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담은 배 - 제129회 나오키상 수상작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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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번 번역되었던 책이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면, 그 책에 대한 번역가의 애정이 남달라서일까요, 그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찬사와 사랑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일까요. 한 쪽에만 해당될 수도, 양쪽 모두의 이유일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작품이 재번역된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갔을테니까요. [별을 담은 배]는 129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그것이 2003년이니 벌써 11년도 더 전의 일이네요. 좋은 작품은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죠. 이 작품도 부디 그렇게 되길 바라봅니다. 가족들의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다루고 있는 일본인의 눈으로 본 전쟁과 위안부 소재는 하나의 살아있는 역사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총 여섯 편의 연작 단편집입니다. 각각의 주인공은 한 가족이에요. 의붓동생인 줄 알았다가 사랑에 빠진 사에가 사실은 이복동생이라는 충격에 집을 나간 아키라, 집안의 막내로서 힘겨움을 감내하고 명랑한 척 지내온 미키가 감추고 있던 어둠, 한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아키라를 마음에서 지우지 못한 사에, 집안의 장남으로서 살아왔고 이제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50대를 맞이한 미쓰구가 겪는 고뇌, 그의 딸인 사토미가 맛보는 청춘의 쌉싸름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일이 일어난 시작을 만들어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 시게유키가 노년을 맞이하여 과거를 되돌아보는 감회가 그려져 있어요. 그 때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고통들-10대인 사토미가 느끼는 친구에 대한 동경과 약간의 질투, 30대를 갓 넘긴 미키가 겪는 삶에 대한 불안함 등-이 마치 작가가 한 명 한 명의 캐릭터 안에 녹아있는 듯 그들의 입을 빌어 저마다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키라와 사에의 사랑도 가슴 아팠고, 미쓰구가 느끼는 허무함도 안쓰러웠지만 역시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아버지 시게유키가 등장하는 파트인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전쟁에 참가했던 시게유키는 그 곳에서 인간이 인간답지 못할 수 있다는 것,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몸으로 겪게 됩니다. 그 곳에서 만난 조선인 위안부 야에코, 한국이름 강미주.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이 조선인임을 잊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나가려했던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그녀를 사랑하게 된 시게유키는 참혹하게 그녀를 잃었고 현재에서는 그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로 비춰지죠. 겪어보지 못한 전쟁을 젊은 사람들이 뭘 알고 떠드는가 우습기만 하고, 그렇다고 전우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 때를 미화시키는 것도 고통스럽기만 한 시게유키. 작가는 전쟁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해버린 시게유키라는 인물을 통해 전쟁 그 자체의 참혹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일본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할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합니다. 일본 정부에 대해 우리국민의 불신이 깊어지는 요즘, 일본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라고 외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시게유키의 두 번째 부인 시즈코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듯 합니다. 지주막하출혈로 이미 작품의 처음부터 죽음을 맞은 그녀는 미쓰구와 아키라를 키워내고, 사에와 미키를 낳은 후처입니다. 미쓰구와 아키라의 어머니였던 하루요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시게유키와 관계를 맺어왔고 그로 인해 사에를 덜컥 갖게 된 그녀는, 작품 안에서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가족들에게 그 누구보다 강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자리잡고 있어요. 아키라가 사에와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토록 분노하고 절망했던 이유는 사에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하루요보다 키워준 어머니 시즈코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몇 십년의 세월을 자신의 죄를 비는 마음으로 인내하고 한 가정을 이끌어온 그녀. 그녀의 부재는 가슴 아프지만 그 부재가 오히려 가족들이 서로를 살피고 보듬으며 앞으로 한 발 내딛을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연작단편집이지만 작품이 가진 서사의 매력이 대단합니다. 작가의 냉철한 시각은 물론 마음을 울리는 감성이 공존하고 한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나오키상을 받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전달하려는 메시지, 모두 훌륭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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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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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끊임없는 작품발표로 독자들과의 만남을 주저하지 않는 히가시노 게이고-라고 생각합니다. 국내에만 출간된 작품이 벌써 몇십 권, 얼마 전에는 일본에서 또 다른 신작이 출간되었다고 하니 이 작가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감탄스러울 정도에요. 그 에너지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작가입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입맛에 맞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이 혼재하기 마련인데요, 개인적으로 제가 베스트로 꼽는 그의 작품은 [방황하는 칼날]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입니다. [방황하는 칼날]은 사회파 미스터리로서 얼마 전 국내에서도 배우 정재영과 이성민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었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소소한 일상 미스터리지만 굉장한 감동이 내포되어 있는 수작입니다. 책읽기를 멈추는 날 <내 인생의 책>으로 추켜세워도 부족함이 없을만한 작품을 벌써 두 편이나 남겨주었네요. 짝짝짝!!

 

[몽환화]는 아침 출근 시간에 벌어진 어떤 -묻지마 살인-으로 시작됩니다. 평화로운 일상,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와 아기의 행복한 시간을 피로 물들인 한 남자의 광기는,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 비극성이 더욱 극대화됩니다. 그 사건이 뒤에 벌어지는 일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짐작도 되지 않은 채 시간은 흐르고, 주인공 아키야마 리노는 사촌 나오토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후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그 곳에서 오랜만에 뵙게 된, 늘 인자한 미소로 자신을 응원해주던 할아버지. 수영선수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갑자기 찾아온 심인성 장애로 수영을 그만둔 뒤 방황하는 그녀의 마음을 다독이는 할아버지에게 의지하게 된 리노는 장례식 후 할아버지 댁을 방문하고, 꽃을 기르는 할아버지의 취미를 블로그를 만들어 관리하기 시작해요. 어느 날, 그 꽃이 피어납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노란 빛깔의 꽃이. 뒤이어 일어난 할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함께 사라진 노란색 꽃 화분. 혼란스러운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 그 꽃과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남깁니다.

