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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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초반부의 심청은 내가 알고 있던 심청전의 심청이었다.

그녀 이름 앞에 늘 붙어 다니는 효녀’.

교묘하게 위장한 정책의 방편일수도 있었던, 효를 강조했던 조선시대가 요구했던 바로 그 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심봉사는 달랐다. 눈이 멀어 무능했지만 심성 착한 아버지 심학규가 아니었다. 초반부터 심봉사가 심상치 않았다.

 

< 바로 우리의 모습인 심봉사 >

한 때 꿈꾸지 않은 자 어디 있으랴!

세상을 굽어보며 세상을 평정하리라.

사람들 위에 우뚝 서는 그런 날이 오리라.

때가 되면 나비의 날개를 펼치고 멋지게 날아오를 것이다.

그런 포부를 가져보지 않은 자 몇이나 될까.

심봉사도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런 때를 기다린다.

- 본문 15-

아아, 심봉사는 그 아득한 창공을 나는 새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멀리 저 아래 올망졸망 인간 세상이 굽어보인다. 어쩌면 저렇듯 누추하게 사는지. 어쩌면 저렇게 어리석게 사는지. 매미 따위나 작은 새들의 좁은 품으로 어찌 뜻을 헤아리랴.’

그러나 온다는 그 때는 어디로 갔는지.

탓만 늘어나지 않았던가.

부모를 잘 못 만나서.

돈이 없어서.

가족이 도와주지 않아서.

세상이 나를 알지 못해서.

꿈만 꾸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세상에 공짜가 없다. 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공짜만 바라고 살지 않았던가. 하기 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리석은 나! 아니 실천에 게을렀던 화려한 꿈들. 그게 바로 공짜심리였던 걸 깨닫기가 그토록 어려웠을까.

돌이켜 보면 나도 심봉사였다.

인격의 주체가 되어 주인으로서 나를 이끌어 왔다고 착각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스스로 뜻을 세워 한 일은 별로 없고 부화뇌동으로 사회의 이익을 쫓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재미난 일을 추구했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바라던 일이 그냥 이루어져 하늘에서 뚝 떨어지길 바란 적도 있었으니, 참 거지같은 심정이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 또한 내가 너무 커 세상을 못 보는 눈 뜬 소경이었을 뿐이다.

눈 뜬 나도 이럴진대, 보이지 않는 심봉사가 눈만 뜨면 벼슬길로 나아가 입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싶다.

심봉사는 볼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눈을 뜨고 싶은 욕망에 정말 눈이 멀고 만다. 그래서 공양미 300백석을 절에 시주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이야기를 청에게 털어놓는다.

심청의 목숨과 바꾼 심봉사의 처지의 변화.

딸 심청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죽음의 이별을 했지만 사람들에게 받는 대접이 달라지자 그동안 억눌러 두었던 욕망이 꽃 같이 피어오른다.

그는 한껏 즐긴다.

눈만 뜨면 이루겠다던 포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오로지 쾌락을 쫓는다.

노름판에 끼기도 하고, 떠돌이 기생 애랑에 푹 빠져, 자신이 그토록 염원했던 눈뜸에 대한 믿음과 스님과의 약속도 의심하며 당장의 쾌락을 위해 급기야 절에 바친 공양미 일부를 찾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백중 날, 애랑을 탐하며 체력을 소진해 기도에 정성을 다하지 못한다.

욕망이라는 호랑이 꼬리를 잡은 심봉사.

애랑이가 재산을 가지고 도주를 하고, 남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오지만 애욕은 그대로다. 그것이 지옥으로 가는 길인 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자신의 정념을 불태울 꿈을 꾼다.

 

심봉사도 자신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고 있었다.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누군가 자신을 간절히 구원해 주길 바라지만 결코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그에게 구원의 여인을 구별할 능력은 없다. 그리고 마침내 타락의 지옥에 핀 꽃, ‘뺑덕어미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목줄을 매고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개꼴이 된 것이다.

