피고 지는 꽃과 나무를 통해 말하는 인생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겨울을 뚫고 찾아온 생명.

이 생명이 움트고, 꽃을 피울 때 그는 꽃의 화려함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꽃이 져버리는 슬픔 때문에 그는 절망에 가득 차 한탄 늘어 놓는다.

용맹한 자로 인식되던 마루야마 겐지의 절망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정말 즐겁다.

 그러나 나의 즐거움은 잠깐 이고

그는 곧 꽃을 보내고 푸른 잎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의미를 찾아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 한다. 

P80-81

풀잎도 나뭇잎도 한계까지 짙푸르러지고 도톰해지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종국에는 행복의 부스러기마저 소멸시켜 버린 듯 한 표정의 나를 향해 계몽적인 말을 던져 준다.

끝없는 변화가 당연한 이 세계에서 꽃의 계절만을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쾌락과 고통이 나뉘기 어려운 이 생애를 뚫고 나가야 하는 존재이므로, 결코 한때의 더 나은 상태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 한다. 늘 현재에 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신을 파악하고, 그때그때 자신을 다스리자고, 또 그리하며 살아가도록 된 숙명이고 끝을 맺는다.”

 최근에 읽은 수필집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등에서 추상 같은 호령으로 나를 일깨웠다.

위에 언급한 책들 보다 먼저 쓴 이 책에서는 한없이 자연에 승복하는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 모습을 느낀다.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읽으며 자연의 힘을 다시 한 번 인식한다.

어느 누구의 지배 받지 않을 것 같은 마루야마 겐지가 나무와 꽃의 집사로 헌신하고 있다니...

**

 우리네 인생도 죽음을 가진 유한한 생명체이기에 늙어간다.

그의 말 대로 자연의 사계에서 꽃의 계절만 집착해서는 안 되겠지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나에게

그의 말을 빌려서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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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들 - 루이스 웨인의 웃기고 슬프고 이상한
크리스 비틀스 지음, 최민우 옮김 / 저공비행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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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웨인의 고양이들>은 고양이에 대한 관심으로 샀다.

그가 그린 재미있는 고양이 그림은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고양이 그림이었다.

그 친근함의 근원을 찾아보니 <미키마우스> <톰과 제리> <펠리스 더 캣> 같은 동물을 의인화한 에니메이션과 캐릭터들이 루이스 웨인의 손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루이스 웨인1860년에 태어나 1939년에 죽었다.

루이스 웨인이 살던 시대는 쥐들이 많아 집집마다 고양이를 키우던 시대라 

고양이와 인간이 더욱 친밀하던 시대였다.

그 친밀함을 반영하듯 그의 고양이 그림은 인기가 높았다.

천재적 그림 솜씨로 의인화 된 고양이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가 고양이를 그리게 된 동기는

유방암에 걸린 아내를 위로해 주기 위해 집에 키우던 고양이 그림을 그려 주었고

부인이 그림을 잡지사에 보내기를 권유해 결과로

그는 고양이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일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의 그림에 대한 수요는 가히 폭발적 이었다.

그의 그림이 실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신문과 잡지 책의 삽화 그리고 엽서 등으로

그러다 보니 너무 흔해진 그림과 이재에 밝지 못한 루이스 웨인은

일차 대전의 발발로 수요가 급감하면서 인기도 떨어지고 돈도 떨어졌다.

생활고로 작품 활동도 힘들어진 그는 결국 정신분열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졌다.

1983년 거의 잊혀 진 루이스 웨인을 영국의 예술계의 유명한 딜러이자 일러스트 및 만화 전문가인 크리스 비틀스가 재조명 했다.

크리스 비틀스는 1983년부터 매년 루이스 웨인 전시회를 열고 있다.

그리고 루이스 웨인의 작품과 루이스 웨인이 쓴 신문 사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를 모아 이 책을 만들었다.

**

 지극히 아름다운 세계는 신의 세계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이 세계를 넘보며

끊임없이 자신을 신의 경지의 예술로 밀어 붙인다.

루이스 웨인을 포함하여 고흐, 슈만, 헤밍웨이, 차이코프스키, 랭보 등의 예술가의 생애를 보면, 그들의 뛰어난 예술성은 그들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천형이란 생각이 든다.

너무나 감각적이고 뛰어난 천재적 예술성은 오히려 뇌가 감당하기 힘들어

광기마저 보인다.

그 광기는 그들의 예술세계를 더욱 빛나게 하지만 때로는 파멸로 몰고간다.

