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복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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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마쓰모토 세이초. 그의 작품 중 읽은 것은 [제로의 초점]이라는 장편소설이었는데, 단편이 이만큼의 완성도를 갖는다면 이 작가는 장편보다 단편을 쓰는 편이 더 괜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로의 초점]의 전개는 조금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잠복]에 실린 단편작품들은 깔끔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물론 장편에 비해 긴장이나 스릴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거나, 장편에서 볼 수 있는 논리적인 두뇌싸움은 엿볼 수 없지만 미스터리인만큼 단편을 이만큼 써내기는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총 8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제로의 초점]을 단편화한 것 같은 <얼굴>부터, 쫓기는 용의자를 찾기 위해 그의 옛 연인을 감시하는 형사의 안타까운 심리가 고스란히 투영된 <잠복>,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아래 자식까지 해칠 수 있는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그려낸 <귀축>, 도쿄에서 낙향한 한 신문기자가 심상치 않은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투영>, 전화교환원이었던 여성이 잘못 건 전화로 인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목소리>,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닌 다른 지방의 신문을 구독하려 하는 <지방신문을 구독하는 여자>의 사연, 남편을 살해한 여인의 숨겨진 욕망을 그린 <일 년 반만 기다려>, 망망대해에서 배가 난파했을 경우 널 하나에 매달려 있는 다른 사람을 빠뜨려 죽이고 자신만 사는 것의 정당함을 비유한 <카르네아데스의 널>까지.

 

작품집을 읽으면서 '인간, 참 무섭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됩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타인은 물론이고 가족이나 사랑하는 여인까지 마음껏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행동은 인간으로서 진화한 것의 부정적인 면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인간의 그런 어두운 면 뿐 아니라 정의로운 부분, 아무리 용의자라고는 해도 그 사람으로 인해 행복을 느끼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 논리적인 분석력 등 작가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여기에 담아낸 듯 합니다. 장편이라면 조금 늘어질 수도 있는 이야기 속에서 적당한 긴장감과 포인트를 내세워 시종일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답니다.

 

사실 저는 [제로의 초점]을 읽고 조금 실망했었어요. 시대적인 격차, 세대적인 격차를 감안하더라도 자극적인 스릴러와 미스터리에 길들여져 있던 터라 조금 시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죠. 그런데 [잠복]에서 느껴지는, 작가가 살아 숨쉬던 시대의 풍취는 뭐랄까, 구수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오묘한 맛을 내고 있습니다. -인간성이 드러나는 추리소설을 쓰고싶었다-는 그의 진심이 잘 반영된 작품입니다. 픽션 뿐만 아니라 논픽션 부분에서도 두드러지는 작가인 듯 한데 한 권씩 그의 작품을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요렇게 독서의 재미가 증가한다는 것, 참 기쁘지 아니한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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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변 십자가 모중석 스릴러 클럽 31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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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드라마 <솔직하지 못해서>는 트위터를 통해 마음을 나누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것이 아니라서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누군가와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어요. 저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모임을 갖는다는 것에 거리감마저 느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부 사람들의 모습일 뿐, 그런 일이 이렇게 금방 평범한 풍경이 될 거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나마 저는 스마트인이 된 지 이제 2주일 째. 아날로그 인간이라 주장하는 저지만 스마트한 세계가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나눈다는 건, 누구에게나 벅찬 일이니까요.

 

그런데.

 

<크리미널 마인드>는 프로파일러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미국드라마입니다. 그 드라마 중 어떤 범인이 SNS를 통해 희생자를 고르는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그 희생자의 블로그에는 그녀의 직업, 주소, 사진 등의 개인정보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 지, 무엇을 먹고있는 지 등 온갖 이야기가 저장되어 있었어요. 블로그=그녀의 모든 것. 이었던 거죠. 사실 인터넷상에서 저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런 범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누군가와 좋은 인연을 맺을 수도 있지만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그 드라마를 통해 새삼 깨달았습니다. 나는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속속들이 안다는 건 무서운 일이잖아요.

 

[도로변 십자가]는.