그는 목줄에 매인 채로 뺑덕어미를 따라 고향을 떠난다. 남은 전 재산을 힘겹게 등에 지고서. 보이지 않는 눈으로 재산을 지키고자 생선을 탐내는 고양이를 데리고 길을 떠난 것이다. 그 여행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훤하지만 눈이 먼 그에겐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혼자의 힘으론 도저히 헤어날 길 없는 급류로 뛰어든 꼴이었으니까.

우리들도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알고 있다. 그저 알량한 재미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나를 사랑으로 감싸 건져주길 기다린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고, 내가 필요할 때마다 수호신이 나타나주는 동화의 세계는 더구나 아니다. 어른들에게도 동화가 필요하지만 인간만사는 그렇게 인자하지 않다.

자포자기의 상태로 물에 휩싸여 흘러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노를 저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쾌락에 휩싸여 모든 것을 다 잃어 인생의 마지막을 향하던 심봉사는 나라에서 베푼 봉사들을 위한 잔치에 참가하고 있다. 그나마 쥐꼬리만큼의 운이 남아있어 가는 길에 마음의 눈을 뜬 황봉사를 만나고 그를 통해 영성이 깨어난다. 그 또한 심청이 몸을 헌신하여 얻은 공양미 덕분이겠지만....

심봉사를 위해 만들어진 잔치.

그 잔치 역시 심청이 만든 잔치가 아니던가.

 

<구원의 연인 심청>

심청은 지극한 효성을 지닌, 어른 같은 소녀다.

그녀는 출생부터 아프다. 자신을 낳고 죽어버린 엄마와 눈이 먼 아버지. 그런 아픈 환경 때문인지 일찍 철이 든다.

 

어린나이임에도 집안의 가장으로 아버지를 봉양하고 힘든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그 때문에 마을에서 효성이 지극하다는 칭찬도 받는다. 하지만 심청에게 그 칭찬은 날이 갈수록 족쇄가 된다. 생활이 힘든 것을, 마음이 못된 것을 나타낼 수가 없다.

 

때로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아버지의 반찬 투정과 신세 한탄에 속이 상하기도 하고, 꼬질꼬질 늙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미울 때도 있지만 그런 심정은 연민으로 상쇄하며 그래도 사랑하는 윤상오빠가 이웃으로 있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어느 날 심봉사의 공양미 삼 백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심청은 폭풍같은 번민에 휩싸인다.

심청은 혜안을 가졌고 삶을 통찰하고 있다. 번민 속에서, 꽃상여에 실려 저승길을 가던 장 상서 어른을 생각해 낸다.

 

- 본문 89.

그렇구나. 기름지게 살아도, 없이 살아도 삶은 끝나게 마련이구나. 이런 게 삶이라면.....

청이는 자기 삶에 미련을 품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단 하나, 가엾은 아버지만은.’

 

심청은 결심한다

제물이 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무거운 출생의 고뇌를 내려놓는 자리를 찾아낸 것이다. 그건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이기도 했다.

 

인당수 바다.

뱃전에서 그녀는 모두를 위해 염원한다.

심청은 인당수 바다에 생명을 버림으로써 전생의 업보를 씻는다.

전생에 유리선녀였던 그녀는, 현생의 아버지인, 선관 유형을 사랑한 죄업을 물로 정화한다.

하늘의 뜻을 거스른 유리와 유형.

금기를 어긴 그들에게 내려진 벌은 부녀지간으로 인간 세상에 태어나, 그 땅에서 유리는 힘들게 유형을 받들고, 유형은 얻어먹으며 살아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는 환경에 처해 살아가는 것.

심청은 인당수 물길을 따라 용궁에 도착하고 용왕으로부터 죄업을 다 씻었으니 하늘로 돌아가라는 명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현생의 아버지가 궁금하다. 전생에 선관 유형이었던 아버지.

혼자서 돌아갈 수는 없다.

자신은 죄업을 벗었지만 아직 깨닫지 못하여 인간세상에서 떠돌고 있는 아버지.

 

자신만의 죄업을 닦는 것만이 업보를 없애는 길이 아니라 죄업을 씻지 못한 유형을 건져야 그 업이 끝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안락하게 살 수 있는 하늘 세상을 버리고 인간세상으로 돌아온다.