예술가들이 만들어 낸 최상의 경지의 예술 작품들 덕분에 우리는 다양하게 즐긴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본다

예술이 가져다주는 인생의 휠링 시간.

잠깐 예술가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다.

세상은 금방 무채색이 되고  

무기력하다.

 이 세상에는  예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이 순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안테나를 드높여 신의 뜻을 받아

천형을 기꺼이 해내는 예술가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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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이용덕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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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매우 독특한 소설이었다.
섬세한 심리묘사를 통해 보여주는 인간관계도 그랬고,
180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세계관도 그랬다.
작가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남녀 주인공을 통해, 희망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생각을 통렬히 비웃고, 오래전부터 인간사회에 존재해왔던 계급 관계, 의존적 관계를 가차 없이 파헤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 사회 속엔 계급이 있다.
그 옛날엔 귀족과 평민이란 확실한 구분법으로, 지금은 보이지 않는 사회조직과 경제 구조가 계급을 엄연히 나누고 있으니 인간 사회에 본래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는 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인간관계 속에 만들어진 갑의 ‘갑질’을 세밀하게 늘어놓고 거기에 대한 ‘을’의 반격을 보여준다.
이 세상의 갑들은 희망과 행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저 언덕 넘어 행복의 파랑새가 있다’고 막연히 이야기 한다. 종교에서의 천국과 같이....그리고 행복의 조건으로 추천한 것이 그저 착하게 순응하는 긍정적 삶.
을의 시선에서 보면 긍정적 삶이란 갑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악의를 지녔다.
우리의 주인공 ‘을’은 물론 긍정적인 삶에 반발한다. 악의에 가득 차 반발로 선택한 것이 죽음.

여자 주인공 ‘하쓰미’를 통해 이런 긍정적인 삶은 여지없이 비틀린다.
하쓰미가 좋아하는 책은 ‘살인’, ‘지옥’, ‘엽기’, ‘괴물’, ‘학살’, 에 관련된 것이며 ‘호러물, 포르노 영화’에 관심이 있다. 그녀는 ‘악의’에 가득 찬 것에 늘 끌린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악의는 평소엔 보이지 않다가 상대가 공격할 때 반격으로 드러난다.
그런 그녀에게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 ‘도쿠야마’가 나타난다. 하쓰미는 도쿠야마가 접해 보지 못한
세상을 보여준다. 악의로 가득 찬 세상을.
**
‘악의’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해치려 하거나 미워하는 악한 마음’이며,
‘선의’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거나 좋은 목적을 가진 착한 마음’이다.
의미는 그러하지만, 착한 마음이라 해서 타인에게 전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듯, 악의 또한 타인에게 꼭 나쁘게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동냥그릇을 들고 온 사람에게 착한 마음으로 계속 도와주어 자립심을 잃게 할 수도 있고, 악의로 동냥그릇을 깨버려 분기탱천한 거지의 자립심을 유발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하쓰미의 ‘악의’에 가득찬 세상 비틀기는 도쿠야마 그리고 도쿠야마와 같은 평범한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유쾌한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준다.

도쿠야마는 하쓰미 덕분에 인간관계 속 ‘을’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끌려 다니지 않는 인간으로 자립하는 동시에 하쓰미가 추구하는 세계로 끌려간다.
하쓰미에게 이 세상은 악의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세상을 벗어나는 것은 ‘죽음’이며 죽음의 동반자로 도쿠야마를 선택한다.
**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는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인간들의 다양한 마음의 양상을 흥미롭게 보여 준다.
그리고 세상이 악의로 가득 차 있는 것 처럼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찾아낸 것은 하쓰미의 선택보다는 살아서 세상이 보여주는 악의를 두눈 뜨고 쳐다 볼 용기를 가지는 것.
그리고 상대의 행위나 말 속에서 선의나 악의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 중요한 것은 어떤 관계 속에서도 끌려 다니지 않는 자신을 만드는 것.

작가, 이 욘도쿠는 재일 한국인 3세이다.
일본이란 사회를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
이 소설 속에 작가가 느끼는 일본 사회의 불합리에 대한 그의 깊은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이 또한 계급의 벽에서 온 건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일본에서 살았고, 그 또한 먹고 입고 누리는 모든 것이 일본에서 온 것이지만 일본에서 그는 영원히 재일 한국인, 결코 일본인은 아닌 것이다.
도쿠야마의 청혼에 대한 하쓰미의 거절 이유는 ‘재일 한국인’.
이 또한 신분인가? 아니 계급의 차이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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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공허한 십자가 (보급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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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허한 십자가> 역시 게이고 답다. 

강물이 흘러가듯 넘실넘실 잘 흘러간다.