 

이 작품은 노란색 나팔꽃을 등장시켜 에도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연을 이야기하는 역사소설이기도 하고, 주인공 아키야마 리노와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융합되지 못하는 느낌을 받고 자란 가모 소타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며, 나오토의 자살과 할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작품 안에 여럿의 장르가 혼재된다면 제법 산만할 법도 한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환상의 꽃이라 불리는 노란색 나팔꽃에 얽힌 사연들과 그 꽃의 출현을 경계하며 여러 각도에서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려는 사람들의 동선이 다음 페이지, 또 그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게 만들어요.

 

하나 아쉬운 점은 기대했던 것에 비해 결말이 약하다는 정도랄까요. -진상은 이랬어, 그리고 사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야-라고 밝혀지는 마지막은 조금 오래된 닌자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설픈 히어로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때문에 미스터리 장르라기보다는 사건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숙고해나가는 아키야마 리노와 가모 소타의 성장소설이라는 기분이 더 강하게 듭니다. 살인사건과 초반에 등장한 -묻지마 살인-은 그들의 성장을 돕기 위한 양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

하지만 <노란 나팔꽃> 자체가 지닌 메시지는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나팔꽃에 노란색은 없다고 해요. 하지만 에도시대에는 존재했다고 합니다. 존재했었던 노란 나팔꽃이 사라진 이유-그것에 대해 고찰하는 작가의 정신에 공감합니다. 없어졌다면 없어질만한 이유가 있다. 대단히 인공적인 생활을 영위해나가고 있는 우리 인생에 경종을 울릴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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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 신청합니다. 일본어 전공자입니다. 우리문화유산 답사기가 아니라 일본편부터 접해 살짝 부끄럽기도 하지만 강연과 함께 교수님의 일본을 보는 시각도 느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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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한명 신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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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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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봄부터 1986년 2월까지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연재한 짧은 글들을 모아 출간한 [더 스크랩]. 미국에서 발행되는 <에스콰이어>, <뉴요커>, <라이프>, <피플>등에 실린 기사를 읽고 그것을 토대로 쓴 원고가 바로 이 작품집입니다. 볕 좋은 공원 같은 곳에 앉아 술렁술렁 읽기 딱 좋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읽어도 좋을 가벼운 에세이. 그런데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에세이는 언제 쓰였느냐를 막론하고 꾸준히 출간되는 것 같아요. 그 매력이 무엇인지 따져본다면 역시 -아무 생각없이 읽기 좋다-는 점 아닐까요. 효효효. 1980년대의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저로서는 공감되지 않는 부분도 군데군데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1980년대에는 이런 일도 있었구나, 저런 일도 있었구나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기분으로 읽어나갔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도 했어요. 어쨌거나 대중들이 그를 잊지 않고 그가 소소하게 써놓았던 짧은 글들마저 찾아 읽고 있으니까요. 가볍게 쓴 원고들도 모아 책을 만들어주니, 작가로서는 굉장한 호강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총 80여 편의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 동안 그의 에세이에서 볼 수 있었던 영화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섹스와 성병에 관한 이야기, 문학작품에 관한 이야기들을 소소하게 엿볼 수 있어요. 그 중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몇 편 있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페인의 작고 행복한 마을의 벽화> 이야기입니다. 스페인의 칼토하르라는 마을의 벽에는 마을 사람들이 손으로 직접 그린 피카소 명화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고 해요. -해볼래?-, -그래, 하자-해서 너무나 간단하게 결정된 피카소 명화 그리기. 잡지에서 오린 것이나 그림엽서를 슬라이드 필름으로 만들어 투사기로 벽에 비추고 분필로 윤곽을 잡아 해가 있는 동안 색칠을 했다니,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다들 집중해서 하느라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사람이 없어 목사님이 화를 내고 있다는 이 엉뚱한 마을. 주말이 되면 타지 사람들이 그림을 보러 오는 통에 매일 -넉 대-나 차가 들어와 위험해 죽겠어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정겨움이 느껴지는 원고입니다.

웃음을 띠게 만드는 ET에 관계된 이야기. 영화 <ET>를 보고 어린이들이 보낸 편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개인 출장요금을 줄테니 친구 생일파티에 와달라는 아이, 초콜릿이 없어졌는데 네가 먹었냐는 아이, 매일 네 흉내를 내며 사는 바람에 친구들로부터 변태라고 불린다는 아이도 있었어요. 하지만 가장 감동적인 것은 자폐증 환자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로 아이가 ET를 본 후로 겨우 바깥세상과 소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 때문이든 타인 때문이든 절대 울지 않는 자폐증 환자인 아이가 영화를 보고난 후 울었다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어머니의 사연은 코끝을 찡하게 만들더라구요. 전 영화 <ET>를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영화든 문학작품이든 한 사람의 생애를 행복하게, 의미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들을 찬양합니다.

그 밖에 헤르페스 성병과 관련된 일화, 에게 해의 시로스라는 섬에서 일어난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의 개방(?)적인 모습과 관련된, -오오,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일화들이 수두룩빽빽. 그 와중에 카펜터스의 멤버가 어떻게 사망했는지도 알게 됐고-사망했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던 터라 약간 충격이었지만-디즈니랜드에 대한 단상이라든지 올림픽과는 전혀 상관없이 쓰인 올림픽 관련 기사들이 실려 있습니다. 어찌보면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쓸 데 없다고 느껴지는 글들이기도 합니다만,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독특한만큼 그 시각을 통해 다르게 보이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경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벌러덩 누워 휘리릭 읽기 좋은, 말 그대로 스크랩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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