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난폭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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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마모루에 대한 분노가 터져나오고 모모코에게는 그냥 다 포기해버리라는, 그런 사람과 함께 살면 뭐하냐는 연민과 질책이 쏟아져나온다. 요시다 슈이치의 감성을 접했고, 빠져들었고, 매 작품을 읽으며 그의 섬세한 묘사에 놀랐었다. 내가 읽었던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이것이 사랑인가’에 집중됐었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난폭] 또한 소재는 별 다르지 않지만 진행방식이나 색깔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가 느껴졌다. 사랑을 다루는 작품이라기보다는 마치 한 편의 공포소설을 읽는 듯한, 사랑의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에 집중한, 읽고 났더니 몸과 마음이 굉장히 지쳐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남편 마모루와 결혼한 지 이제 8년. 둘 사이에 아이는 없다. 이렇게 저렇게 흘러가는 생활. 문화센터에서 비누 만들기 강좌를 진행하는 모모코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평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취미생활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녀는 이 비누 만들기 강좌를 확실히, 일로 자각하고 있다. 마모루에게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인지, 단순히 일이 바빠서인지 확신할 수 없다. 아침도 함께 하지 않고 침실에서 신문을 읽으며 홀로 보내는 마모루. 다만 그녀만이 홀로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커피를 마실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쓰기 시작한 일기 속 그녀의 생활은 어떤 폭풍도, 비도, 바람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다. 열 몇 살이나 어린 내연녀. 대수롭지 않게, 그저 정리하면 된다고 일상을 이어가는 모모코 앞에서 남편은 헤어져달라고 한다. 내연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정말 사랑한다면서. 이제 그녀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온갖 감정과 삶에 대한 욕망. 모모코가 서 있을 자리는, 그녀가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모모코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점과, 모모코의 일기와 내연녀의 일기로 진행되는 그 곳 세상이, 다른 의미로 무섭게 다가왔다. 나는 ‘밖’에 있는 사람이니까 간단하게, 마모루를 떠나라고, 그런 찌질하고 후줄근하고 책임감없고 여자들에게 상처받게 주지 않는 남자는 버리고 자신만의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모모코라면, 그 때까지 이어져오던 생활을 접을 수 있을까, 조금 참으면서 살아야지 생각할 수도 있을까, 모르는 사이에 ‘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정말이지 마모루를 때려주고 싶었다. 너무나 뻔뻔하게 이혼을 요구하고, 아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 말하는 그 입을. 다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해놓고 그 남자와 아이를 사랑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는 내연녀 또한. 결혼을 통해 사랑의 감정이 다른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서로에게 지켜야 할 ‘신뢰’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헤어지는 데에도 예의라는 것이 있다.

남편의 고백에 너무나 담담하게 대처하는 모모코의 행동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또 이런 반전이 숨어있을 줄이야. 그녀들의 일기를 다시 읽어봐도 어디서부터 방향이 틀어진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 일기의 혼란들만큼 모모코의 정체성도 이지러져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들려도 들리지 않는 척하고,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하는 경우가 분명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이 집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확인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결국 확인하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으나 결국에 그녀에게는 폭력이 되어버린 감정. 모모코가 필요로 했던 것은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아닌 자신이 한 노력을 인정해주는 단 한마디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고맙습니다......고맙다고 말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자, 이제 그녀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나저나 이 작가. 정말 어떻게 이렇게 여자의 입장에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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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홀리데이 (2014~2015년 최신판, 휴대용 맵북) - 내 생애 최고의 휴가 최고의 휴가를 위한 여행 파우치 홀리데이 시리즈 11
인페인터글로벌 지음 / 꿈의지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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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다녀온 곳의 여행책은 잘 보지 않는 편입니다. 에세이가 아닌 이상 여행책자를 파고드는 것은 어디를 어떻게 가면 좋을까, 뭘 먹을까를 궁리하기 위해서였거든요. 그래서 보통 단순한 안내위주의 책은 한 지역의 여행이 끝나고나서는 손이 잘 가지 않는데, 홋카이도만은 예외. 작년 여름 다녀온 홋카이도에 다녀온 기억은 이상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지워지지 않고 더욱 선명하게만 느껴져요. 여름같지 않게 서늘했던 공기, 고소하고 맛있었던 우유, 부드러운 생크림의 맛, 심지어 홋카이도에서는 편의점 빵마저 정말 맛있더라고요! 드넓게 펼쳐져있던 비에이와 후라노의 풀밭과 언덕들,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이었던 오타루, 언덕 위에서 바라보았던 하코다테의 바다와 오들오들 떨며 밤이 되길 기다렸다 마침내 바라본 야경까지. 1011일동안 홋카이도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저에게 정말 힐링이 되어주었답니다.

