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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 - 초록 지붕 집부터 오건디 드레스까지, 내 마음속 앤을 담은 그림 에세이
다카야나기 사치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평점 :
표지가 달라질 때마다, 출판사를 바꿔 출간될 때마다 구입하는 책 중 하나가 바로 [빨간 머리 앤]입니다. 생각해보면 특별한 이유없이 이 독특한 소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톡톡 튀는 발랄한 언행에, 억울하고 화나는 일을 당해도 뒤끝없이 사과를 주고받거나, 누구보다 상냥한 마음으로 자신을 거둬준 매슈와 마릴라 아주머니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앤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우울해할만한 상황들이 벌어질 때도-자신이 아닌 남자아이를 원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나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린드 부인에게 대든 후 혼이 났을 때 같은-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재빨리 잊거나 해결하고 앞을 향해 달려나간다는 느낌이에요. 이런 저와 함께 빨간 머리 주근깨 아가씨에게 흠뻑 빠진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다카야나기 사치코 작가입니다.
삽화가이자 수필가, 아동문학 작가인 다카야나기 사치코는 일본에서 출간된 '빨간 머리 앤' 시리즈는 물론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여러 소설의 삽화를 그렸으며 빨간 머리 앤이 사는 '초록 지붕 집'을 닮은 초록색 지붕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빨간 머리 앤을 향한 고백을 공개한 이 [빨간 머리 앤]에는 앤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어요. 전 세계의 소녀들이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며 상상해왔던 소설 속 소품들, 자연배경, 인물들이 그녀만의 그림체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입니다. 에이번리 지도 뿐만 아니라 앤이 사는 초록 지붕 집, 앤이 처음 매슈 앞에 등장했을 때의 모습이나 앤이 지내게 되는 동쪽 방의 모습, 마릴라가 앤을 위해 지어준 세 벌의 드레스 등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요. 놀라운 점은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사과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종류별로 소개하며 각각의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물론 세심함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의 결과물을 살펴보면 작가의 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빨간 머리 앤 하면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또 있죠. 저의 경우에는 앤의 절친 다이애나와 후에 앤의 남편이 되는 길버트입니다. 앤이 실수로 다이애나에게 과일주를 먹인 경우를 제외하고 두 사람은 사이가 벌어진 적이 없는데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두 사람의 관계를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서로의 마음을 깊게 허락하는 데는 용기와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소녀 시절의 로맨스 또한 빠트릴 수 없는데, 처음에는 앤을 '홍당무'라 놀리던 길버트가 나중에는 앤에게 다가와 친구가 되자며 손을 내미는 대목에서는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던지요. 히히. 말하자면 [빨간 머리 앤]은 저의 소녀시절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작품인 겁니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책 뒷편에 등장하는, 작가가 모아놓은 <앤의 말들>도 인상깊었는데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앤의 목소리가 마치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기, 마릴라 아주머니,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일이 바로 기뻐하는 일의 절반이에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잖아요.
이 책을 읽다보니 [빨간 머리 앤]을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한 때 열 권 짜리 전집을 구매한 적도 있었는데, 결혼하면서 자취를 감춰버린 그 전집을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쓰라리네요. 하지만 꿈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앤이 지금도 어딘가의 누구에게 친한 친구가 되어있으리라 생각하니 웃음이 납니다. [빨간 머리 앤]의 작가인 몽고메리는 자서전 [험난한 길]에서 '요정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요. 부디 이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 가 당신에게 그런 여권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하여 잊고 있었던 시절의 당신만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