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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평점 :
한 커플이 모텔에 들어가고 잠시 후, 여자가 달려내려옵니다. 남자친구가 젤리를 먹다 목에 걸렸다며 도움을 요청, 남자는 병원으로 실려가지만 결국 보름 후 숨을 거두고 말아요. 평범한 커플의 안타까운 사고 정도로 잊혀질 수 있었던 일이, 여자가 남자친구의 이름으로 보험에 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여자가 수령한 돈은 무려 5억원. 유가족은 피해자인 남자와 여자의 사이가 평소 좋지 않았고,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했으며, 특히 남자는 치아가 좋지 않아 단 음식을 멀리했다며 그가 살해당했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가족을 끔찍히 사랑했던 그가 가족이 아닌 여자친구를 보험수령인으로 할 리가 없다면서요. 반면 여자는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든간에 자신은 남자친구를 사랑했으며, 그에게 가족력이 있어 건강이 걱정되는 마음에 보험을 들어놓았던 것이라고 고집하죠. 누가 봐도 여자의 범행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가운데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고, 판사들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고심하게 됩니다.
제가 접하는 도진기 작가의 첫 작품입니다.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되었고, 2010년 단편소설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고 해요. 주중에는 판사로, 주말에는 작품을 집필하던 그는 [붉은 집 살인사건],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정신자살], [악마의 증명] 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2017년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를 마지막으로 공직을 떠나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는, 엄청난 이력을 자랑하는 작가님입니다. 읽어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국내 추리소설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 저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그의 작품을 이제서야 만나게 되었네요. 다른 작품들의 성향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합리적 의심]은 도진기 작가의 첫 본격 법정물이라고 하니 기대가 컸습니다. 법정에서의 날선 공방, 그 팽팽한 긴장감과 상대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한 설전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 지 궁금했는데요, 공기가 부풀어 터질 것 같은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변호사나 검사가 아닌 판사의 눈으로 바라본 사건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짐작해봅니다.
판사인 '나'는 그녀, 김유선의 유죄를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로 분노마저 느끼고 있죠. 배석판사들과 그녀의 유죄를 확실히 하기 위해 회의를 열지만 그들은 '합리적 의심'이라는 명제를 들며 그녀의 유죄를 반대합니다. 특히 이제 2년 차인 민지욱은 부장판사인 나의 의견에 조금도 지지 않은 채 한 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이기까지 합니다. 결국 그들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나는, 법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마는데요, 그 판결에 피고인인 김유선은 '수고하셨습니다!'를 크게 외치며 밝은 얼굴로 퇴정해요. 그 후 벌어진 또 한 건의 살인사건. 나와 김유선과 죽은 남자의 가족이 묘하게 얽히며 사건은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것은 변호사나 검사입니다. 그들이 자아내는 어떤 긴장감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응원하는 편이 이기기라도 하면 '해냈다!'와 같은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하기 때문일 거에요. 그에 반해 판사들의 세계를 그린 작품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적었는데요, 작년 종영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는 정말 재미있게 봐서인지 판사들의 세계가 무척 궁금했어요. [합리적 의심]은 드라마틱한 모습들보다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판사들이 보내는 일상,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건, 판결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조금 답답하다고 느껴질정도의 일상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그들 각자의 마음 속에도 타인에게 쉽게 내보일 수 없는 격랑의 물결이 존재했던 거겠죠. '인간'이기보다는 '판사'이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선택, 그 선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누군가의 또 다른 선택은 과연 옳았던 것인가, 복잡한 마음이었어요. 특히 작가 자신이 판사로 재직했었기 때문에 작품이 더 현실감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적인 감정이 결여된 사람이 많다는 것, 억울한 죽음이 몇 번이나 발생한다는 것이 새삼 무척 가슴 아팠습니다.그런 그들을 사건의 한가운데서 바라보아야 하고,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일이 보통이 아니구나 실감했어요. 다음 법정물은 어떤 모습으로 발표될 지, 한 번 더 판사들의 세계를 보여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다만, 작품 속 '나'가 죽은 아내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젊은 직원을 바라보는 개인적인 시선들은 조금 불편했습니다. 꼭 필요한 장면이었나 싶을 정도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