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이 네임 이즈 메모리
앤 브래셰어스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전생, 윤회라는 단어에는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예전부터 이어져오는 무엇이 있다는 것, 죽음 너머에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생명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이 한층 두터워지는 듯해요. 홀로 이 세상을 거듭 살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누군가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찌릿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한 갈망 때문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시간 속에서 순간을 붙잡으려는 허무한 몸짓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애달픈 존재들이니까요. 그 순간들 속에서 전생이라는 것, 다시 태어나 사랑한다는 것은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겠죠. 그런데 내가 지금 여기 말고 다른 어떤 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추억과 마음은 더 풍요로워질까요, 더 외로워지게 될까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알 수 없고 어쩐지 나만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 수많은 시간 속에서조차 이루지 못했던 사랑에 대해 알게 된다면요.
대니얼의 처음 기억은 541년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비잔티움의 시민이었던 대니얼과 그의 형 조아킴은 비잔티움에 대항하는 베르베르족을 무찌르러 그들의 땅으로 향하죠. 그 곳에서 조아킴의 판단 부족으로 엉뚱한 마을을 습격하게 되고 대니얼은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소녀 소피아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억겁의 시간 속 사랑을 잃었고 또 좇게 된 남자 대니얼. 형의 판단 부족을 상부에 보고하고 그와 형은 비뚤어진 운명의 선을 타게 됩니다. 각각의 생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태어날 때마다 전생의 모든 기억을 떠올리게 된 대니얼은 소피아와의 만남을 염원하지만 얽히고 꼬여버린 운명의 실타래는 쉽사리 풀리지 않죠. 환생한 형의 아내로 직접적인 만남을 갖게 된 대니얼과 소피아이지만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조아킴의 존재는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을 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맞추지 못한 채 계속되는 그들의 만남. 1900년대 초반, 잉글랜드 해스턴배리 저택에서 죽어가는 병사와 간호사로 소피아를 다시 만난 대니얼은 그들의 전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고, 마침내 소피아의 마음을 얻지만 대니얼은 부상이 심해져 다시 죽음을 맞습니다. 그리고 다음 생에서는 꼭 그를 기억하겠다는 소피아의 약속을 품고 또 다시 환생한 대니얼의 눈앞에 드디어 소피아의 환생 루시가 나타납니다.
대니얼의 계속되는 환생은 축복이라기보다 고통에 가깝습니다. 환생 자체라기보다 자신이 살았던 시간에 관한 모든 기억이요. 애처로울 정도로 안타깝고 슬퍼요. 예전에 전생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보면서 나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무척 궁금한 적이 있었는데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에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생과 인연의 시작에만 얽매이면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없으니까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덕분에 대니얼의 삶 속에는 소피아 이외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허무할 뿐입니다. 심지어 부모님조차도요. 그런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소피아만 찾아 헤매고 그녀만 바라보다 이루어지지 않고 또다시 맞게 되었던 죽음들. 한 번의 삶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저로서는 대니얼의 그런 시간들이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에요.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제가 소피아같은 존재가 된다면 그런 그의 시간들을 알아챘을 때 무척 마음이 아팠을 겁니다.
이야기는 현재에서 자신의 전생을 알아가는 루시의 시점, 그녀를 사랑하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대니얼의 시점과 대니얼이 죽 살아온 전생의 이야기들이 교차되며 진행됩니다. 소피아와의 인연의 시작, 그녀를 사랑하게 된 시간, 그리고 운명의 훼방꾼 조아킴. 다음 생에서는 꼭 대니얼을 기억하겠다던 소피아의 맹세는 시간과 죽음을 뛰어넘어 루시의 기억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과연 그들의 사랑은 완성될 수 있을까요. 억겁의 시간 속을 살아낸 대니얼의 독백들이 잔잔한 감동과 설렘을 주는 붉은 실의 인연에 관한 아련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