 

사실 제가 들여다보고 온 홋카이도는 절반정도에 지나지 않아요. 삿포로에서 하코다테로 내려간 후 다시 삿포로 쪽으로 올라가며 거친 노보리베츠, 비에이와 후라노, 오타루와 시작이자 종착이 되었던 삿포로는 홋카이도의 서남부 정도라고 할까요. 홋카이도의 자연을 더욱 깊이, 듬뿍 맛볼 수 있는 곳은 동쪽이라고 들었어요. 겨울에 유빙체험도 할 수 있고요. 못가 본 곳에 대한 동경과 겨울의 홋카이도를 보고싶다는 마음이 더해져 제 머릿속에는 온통 홋카이도에 대한 추억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홋카이도 관련 책을 욕심내고 있는 중입니다.

 

[홋카이도 홀리데이]는 작지만 들어있어야 하는 정보는 대부분 실려 있습니다. 저는 표지에서 느껴지는 세심함부터 마음에 들었어요. 여름의 홋카이도도 물론 좋았지만 홋카이도의 겨울을 대표하듯 눈꽃 모양이 새겨진 표지만으로도 마음이 설렜습니다. 아마 홋카이도를 아직 다녀오지 않은 분들과 이미 한 번 경험했던 제가 보는 이 책은 관점부터 다를 거에요. 저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어린아이같은 마음이었거든요. -, 여기에도 실렸네! 여기도 가봤지! 내가 찍은 사진과 비슷하구만!-이라는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한 번 여행갔었던 곳의 여행책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네요. 다만, 호화로워보이는 호텔보다는 소담한 펜션들 소개가 더 많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이참에 제가 비에이-후라노에서 묵었던 펜션 <쉐라팡>을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다정한 할아버지와 젊은 부부, 귀여운 아이들이 있는 펜션 쉐라팡은 친절하기도 친절하지만 음식 맛이 정말 일품이었어요! 할아버지께서 집에서 사용하는 차를 이용해 비에이-후라노 일대를 한 번 죽 훑어주시기도 해서 드넓은 풀빛을 원없이 볼 수 있었답니다.

 

저는 언젠가 꼭 다시 홋카이도에 갈 겁니다. 그 때가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다시 그 곳에 갈 때까지 이 추억들을, 그 곳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속에 찾아드는 이 느낌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어요. 여건이 되지 않아서 아직은 떠나실 수 없는 분들, 책으로나마 홋카이도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달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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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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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됐던 [도쿄기담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는 지금보다도 더 일본의 괴담이나 기담에 빠져있던 때라 이 책도 당연히! 그런 요괴나 오소소한 괴담이야기인 줄 알고 덥석 집어들었던 것이 오산. 하루키식 기담이야기에 약간 실망했던 나는 그저 페이지만 술렁술렁 넘기다 책장에 꽂아두었고, 어느 날 책나눔을 할 때 같이 실려보낸 기억이 있다. 내가 처음 책을 사들이기(?) 시작한 계기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였다.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랄까. 그 때 사들였던 책이 여전히 읽히지 않은 채 책장에 꽂혀있기도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책이 나에게 오는 적당한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손에 들어오는 때와 읽히는 때가 다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읽히는 때에는 -지금이 딱!-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도쿄기담집]도 그랬다. 예전에는 ‘이게 기담이야?!’하며 시들했던 이야기들이 지금 읽으니 또 새롭게 다가온다. 하긴 기담이라는 것은 기이한 이야기라는 의미이니 예전의 내가 ‘기담’의 범위를 한정지었던 탓도 있겠다.

총 5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단편집.

우연히 일어난 일로 의도치 않은 기쁨을 맛봤던 화자가 한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게이인 그는 피아노 조율사로서 매주 화요일마다 가나가와 현에 있는 쇼핑몰을 찾는다. 쇼핑몰 안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서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는 것이 습관인 그 앞에 한 여자가 등장. 우연히 같은 책을 읽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그 다음 주에도 차를 마시고 식사하며 대화를 나눈다. 교감을 나누며 게이인 그에게 매력을 느낀 그녀. 그 또한 그녀를 친근하게 느낀 이유가 있는데, 자신이 게이라는 걸 밝힌 탓에 관계가 소원해진 누나와 같은 위치에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 여자는 남자에게 함께 있어주길 원한다. 평소에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그와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는 여자. 그 여자를 만나고 난 후 그는 오랜만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고 놀라운 우연과 조우한다.-는 내용의 <우연여행자>. 서정적이면서도 일상에 숨겨진 미스터리함이 잘 조화를 이룬 재미있는 작품이다. 좋은 문구들도 꽤 있다.

