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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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됐던 [도쿄기담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는 지금보다도 더 일본의 괴담이나 기담에 빠져있던 때라 이 책도 당연히! 그런 요괴나 오소소한 괴담이야기인 줄 알고 덥석 집어들었던 것이 오산. 하루키식 기담이야기에 약간 실망했던 나는 그저 페이지만 술렁술렁 넘기다 책장에 꽂아두었고, 어느 날 책나눔을 할 때 같이 실려보낸 기억이 있다. 내가 처음 책을 사들이기(?) 시작한 계기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였다.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랄까. 그 때 사들였던 책이 여전히 읽히지 않은 채 책장에 꽂혀있기도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책이 나에게 오는 적당한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손에 들어오는 때와 읽히는 때가 다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읽히는 때에는 -지금이 딱!-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도쿄기담집]도 그랬다. 예전에는 ‘이게 기담이야?!’하며 시들했던 이야기들이 지금 읽으니 또 새롭게 다가온다. 하긴 기담이라는 것은 기이한 이야기라는 의미이니 예전의 내가 ‘기담’의 범위를 한정지었던 탓도 있겠다.

총 5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단편집.

우연히 일어난 일로 의도치 않은 기쁨을 맛봤던 화자가 한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게이인 그는 피아노 조율사로서 매주 화요일마다 가나가와 현에 있는 쇼핑몰을 찾는다. 쇼핑몰 안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서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는 것이 습관인 그 앞에 한 여자가 등장. 우연히 같은 책을 읽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그 다음 주에도 차를 마시고 식사하며 대화를 나눈다. 교감을 나누며 게이인 그에게 매력을 느낀 그녀. 그 또한 그녀를 친근하게 느낀 이유가 있는데, 자신이 게이라는 걸 밝힌 탓에 관계가 소원해진 누나와 같은 위치에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 여자는 남자에게 함께 있어주길 원한다. 평소에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그와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는 여자. 그 여자를 만나고 난 후 그는 오랜만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고 놀라운 우연과 조우한다.-는 내용의 <우연여행자>. 서정적이면서도 일상에 숨겨진 미스터리함이 잘 조화를 이룬 재미있는 작품이다. 좋은 문구들도 꽤 있다.

플랑크는 게이였어요. 그리고 자신이 게이인 것을 사람들에게 숨기려 하지 않았죠. 당시로서는 그건 웬만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는 또 이런 식으로 얘기하기도 했죠. 내 음악은 내가 호모섹슈얼이라는 점을 빼놓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라고. 그가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나는 충분히 이해해요. 플랑크는 자신의 음악에 성실하기 위해 자신이 호모섹슈얼이라는 것에도 똑같이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예요. 음악이란 그런 것이고, 삶의 자세라는 것도 그런 거죠. -p17

나는 그때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는 건 어쩌면 매우 흔한 현상이 아닐까라고요. 즉 그런 류의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하지만 그 대부분은 우리 눈에 띄는 일도 없이 그대로 흘러가버리죠. 마치 한낮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희미하게 소리는 나지만 하늘을 올려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분명 우리 시야에 일종의 메시지로서 스르륵 떠오르는 거얘요. 그 도형을, 그 담겨진 뜻을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게. 그리고 우리는 그런 걸 목도하고는, 아아,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참 신기하네, 라고 화들짝 놀라죠. 사실은 전혀 신기한 일도 아닌데. -p41

서핑을 하다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며 매년 아들의 기일에 하나레이 해변을 찾는 여인의 이야기 <하나레이 해변>, 24층인 어머니 집에 갔다가 26층인 집으로 돌아오는 층계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남자를 찾는 탐정이 등장하는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직업이 작가인 주인공이 쓰는 소설 내용을 소재로 현실과 상상 사이에 걸쳐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다른 것은 모두 기억하면서도 자신의 이름만 잊어버리는 여자의 성장담 <시나가와 원숭이>에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호러라고 짐작했지만 아니었고, <시나가와 원숭이>에는 말하는 원숭이가 등장하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어느 하나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뭐랄까. 에세이에서 보여지는 하루키의 엉뚱한 발상과 유머들이 소설의 옷을 입고 펼쳐져있는 듯한 느낌?!

예전보다 하루키의 다양한 작품을 접하고 읽은 덕분인지 이번 [도쿄기담집]은 좀 더 깊은 이해 속에 함께 할 수 있었다. 더 기분이 좋은 것은 표지가 분홍색인 책이 왔다는 것. [도쿄기담집]은 연두색과 분홍색의 두 가지 버전 표지로 제작되었는데 분홍색 표지의 책이 온 것을 보니 처음 별명을 지었던 때가 떠오른다. 동시에 어떤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도. 그 때의 나에게 가장 따스하게 비춰졌던 분홍색. 어쩌면 이것도 우연이겠지만 그 우연 속에 숨겨진 신비한 삶의 일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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