 

바로 인터넷 상에서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지, 한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과 집단의식이 그 사람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하나의 이야기를 아무 의심없이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 지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진실이라고 해도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한 발언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 지 늘 생각해야 한다는 점도요. 요즘 인터넷 상에 자주 등장하는 악플로 인한 자살같은 현상은 바로 SNS의 가장 부정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잠자는 인형]에서 동작으로 상대방을 꿰뚫어보던 캐트린 댄스가 이번에는 사이버 수사를 위해 돌아왔습니다. 사실 [도로변 십자가]는 스릴러로서의 긴장과 스피디함은 조금 부족한 편이에요. 다른 스릴러물에 비해 잔혹한 표현이 적은 것은 마음에 듭니다. 제프리 디버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이제 세계는 진정한 의미의 '지구촌 마을'이 되었으니까요. <솔직하지 못해서>의 순기능이 있는 반면 <크리미널 마인드>의 역기능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도로변 십자가]에서 작가가 심혈을 기울였다고 여겨지는 점은 캐릭터였습니다. 밖으로 자신을 내보이지 못하고 가상공간에서야 자유로워지는 소년, 이상하다고 여긴 사람을 집단으로 모략하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고통이야 어떻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검사, 진실이라는 미명 아래 타인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블로거 등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많았습니다. 마치 각각의 사람들에 실제의 모델이 존재할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어요. 그 모든 캐릭터들이 모여서 인터넷 상에서의 우리 모습과 지켜야 할 자신의 소신에 관해 꽤 심도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정작 주인공 캐트린 댄스의 비중이 조금 작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형사라는 점은 변함 없으니까요. 동료 형사 마이클 오닐과 컨설턴트로 등장한 존 볼링이라는 교수와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는데,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 지. 개인적으로는 오닐이 좋습니다만. 으훗. [도로변 십자가]는 스릴러 작가로서의 디버가 새로운 경지를 밟은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되면 다음 작품인 [XO]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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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셀러 - 소설 쓰는 여자와 소설 읽는 남자의 반짝이는 사랑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3
아리카와 히로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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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일본어를 우리말로 번역했을 때 이보다 더 유치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말 번역본보다 원서를 찾아 읽고 싶어지기도 해요. 그 어떤 장르보다 연애소설일 때 우리말로 옮겨진 단어들을 보며 오글오글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요, [스토리셀러]는 그 오글오글함의 법칙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오글오글함이 전혀 싫지가 않은 거에요. 그것은 순전히 남자주인공의 공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성 독자들이라면 조금 반대하실 수도 있겠지만 여자들에게 이런 남자, 차~암 괜찮거든요!

 

작품은 독특하게도 두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두 글을 쓰는 여자와 글을 읽는 남자의 러브 스토리에요. 글을 쓰는 여자의 재능을 만나 기뻐하는 남자와 그런 남자의 도움을 받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여자.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이 둘의 행복이 깨어지는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병에 걸린 여자와 또 병에 걸린 남자. 한 쪽의 이야기는 결말이 꽤 정확하지만 다른 쪽의 이야기는 확실하지가 않아 좀 더 미련을 남기게 되는 이야기였어요. 두 편 모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한 번쯤 꿈꿔봤을 내용이죠. 저는 글을 읽는 사람이라 남자 주인공들에 더 감정이입이 되더군요. 내 앞에 만약 재미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작가로 데뷔해서 그 글에 영향을 주며 살 수 있다면, 참 재미있는 날들이 될 거에요.

 

유치하게 느껴지면서도 남자 주인공들, 여자 입장에서 참 바람직합니다. 글을 쓰는 여자를 옆에서 얼마나 잘 도와주는지. 심지어 아침이라도 챙겨주려고 부시시 일어나는 여자에게 '너는 글을 잘 써야 하니까 내 아침일랑 챙겨줄 생각 말고 네 생활 사이클이나 잘 지켜!'라며 엄포를 놓습니다. 요리도 잘 해, 청소도 잘 해, 여자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때로는 정의롭게 때로는 음험하게 복수도 해줘, 사랑하는 방법도 용감하면서 섬세해, 도저히 현실에는 있을 것 같지 않은 남자들이랍니다. 여자인 저는 속으로 이런 남자가 있을 리 없어!-를 외치면서도 대리만족이라도 했지만 남자들에게 공공의 적이라 불릴만한 그런 사람이에요. 넝쿨당의 귀남이같은?!