플랑크는 게이였어요. 그리고 자신이 게이인 것을 사람들에게 숨기려 하지 않았죠. 당시로서는 그건 웬만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는 또 이런 식으로 얘기하기도 했죠. 내 음악은 내가 호모섹슈얼이라는 점을 빼놓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라고. 그가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나는 충분히 이해해요. 플랑크는 자신의 음악에 성실하기 위해 자신이 호모섹슈얼이라는 것에도 똑같이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예요. 음악이란 그런 것이고, 삶의 자세라는 것도 그런 거죠. -p17

나는 그때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는 건 어쩌면 매우 흔한 현상이 아닐까라고요. 즉 그런 류의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하지만 그 대부분은 우리 눈에 띄는 일도 없이 그대로 흘러가버리죠. 마치 한낮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희미하게 소리는 나지만 하늘을 올려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분명 우리 시야에 일종의 메시지로서 스르륵 떠오르는 거얘요. 그 도형을, 그 담겨진 뜻을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게. 그리고 우리는 그런 걸 목도하고는, 아아,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참 신기하네, 라고 화들짝 놀라죠. 사실은 전혀 신기한 일도 아닌데. -p41

서핑을 하다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매년 아들의 기일에 하나레이 해변을 찾는 여인의 이야기 <하나레이 해변>, 24층인 어머니 집에 갔다가 26층인 집으로 돌아오는 층계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남자를 찾는 탐정이 등장하는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직업이 작가인 주인공이 쓰는 소설 내용을 소재로 현실과 상상 사이에 걸쳐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다른 것은 모두 기억하면서도 자신의 이름만 잊어버리는 여자의 성장담 <시나가와 원숭이>에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호러라고 짐작했지만 아니었고, <시나가와 원숭이>에는 말하는 원숭이가 등장하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어느 하나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뭐랄까. 에세이에서 보여지는 하루키의 엉뚱한 발상과 유머들이 소설의 옷을 입고 펼쳐져있는 듯한 느낌?!

예전보다 하루키의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읽은 덕분인지 이번 [도쿄기담집]은 좀 더 깊은 이해 속에 함께 할 수 있었다. 더 기분이 좋은 것은 표지가 분홍색인 책이 왔다는 것. [도쿄기담집]은 연두색과 분홍색의 두 가지 버전 표지로 제작되었는데 분홍색 표지의 책이 온 것을 보니 처음 별명을 지었던 때가 떠오른다. 동시에 어떤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도. 그 때의 나에게 가장 따스하게 비춰졌던 분홍색. 어쩌면 이것도 우연이겠지만 그 우연 속에 숨겨진 신비한 삶의 일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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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도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3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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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시킨 적이 없던 작가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등장!!입니다. 어라, 근데 책을 받아보니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조금 얇아요. 페이지 수가 많다고 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해리 보슈 시리즈들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분량이라고 할까요. 마구 복잡한 사건은 아닌가보다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엄청난 위기감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어도 그 동안 보슈 시리즈에서 맛보았던 모든 것들의 압축판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동안의 해리 보슈 시리즈의 두께 때문에 쉽게 이 시리즈를 시작하지 못하고 계셨던 분들이라면 ‘입문서’ 정도로 가볍게 읽어보셔도 될 듯해요. 그렇게 발을 담그기 시작하면 저처럼 출간되는 족족 사들이는 팬이 되실 거에요. 훗.

이번 작품은 표지부터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보라색과 자주색이 어우러진 도시의 색감이 마음에 들었어요. 전혀 혼란스러워보이지 않는 도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고요함을 품고 있는 도시의 모습. [혼돈의 도시]에서는 [시인의 계곡]과 [에코 파크]에 등장했던 FBI 요원 레이철 월링도 재등장하면서 보슈와 은근한 로맨스 라인을 지속시키기도 한답니다. 사립탐정 일을 그만두고 특수살인사건 전담반으로 복귀한 보슈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처형당한 듯 뒤통수에 두 발의 총을 맞고 사망한 남자의 시체. 잠도 자지 않고 사건 전화를 기다리던 보슈는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고 레이철과 맞닥뜨리죠. 그녀가 FBI 요원으로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한 보슈는 노련한 기법으로 진실을 알아냅니다. 살해당한 남자는 방사능물질 접근권한을 가진 의학물리학자로 그가 병원 금고에서 세슘을 대량으로 운반한 것까지 알게 된 보슈. 최대한 빨리 세슘을 찾아내려는 레이철과 살인사건으로서 범인을 밝히려는 보슈의 입장이 충돌하면서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또 멋진 한 팀으로 수사를 시작해요.