유려한 글 솜씨다.

다수의 그의 책을 읽어서 인지

이제 그의 글의 방식이 있다고 느껴진다.

 

 

 

 

 그의 소설의 주제는 (내가 읽은 것 중심)

찬반 논란을 가져다 줄 내용으로

전개 방식은 감정묘사가 절제된 사건 위주의 전개.

그리고 마지막엔 반전이 준비되어 있다.

 이번 소설의 주제는 사형제도이다.

사형을 주장하는 피해자 가족과 사건을 일으킨 범죄자와 그 가족의 사정을 보여준다.

사형제도에 대한 결론은 작가가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독자에게 맡겼다.

 

 

  그의 두뇌 속엔 소설을 쓰는 형식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추리 소설을 쓰기에 최적화된 프로그램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것!

그것이 다작을 가능케 하는 천재성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독자의 욕심인지 몰라도

책을 읽으면서 나의 감정 선을 툭 건드리는 문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결코 그 순간은 오지 않았다.

책 내용에서

살인 사건으로 딸을 잃은 엄마가 사형을 주장하는 측으로 나오는데

사건위주의 전개로 엄마의 슬픔에 공감이 일어나지 않았다.

 혹 다른 독자는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면 추리소설을 읽지 말고 다른 장르의 소설을 읽어 라고...

그렇지만

히가시노 게이고 정도의 대가라면

추리도 보여주고 공감될 수 있는 감정도 만들어 주고.

가능하지 않을까?

하하 순전히 나 혼자의 감상이다. 딴 사람들은 받았을지 모르니

 그래도 그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사형폐지론 또는 사형 집행론의 논문보다는 사형제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이야기로 만들어 일반 독자에게 쉽게 사회 문제에 대한 생각거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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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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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초반부의 심청은 내가 알고 있던 심청전의 심청이었다.

그녀 이름 앞에 늘 붙어 다니는 효녀’.

교묘하게 위장한 정책의 방편일수도 있었던, 효를 강조했던 조선시대가 요구했던 바로 그 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심봉사는 달랐다. 눈이 멀어 무능했지만 심성 착한 아버지 심학규가 아니었다. 초반부터 심봉사가 심상치 않았다.

 

< 바로 우리의 모습인 심봉사 >

한 때 꿈꾸지 않은 자 어디 있으랴!

세상을 굽어보며 세상을 평정하리라.

사람들 위에 우뚝 서는 그런 날이 오리라.

때가 되면 나비의 날개를 펼치고 멋지게 날아오를 것이다.

그런 포부를 가져보지 않은 자 몇이나 될까.

심봉사도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런 때를 기다린다.

- 본문 15-

아아, 심봉사는 그 아득한 창공을 나는 새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멀리 저 아래 올망졸망 인간 세상이 굽어보인다. 어쩌면 저렇듯 누추하게 사는지. 어쩌면 저렇게 어리석게 사는지. 매미 따위나 작은 새들의 좁은 품으로 어찌 뜻을 헤아리랴.’

그러나 온다는 그 때는 어디로 갔는지.

탓만 늘어나지 않았던가.

부모를 잘 못 만나서.

돈이 없어서.

가족이 도와주지 않아서.

세상이 나를 알지 못해서.

꿈만 꾸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세상에 공짜가 없다. 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공짜만 바라고 살지 않았던가. 하기 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나! 아니 실천에 게을렀던 화려한 꿈들. 그게 바로 공짜심리였던 걸 깨닫기가 그토록 어려웠을까.

돌이켜 보면 나도 심봉사였다.

인격의 주체가 되어 주인으로서 나를 이끌어 왔다고 착각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스스로 뜻을 세워 한 일은 별로 없고 부화뇌동으로 사회의 이익을 쫓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재미난 일을 추구했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바라던 일이 그냥 이루어져 하늘에서 뚝 떨어지길 바란 적도 있었으니, 참 거지같은 심정이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 또한 내가 너무 커 세상을 못 보는 눈 뜬 소경이었을 뿐이다.

눈 뜬 나도 이럴진대, 보이지 않는 심봉사가 눈만 뜨면 벼슬길로 나아가 입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싶다.

심봉사는 볼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눈을 뜨고 싶은 욕망에 정말 눈이 멀고 만다. 그래서 공양미 300백석을 절에 시주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이야기를 청에게 털어놓는다.

심청의 목숨과 바꾼 심봉사의 처지의 변화.

딸 심청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죽음의 이별을 했지만 사람들에게 받는 대접이 달라지자 그동안 억눌러 두었던 욕망이 꽃 같이 피어오른다.

