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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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열두 살이었던 1952년 6월 15일 일요일 오후, 어머니와의 다툼에서 격분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낫으로 죽이려고 한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작품은, 시작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외동딸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작가는 이 날을 기점으로 그녀의 삶이 양분되었고 그 충격은 그녀의 삶에 깊이 각인되었다고 기술한다. 떠오르는 건 울음소리와 비명 뿐. 그녀는 아버지에게 '아빠가 내 불행을 벌어놓은 거야'(공포스러운 일을 겪은 후 영원히 미치거나 불행해진다는 뜻의 노르망디 사투리)라는 말을 했다는 것과, 그 일이 있은 후 세 식구가 자전거를 타고 근처에 산책을 나갔다는 것을 기억한다. 돌아온 후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식당 문을 열었고 그 일은 다시 입에 오르지 않았지만, 그 사건은 작가의 소녀시절을 단번에 파탄내버리는 중대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부모가 가벼운 말다툼만 해도 아이들은 두려워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하는 모습을 목도한 자식이라니, 그 충격은 가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작가의 앞에서 가벼운 애정표현을 하거나 농담을 건네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는 것이다. 어른들만의 대화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 과정을 보지 못한 작가에게는 그 또한 충격이었다(그리하여 요즘 아동심리학 책에는 부모가 다툰 후 화해의 과정까지 아이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지만 그 한 번으로 그녀의 내면이 변화하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알아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 가슴 깊이 알고는 있었으나 차마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 가족이 속한 세계와 그 바깥 세계, 서민 계층과 부르주아 계층으로 양분된 두 세계의 가치관이 충돌하면서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을 그녀는 '부끄러움'이라 명명한다.

자신의 가족에게 있었던 일을 묘사하고 '부끄러움'에 대해 알게 되어버렸다-고 서술한 뒤에는 작가가 '우리'라고 지칭하는 서민 계층의 세계관, 생활공간, 행동규칙, 언어습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가늠하기 어렵지 않게, '우리'와 대조되는 사립학교의 행동규칙과 생활양식의 자세한 묘사가 뒤를 잇는다. 후반부는 그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작가의 입장을 토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물질적 궁핍만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생활양식과 언어가 몸에 배지 않았다는 것에서 비롯된 열등감으로 가득찬 수치심에 시달렸다. 이 부끄러움은 한 순간 느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안에서 그와 함께 살아가고 생명력을 띠는 하나의 '존재'로 간주된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 살아있는 부끄러움을 겉으로 드러냄으로써 스스로를 하나의 기록체, 인류학적 자료의 일종으로만 취급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부끄러움'은 항상 그녀와 함게 살아간다. 그것 없이는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도 없을만큼 이미 그것은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그 과거를, 수치심으로 각인된 그 날의 사건을, 그러나 그녀는 담담히 응시한다. 이미 사립학교의 시선으로 자신의 부모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과거의 자신 또한. 부끄러웠지만 부끄러움을 공개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저 고요하고 조용하게 응시할 뿐이다. 그래야 자신의 글쓰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표지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 그 여인이 바로 작가임에 다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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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죽 그림책이 참 좋아 57
최숙희 지음 / 책읽는곰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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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세계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최숙희 작가님의 이름은 아마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도 아이와 함께 읽을 그림책을 단행본으로 구입하기 위해 알아보던 중 알게 되었는데요, 어쩐 일인지 집에 한 권도 없어요. 시중에 나와 있는 작가님의 그림책을 다 사고 싶은데 한꺼번에 사기에는 개인적으로 인증이 안 되었고, 그렇다고 안 사자니 뭔가 허전하고. 이렇게 망설이는 중에 결국 한 권도 못사는 결정장애 엄마가 되어버린 것이죠. 그러던 중 좋은 기회가 생겨 최신작인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죽]을 읽게 되었습니다. 내용이 참 좋네요. 정말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아요!