엄청난 테러의 위험을 안고 시작된 수사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야말로 우리 주위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사건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해요. 저로서는 'Life is simple‘ 이라는 문구가 생각나는 그런 케이스였다고 할까요. 단순한 듯 단순하지 않은 단순한 사건이었지만 캐릭터, 스토리, 스릴러로서의 한 방까지 유감없이 갖춘 작품으로 기억될 듯합니다. 여기 <세인트 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의 평이 있네요.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작품은 코넬리의 표준을 보여준다. 코넬리의 팬들은 이 작품을 통해 어떻게 그가 가장 효과적으로 플롯, 인물의 성격 묘사, 그리고 고유의 색을 만들어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매력 넘치는 보슈(+이야기)입니다. 레이철과의 은근한 줄다리기는 이대로 끝을 맺지 말고 그냥 줄다리기로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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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네임 이즈 메모리
앤 브래셰어스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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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윤회라는 단어에는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예전부터 이어져오는 무엇이 있다는 것, 죽음 너머에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생명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이 한층 두터워지는 듯해요. 홀로 이 세상을 거듭 살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누군가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찌릿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한 갈망 때문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시간 속에서 순간을 붙잡으려는 허무한 몸짓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애달픈 존재들이니까요. 그 순간들 속에서 전생이라는 것, 다시 태어나 사랑한다는 것은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죠. 그런데 내가 지금 여기 말고 다른 어떤 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추억과 마음은 더 풍요로워질까요, 더 외로워지게 될까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알 수 없고 어쩐지 나만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수많은 시간 속에서조차 이루지 못했던 사랑에 대해 알게 된다면요.

 

대니얼의 처음 기억은 541년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비잔티움의 시민이었던 대니얼과 그의 형 조아킴은 비잔티움에 대항하는 베르베르족을 무찌르러 그들의 땅으로 향하죠. 그 곳에서 조아킴의 판단 부족으로 엉뚱한 마을을 습격하게 되고 대니얼은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소녀 소피아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억겁의 시간 속 사랑을 잃었고 또 좇게 된 남자 대니얼. 형의 판단 부족을 상부에 보고하고 그와 형은 비뚤어진 운명의 선을 타게 됩니다. 각각의 생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태어날 때마다 전생의 모든 기억을 떠올리게 된 대니얼은 소피아와의 만남을 염원하지만 얽히고 꼬여버린 운명의 실타래는 쉽사리 풀리지 않죠. 환생한 형의 아내로 직접적인 만남을 갖게 된 대니얼과 소피아이지만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조아킴의 존재는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을 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맞추지 못한 채 계속되는 그들의 만남. 1900년대 초반, 잉글랜드 해스턴배리 저택에서 죽어가는 병사와 간호사로 소피아를 다시 만난 대니얼은 그들의 전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고, 마침내 소피아의 마음을 얻지만 대니얼은 부상이 심해져 다시 죽음을 맞습니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는 꼭 그를 기억하겠다는 소피아의 약속을 품고 또 다시 환생한 대니얼의 눈앞에 드디어 소피아의 환생 루시가 나타납니다.

 

대니얼의 계속되는 환생은 축복이라기보다 고통에 가깝습니다. 환생 자체라기보다 자신이 살았던 시간에 관한 모든 기억이요. 애처로울 정도로 안타깝고 슬퍼요. 예전에 전생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보면서 나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무척 궁금한 적이 있었는데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에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생과 인연의 시작에만 얽매이면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없으니까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덕분에 대니얼의 삶 속에는 소피아 이외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허무할 뿐입니다. 심지어 부모님조차도요. 그런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소피아만 찾아 헤매고 그녀만 바라보다 이루어지지 않고 또다시 맞게 되었던 죽음들. 한 번의 삶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저로서는 대니얼의 그런 시간들이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에요.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제가 소피아같은 존재가 된다면 그런 그의 시간들을 알아챘을 때 무척 마음이 아팠을 겁니다.

 

이야기는 현재에서 자신의 전생을 알아가는 루시의 시점, 그녀를 사랑하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대니얼의 시점과 대니얼이 죽 살아온 전생의 이야기들이 교차되며 진행됩니다. 소피아와의 인연의 시작, 그녀를 사랑하게 된 시간, 그리고 운명의 훼방꾼 조아킴. 다음 생에서는 꼭 대니얼을 기억하겠다던 소피아의 맹세는 시간과 죽음을 뛰어넘어 루시의 기억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과연 그들의 사랑은 완성될 수 있을까요. 억겁의 시간 속을 살아낸 대니얼의 독백들이 잔잔한 감동과 설렘을 주는 붉은 실의 인연에 관한 아련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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