그는 한껏 즐긴다.

눈만 뜨면 이루겠다던 포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오로지 쾌락을 쫓는다.

노름판에 끼기도 하고, 떠돌이 기생 애랑에 푹 빠져,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눈뜸에 대한 믿음과 스님과의 약속도 의심하며 당장의 쾌락을 위해 급기야 절에 바친 공양미 일부를 찾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백중 날, 애랑을 탐하며 체력을 소진해 기도에 정성을 다하지 못한다.

욕망이라는 호랑이 꼬리를 잡은 심봉사.

애랑이가 재산을 가지고 도주를 하고, 남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오지만 애욕은 그대로다. 그것이 지옥으로 가는 길인 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자신의 정념을 불태울 꿈을 꾼다.

 

심봉사도 자신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고 있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누군가 자신을 간절히 구원해 주길 바라지만 결코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그에게 구원의 여인을 구별할 능력은 없다. 그리고 마침내 타락의 지옥에 핀 꽃, ‘뺑덕어미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목줄을 매고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개꼴이 된 것이다.

그는 목줄에 매인 채로 뺑덕어미를 따라 고향을 떠난다. 남은 전 재산을 힘겹게 등에 지고서.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재산을 지키고자 생선을 탐내는 고양이를 데리고 길을 떠난 것이다. 그 여행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훤하지만 눈이 먼 그에겐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헤어날 길 없는 급류로 뛰어든 꼴이었으니까.

우리들도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알고 있다. 그저 알량한 재미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나를 사랑으로 감싸 건져주길 기다린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고, 내가 필요할 때마다 수호신이 나타나주는 동화의 세계는 더구나 아니다. 어른들에게도 동화가 필요하지만 인간만사는 그렇게 인자하지 않다.

자포자기의 상태로 물에 휩싸여 흘러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노를 저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쾌락에 휩싸여 모든 것을 다 잃어 인생의 마지막을 향하던 심봉사는 나라에서 베푼 봉사들을 위한 잔치에 참가하고 있다. 그나마 쥐꼬리만큼의 운이 남아있어 가는 길에 마음의 눈을 뜬 황봉사를 만나고 그를 통해 영성이 깨어난다. 그 또한 심청이 몸을 헌신하여 얻은 공양미 덕분이겠지만....

심봉사를 위해 만들어진 잔치.

그 잔치 역시 심청이 만든 잔치가 아니던가.

 

<구원의 연인 심청>

심청은 지극한 효성을 지닌, 어른 같은 소녀다.

그녀는 출생부터 아프다. 자신을 낳고 죽어버린 엄마와 눈이 먼 아버지. 그런 아픈 환경 때문인지 일찍 철이 든다.

 

어린나이임에도 집안의 가장으로 아버지를 봉양하고 힘든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그 때문에 마을에서 효성이 지극하다는 칭찬도 받는다. 하지만 심청에게 그 칭찬은 날이 갈수록 족쇄가 된다. 생활이 힘든 것을, 마음이 못된 것을 나타낼 수가 없다.

 

때로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아버지의 반찬 투정과 신세 한탄에 속이 상하기도 하고, 꼬질꼬질 늙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미울 때도 있지만 그런 심정은 연민으로 상쇄하며 그래도 사랑하는 윤상오빠가 이웃으로 있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어느 날 심봉사의 공양미 삼 백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심청은 폭풍같은 번민에 휩싸인다.

심청은 혜안을 가졌고 삶을 통찰하고 있다. 번민 속에서, 꽃상여에 실려 저승길을 가던 장 상서 어른을 생각해 낸다.

 

- 본문 89.

그렇구나. 기름지게 살아도, 없이 살아도 삶은 끝나게 마련이구나. 이런 게 삶이라면.....

청이는 자기 삶에 미련을 품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단 하나, 가엾은 아버지만은.’

 

심청은 결심한다

제물이 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무거운 출생의 고뇌를 내려놓는 자리를 찾아낸 것이다. 그건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이기도 했다.

 

인당수 바다.

뱃전에서 그녀는 모두를 위해 염원한다.

심청은 인당수 바다에 생명을 버림으로써 전생의 업보를 씻는다.

전생에 유리선녀였던 그녀는, 현생의 아버지인, 선관 유형을 사랑한 죄업을 물로 정화한다.

하늘의 뜻을 거스른 유리와 유형.

금기를 어긴 그들에게 내려진 벌은 부녀지간으로 인간 세상에 태어나, 그 땅에서 유리는 힘들게 유형을 받들고, 유형은 얻어먹으며 살아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는 환경에 처해 살아가는 것.

