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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1982년 봄부터 1986년 2월까지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 연재한 짧은 글들을 모아 출간한 [더 스크랩]. 미국에서 발행되는 <에스콰이어>, <뉴요커>, <라이프>, <피플>등에 실린 기사를 읽고 그것을 토대로 쓴 원고가 바로 이 작품집입니다. 볕 좋은 공원 같은 곳에 앉아 술렁술렁 읽기 딱 좋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읽어도 좋을 가벼운 에세이. 그런데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에세이는 언제 쓰였느냐를 막론하고 꾸준히 출간되는 것 같아요. 그 매력이 무엇인지 따져본다면 역시 -아무 생각없이 읽기 좋다-는 점 아닐까요. 효효효. 1980년대의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저로서는 공감되지 않는 부분도 군데군데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1980년대에는 이런 일도 있었구나, 저런 일도 있었구나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는 기분으로 읽어나갔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럽다는 생각도 했어요. 어쨌거나 대중들이 그를 잊지 않고 그가 소소하게 써놓았던 짧은 글들마저 찾아 읽고 있으니까요. 가볍게 쓴 원고들도 모아 책을 만들어주니, 작가로서는 굉장한 호강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총 80여 편의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 동안 그의 에세이에서 볼 수 있었던 영화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섹스와 성병에 관한 이야기, 문학작품에 관한 이야기들을 소소하게 엿볼 수 있어요. 그 중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몇 편 있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페인의 작고 행복한 마을의 벽화> 이야기입니다. 스페인의 칼토하르라는 마을의 벽에는 마을 사람들이 손으로 직접 그린 피카소 명화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고 해요. -해볼래?-, -그래, 하자-해서 너무나 간단하게 결정된 피카소 명화 그리기. 잡지에서 오린 것이나 그림엽서를 슬라이드 필름으로 만들어 투사기로 벽에 비추고 분필로 윤곽을 잡아 해가 있는 동안 색칠을 했다니,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다들 집중해서 하느라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사람이 없어 목사님이 화를 내고 있다는 이 엉뚱한 마을. 주말이 되면 타지 사람들이 그림을 보러 오는 통에 매일 -넉 대-나 차가 들어와 위험해 죽겠어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정겨움이 느껴지는 원고입니다.
웃음을 띠게 만드는 ET에 관계된 이야기. 영화 <ET>를 보고 어린이들이 보낸 편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개인 출장요금을 줄테니 친구 생일파티에 와달라는 아이, 초콜릿이 없어졌는데 네가 먹었냐는 아이, 매일 네 흉내를 내며 사는 바람에 친구들로부터 변태라고 불린다는 아이도 있었어요. 하지만 가장 감동적인 것은 자폐증 환자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로 아이가 ET를 본 후로 겨우 바깥세상과 소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 때문이든 타인 때문이든 절대 울지 않는 자폐증 환자인 아이가 영화를 보고난 후 울었다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어머니의 사연은 코끝을 찡하게 만들더라구요. 전 영화 <ET>를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영화든 문학작품이든 한 사람의 생애를 행복하게, 의미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들을 찬양합니다.
그 밖에 헤르페스 성병과 관련된 일화, 에게 해의 시로스라는 섬에서 일어난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의 개방(?)적인 모습과 관련된, -오오,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일화들이 수두룩빽빽. 그 와중에 카펜터스의 멤버가 어떻게 사망했는지도 알게 됐고-사망했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던 터라 약간 충격이었지만-디즈니랜드에 대한 단상이라든지 올림픽과는 전혀 상관없이 쓰인 올림픽 관련 기사들이 실려 있습니다. 어찌보면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쓸 데 없다고 느껴지는 글들이기도 합니다만,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독특한만큼 그 시각을 통해 다르게 보이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경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벌러덩 누워 휘리릭 읽기 좋은, 말 그대로 스크랩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