 

아리카와 히로는 [백수 알바 내 집 장만기]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요, 쉽게 이해되는 문장과 내용이면서도 감동을 줄 줄 아는 그런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토리셀러]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독특한 플롯으로 마음을 사로잡았고 소설임에도 부디 그들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만들었어요. 와글와글 깨물어먹고 싶은 표지만큼이나 오글오글한 러브스토리. 아리카와 히로 특유의 유머와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오늘밤만은 전 세계 사랑하는 연인들이 행복하기를~*참고로 월간 <다빈치> 선정 올해의 연애소설 1위, 2011 일본 서점대상 10위를 차지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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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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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내내 스릴러와 미스터리를 끼고 사는 저이지만 무차별 살인은 좋아하지 않아효. 제가 바라보고 싶어하는 것은 사건을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 가장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사람들의 심리 등입니다. 그런 점에서 [후회와 진실의 빛]은 손가락을 잘라간다는 사건의 소재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머지 조건에서 굉장한 문제의식을 제기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인터넷의 익명성과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의식의 팽배,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등 여러 생각할 점을 제시하거든요. 사건전개가 스피디하지도 않고 영미스릴러처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은 부족하지만 영미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 특유의 매력으로 빛을 발하는 작품입니다.

 

지금까지 몇 편의 형사소설을 읽어왔는데요, 대부분의 형사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정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된 삼총사처럼 주인공을 필두로 으샤으샤하며 범인을 검거하죠. 물론 삐딱선을 타는 인물이야 간혹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런 인물도 성향이 조금 다를 뿐 정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해서 결국에는 주인공과 하나가 된다는 스토리라인이 대부분이었던 듯 합니다. [후회와 진실의 빛]도 사건을 해결하는 경찰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여느 형사소설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지만 그 주변인물들이 좀 더 입체적이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인공 사이조 고지는 한마리 고고한 학과도 같은 인물이에요. 공로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사건을 해결하는 일에만 매달릴 뿐인데, 명석한 두뇌와 사건해결에 대한 열의가 남달라 주위 사람들의 오해를 사죠. 그런 그의 능력을 시기질투하여 자격지심에 그를 증오하는 와타비키같은 인물이 있는가하면,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고 있다가 사이조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묻어두었던 감정을 터뜨리며 모른 척 하는 누구도 있고, 심술궂게 그를 곤경에 빠트리는 누군가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이조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그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지는 않죠. 오히려 그를 오해하고 미워하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범인을 검거하여 공로를 세우는 데만 급급한 인물들입니다. 정의, 범인검거라는 이름을 좇는 건 같지만 하나가 되기보다는 '자신'만 되려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현실감을 느꼈다고 할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무래도 그런 편에 속할테니까요. 너무나 현실적인 모습에 씁쓸하기도 했습니다만.

 

작가가 문제시하는 또 다른 모습은 인터넷의 익명성과 그를 통한 생명경시, 현실과 가상세계의 허술한 경계, 엄청난 이기주의입니다. 작품 속 범인은 자신의 범죄와 범죄예고를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는데요, 그런 범인의 모습보다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충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범행예고에 언제 죽일건지, 어떻게 할 건지 댓글을 달고 범행완료 글에 다른 누군가도 없애달라며 달려드는 모습에서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일 겁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우리 사회에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검증되지 않은 보도와 그로 인한 악플, 자살.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어둠입니다.