 

심청이 효녀 심청에서 만인의 연인심청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작가는 심청을 통해 구원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자신을 희생하는 일.

안락보다는 책임을 다하는 일.

세상에 태어나는 일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 할지라도 태어난 이상 책임과 의무는 행해야 한다고.

그것이 나를 구하고 주변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그건 인간도 몸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몸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동물처럼 생명을 지키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성은 영혼에 있고, 영혼은 분명 본능을 넘어서는 무엇이 아닐까. 나는 본능을 넘는 그 무엇을 책임을 다하는 것, 달리 말하면 이타심이라 하고 싶은 것이다.

심청은 이러한 것들을 모두 몸으로 행한다.

 

심청의 인간 세상 귀환은 개인을 넘어 사회에 대한 책임 실천이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고전 소설의 특징은 권선징악. 교훈적이며 윤리적이다.

하지만 현대는, 심청을 통해 만 강조해도 충분했던 조선시대가 아니다.

 

대가족과 효를 강조하고 우리를 강조하던 우리의 문화는, 서구 유럽문화가 들어오면서 우리란 개념이 사라지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개인화 과정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런 결과로, 우리, 혹은 개인의 의무나 책임보다는 라고 하는 이기심이 우리의 정서를 덮어버렸다. 굳이 통계를 들이대지 않아도 를 나타내는 문화는 가족해체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일 것이다.

 

특히 가정을 유지하는 힘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강하다.

가부장적이며 여성의 자아를 옥죄었던 관습이 힘을 잃게 되자, 여성들의 가 강하게 드러나면서 가족의 해체는 더 빨리 진행되었다. 점점 느슨해지는 가족의 결속을 바라보며 작가는 간절히 자비심이 가득한 관세음보살의 출현을 기원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구원의 상징인 <연인 심청>을 그렸던 것인가

 

사람들은 무한 리필음식점을 좋아한다. 무한 책임을 다하는 보험을 선호한다. 성실하게 축구장을 뛰면서 어떤 포지션에서든지 책임을 다하는 박지성을 올그라운드 플레이어라 칭하며 사랑한다.

 

하지만 개인 속을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은 절대 손해 볼 수 없다. 사랑을 맹세하고 검은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를 서약한 결혼일지라도 마찬가지다. 혼수 문제로도 결혼 약속을 엎는 판이니 너는 나를 나만큼 사랑하지 않아’, ‘다른 여자, 혹은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 말도 안 돼라는 마음의 손해를 주장하며 이혼을 하는 정도는 애교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전생과 이생을 통해 무한 책임을 다하는 심청에게서 구원의 상을 보았다.

그리고 효녀 심청을 만인의 연인으로 만들었다.

, 잘못을 따지지 않는 심청이란 소녀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세상.

그 세상에서는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된다. 영원히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세상의 불국토를 이루는 곳. 마음>

  작가는 인간 세상의 불국토는 마음이라 말한다.

우리의 모습이었던 심봉사도 잔치에서 심청을 만나 눈을 뜬다. 물리적 눈만 뜬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도 뜬다.

소원이었던 눈을 뜨고 딸을 직접 보게 되었고, 딸은 그 나라의 왕비다. 옛날의 심봉사였다면 어땠을까. 돈을 가진 것만으로도 그렇게 휘둘리며 욕망만 쫓아 살았는데, 권력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뜬 심봉사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깨닫고 회한과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새 삶을 찾아 오히려 안락한 삶이 보장된 궁궐을 떠난다.

 

불법에서는 만물에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심봉사의 개안은 바로 그 증거인 모양이다.

소설의 막바지.

심청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

상제에게 올리는 아비 목숨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 소리

자신이 다시 한 번 더 죽어 아비를 구하겠다는.

결단코 아비를 살려 그 업에서 구하겠다는 심청의 기도소리는, 이번 생에 생명을 받은 자로서 세상에 대한 원망과 시비를 가리는 업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염불로, 은은한 침향으로 나에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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