심청은 인당수 물길을 따라 용궁에 도착하고 용왕으로부터 죄업을 다 씻었으니 하늘로 돌아가라는 명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현생의 아버지가 궁금하다. 전생에 선관 유형이었던 아버지.

혼자서 돌아갈 수는 없다.

자신은 죄업을 벗었지만 아직 깨닫지 못하여 인간세상에서 떠돌고 있는 아버지.

 

자신만의 죄업을 닦는 것만이 업보를 없애는 길이 아니라 죄업을 씻지 못한 유형을 건져야 그 업이 끝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안락하게 살 수 있는 하늘 세상을 버리고 인간세상으로 돌아온다.

 

심청이 효녀 심청에서 만인의 연인심청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작가는 심청을 통해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자신을 희생하는 일.

안락보다는 책임을 다하는 일.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 할지라도 태어난 이상 책임과 의무는 행해야 한다고.

그것이 나를 구하고 주변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그건 인간도 몸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몸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동물처럼 생명을 지키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성은 영혼에 있고, 영혼은 분명 본능을 넘어서는 무엇이 아닐까. 나는 본능을 넘는 그 무엇을 책임을 다하는 것, 달리 말하면 이타심이라 하고 싶은 것이다.

심청은 이러한 것들을 모두 몸으로 행한다.

 

심청의 인간 세상 귀환은 개인을 넘어 사회에 대한 책임 실천이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고전 소설의 특징은 권선징악. 교훈적이며 윤리적이다.

하지만 현대는, 심청을 통해 만 강조해도 충분했던 조선시대가 아니다.

 

대가족과 효를 강조하고 우리를 강조하던 우리의 문화는, 서구 유럽문화가 들어오면서 우리란 개념이 사라지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개인화 과정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런 결과로, 우리, 혹은 개인의 의무나 책임보다는 라고 하는 이기심이 우리의 정서를 덮어버렸다. 굳이 통계를 들이대지 않아도 를 나타내는 문화는 가족해체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일 것이다.

 

특히 가정을 유지하는 힘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강하다.

가부장적이며 여성의 자아를 옥죄었던 관습이 힘을 잃게 되자, 여성들의 가 강하게 드러나면서 가족의 해체는 더 빨리 진행되었다. 점점 느슨해지는 가족의 결속을 바라보며 작가는 간절히 자비심이 가득한 관세음보살의 출현을 기원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구원의 상징인 <연인 심청>을 그렸던 것인가

 

사람들은 무한 리필음식점을 좋아한다. 무한 책임을 다하는 보험을 선호한다. 성실하게 축구장을 뛰면서 어떤 포지션에서든지 책임을 다하는 박지성을 올그라운드 플레이어라 칭하며 사랑한다.

 

하지만 개인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은 절대 손해 볼 수 없다. 사랑을 맹세하고 검은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를 서약한 결혼일지라도 마찬가지다. 혼수 문제로도 결혼 약속을 엎는 판이니 너는 나를 나만큼 사랑하지 않아’, ‘다른 여자, 혹은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 말도 안 돼라는 마음의 손해를 주장하며 이혼을 하는 정도는 애교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전생과 이생을 통해 무한 책임을 다하는 심청에게서 구원의 상을 보았다.

그리고 효녀 심청을 만인의 연인으로 만들었다.

, 잘못을 따지지 않는 심청이란 소녀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세상.

그 세상에서는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된다.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불국토를 이루는 곳. 마음>

  작가는 인간 세상의 불국토는 마음이라 말한다.

우리의 모습이었던 심봉사도 잔치에서 심청을 만나 눈을 뜬다. 물리적 눈만 뜬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도 뜬다.

소원이었던 눈을 뜨고 딸을 직접 보게 되었고, 딸은 그 나라의 왕비다. 옛날의 심봉사였다면 어땠을까. 돈을 가진 것만으로도 그렇게 휘둘리며 욕망만 쫓아 살았는데, 권력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뜬 심봉사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깨닫고 회한과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새 삶을 찾아 오히려 안락한 삶이 보장된 궁궐을 떠난다.

 

불법에서는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심봉사의 개안은 바로 그 증거인 모양이다.

소설의 막바지.

심청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

상제에게 올리는 아비 목숨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 소리

자신이 다시 한 번 더 죽어 아비를 구하겠다는.

결단코 아비를 살려 그 업에서 구하겠다는 심청의 기도소리는, 이번 생에 생명을 받은 자로서 세상에 대한 원망과 시비를 가리는 업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염불로, 은은한 침향으로 나에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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