 

이 작품만큼 주인공 형사를 곤경에 빠트리는 작품도 없을 거에요. 하지만 그런 곤경을 통해 비로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 사이조. 마지막 장면을 보면 후속편이 나올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 여러 인물들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우행록]이나 [통곡]보다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드네요. 야마모토슈고로상을 수상할만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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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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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고 습기를 머금어 촉촉해진 공기가 일본문학을 읽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하루키. 이상도 하지. 그의 문학을 전부 읽은 것도 아니고 그의 세계를 온통 꿰뚫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하루키는 내게 일본 그 자체였고 나의 추억이었다. 때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나도 단 한 권이면 충분했으니까. 모든 것이 심각해지던 그 때, 사랑과 추억이라는 단어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온 하루키였으니 나는 그를 더 잊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설령 읽지 않더라도 차곡차곡(!) 쌓아두는 기쁨이라도 누려보고 싶은 것일지도. 어쨌든 그의 작품은 나를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특별한 힘이 있다. 오로지 나만 맡을 수 있는 냄새와 감성.

 

이번 에세이집은 [잡문집]보다 훨씬 더X 100 정도로 마음에 든다. 적당한 두께와 아기자기한 그림들, 훨씬 더 힘을 빼고 쓴듯한 소소한 일상 이야기. 게다가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끄적여 놓은 앙증맞은 메모라니! 또 이상도 하지. 누군가가 쓴 소소한 일상 에세이는 콧방귀를 뀌게 만드는가 하면, 어떤 이가 쓰는 글에는 무작정 마음을 의지하고 싶어질 때가 있으니. 이것은 엄청난 편애-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채소의 기분'과 '바다표범의 키스'라니 제목만으로도 마음의 벽이 스르르 무너지는 걸.

 

하지만 <채소의 기분>이라는 귀여운 제목의 글은 제목처럼 귀엽지만은 않다. 영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에서 등장한 '채소의 기분'은 이렇게 인용되고 있으니까.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

귀여운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대사에 순간 '아니, 채소가 뭐 어때서! 당신이 채소의 기분을 알기나 해?'라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물론 하루키가 아닌 영화 속 인물에게. 그런 기분을 하루키 또한 느꼈는지 그는 이렇게 이야기해준다.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누군가 단호히 말하면 무심결게 "그런가?"하게 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

그의 이런 세심함과 엉뚱한 것처럼 느껴지는 역정이 좋다. 살면서 꼭 꿈을 좇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꿈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면 어쩌려고. 나는 그저 하루하루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지금 이 삶이 참 좋다. 최대 숙제가 하나 남아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걱정해봐야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유유자적. 오늘 하루 충실하게 보냈다 싶고, 잠자리에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면 그걸로 만족.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한량인생 모드로 행복하다. 그러니 꿈을 좇지 않는다 나무라지 마시길. 유익한 채소도 깎아내리지 말고.

 

<바다표범의 키스>는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그 반전의 묘미는 선물로 드릴게요. 쪽.

 

소제목 하나하나도 그의 유쾌함을 대변하고 있지만, 그 중 <앵거 매니지먼트>는 제목도 글의 내용도 전부 마음에 든다.

 

 무슨 일인가로 확 열이 받아도 그 자리에서는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고 한숨 돌렸다가 전후 사정을 파악한 뒤에 '이 정도라면 화내도 되겠어' 싶을 때 화를 내기로 했다. 이른바 '앵거 매니지먼트'다.

나는 화가 나면 입을 꾹 다문 채 머리를 풀가동시키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오랜 시간 찬찬히 곱씹으며 내가 그 일로 화를 내도 되는 건지, 화가 났다면 어떤 부분에서 났는지, 해결하려면 무슨 말로 상대에게 내 마음을 전달해야 할지 생각한다. 학교에서도 조금 마음 상하는 일이 있어도 '나중에 얘기하자'며 아이와 즉각적인 상황을 피하고 한 두 시간 지난 후에야 불러서 내 마음을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감정에 치우쳐 아이를 다그치는 일이 없어지고 서로의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는 듯. 아무 일면도 없는 하루키와 내가 한 가지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그 방법 나도 알아'라는 마음에 괜히 뿌듯해졌다. 크흐.

 

소소한 일상 에세이를 잘 쓰려면 힘이 빠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러 남을 감동시키려 하지말고, 오글거리는 말로 상대에게 부담주려하지 말고. 그저 마음에 넘쳐나는 진심을 다해서 진솔한 이야기를 펼쳐낸다면 누구나 그 마음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진심은 전해지는 법이니까.

 

여름이 왔다. 비도 자주 오고. 하루키를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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