 

주인공은 사람아이 두르와 생쥐 쪼르예요. 두르는 쪼르와 산딸기로 큰 솥 가득 잼을 만들어 다 같이 나눠먹고, 돼지 아줌마가 열두 쌍둥이를 낳자 아끼던 외투를 풀어 목도리를 짜기도 하고, 쪼르의 연이 나무에 걸리자 더 크고 멋진 연을 만들어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기도 해요. 연을 타고 날아간 강 건너에는 검은 숲이 있는데요, 그 숲에는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운이 없는 산양 할머니가 있었답니다. 두르느와 쪼르는 함께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죽을 끓이기로 하죠. 준비된 큰 솥에 처음 개미들이 쌀 한 줌을 가져오고, 두더지가 양파를 가져오고, 토끼가 당근을 가져오고, 고슴도치가 감자를 이고 오기도 합니다. 고라니의 시금치에 어떤 동물의 브로콜리에, 또 어떤 동물의 가지 등등 재료가 점점 많아져요! 두르가 끓인 죽은 정말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게 됩니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죽이라 해서 혹시 성경에 나온 기적을 생각하신 분 계신가욥! 전 살짝 떠올렸습니다. 히히. 하지만 이 그림책에서 함께 죽을 만들어 먹는 이야기는 가히 기적에 비유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서로의 것을 나누며 더욱 많아지는 죽, 그리고 풍성해지는 마음. 동물들이 각자가 가지고 있던 것을 자기 것이라 꼭 움켜쥐고 있었다면 이렇게 맛있는 죽을 많이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의 재료가 한 솥이 되는 기적, 바로 나누는 마음이 만들어 낸 거에요.

 

이 책은 나눔의 가치를 전하고 싶다는 굿네이버스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제안을 받고 작가님은 아이들의 착한 마음을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에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죽]이 탄생하게 된 것이죠. 이 책은 굿네이버스에서 실시하는 '어린이 나눔교육'에 널리 활용되며, 작가의 인세 일부는 굿네이버스를 통해 세계의 빈곤 아동을 돕는 데 쓰여질 예정이라고 해요. lg 유플러스도 동영상을 제작해 그 뜻을 함께 한답니다. 그림책을 좋아하시는 여러분, 멋진 그림책을 얻는 것과 함께 구입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나눔을 할 수 있다니, 멋쟁이 우리가 발 벗고 나설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책과 함께 요렇게 귀여운 '사랑나눔 저금통'도 함께 왔어요. 아이와 그림책을 읽은 뒤 나눔에 대해 이야기도 해보고, 요렇게 저금통도 채우며 함께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그 살아가는 세상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면 어떨까요. 저도 가까이로는 동생과 장난감을 나눈다는 것부터 살짝 멀리는 친구들과 가진 것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그 동안 그림책을 통해 많은 감동과 깨달음을 얻었지만, 이번만큼은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어 더욱 뜻깊은 책읽기였던 것 같아요. 5불어 최숙희 작가님의 책에 대한 신뢰도도 증가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분이라면 분명 다른 작품들도 따스할 것이라 생각돼요. 그림책으로 나눔을 배우고 실천하는 모습을, 어른인 우리가 먼저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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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 - 초록 지붕 집부터 오건디 드레스까지, 내 마음속 앤을 담은 그림 에세이
다카야나기 사치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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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달라질 때마다, 출판사를 바꿔 출간될 때마다 구입하는 책 중 하나가 바로 [빨간 머리 앤]입니다. 생각해보면 특별한 이유없이 이 독특한 소녀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톡톡 튀는 발랄한 언행에, 억울하고 화나는 일을 당해도 뒤끝없이 사과를 주고받거나, 누구보다 상냥한 마음으로 자신을 거둬준 매슈와 마릴라 아주머니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앤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우울해할만한 상황들이 벌어질 때도-자신이 아닌 남자아이를 원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나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린드 부인에게 대든 후 혼이 났을 때 같은-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재빨리 잊거나 해결하고 앞을 향해 달려나간다는 느낌이에요. 이런 저와 함께 빨간 머리 주근깨 아가씨에게 흠뻑 빠진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다카야나기 사치코 작가입니다.

 

삽화가이자 수필가, 아동문학 작가인 다카야나기 사치코는 일본에서 출간된 '빨간 머리 앤' 시리즈는 물론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여러 소설의 삽화를 그렸으며 빨간 머리 앤이 사는 '초록 지붕 집'을 닮은 초록색 지붕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빨간 머리 앤을 향한 고백을 공개한 이 [빨간 머리 앤]에는 앤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 있어요. 전 세계의 소녀들이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며 상상해왔던 소설 속 소품들, 자연배경, 인물들이 그녀만의 그림체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입니다. 에이번리 지도 뿐만 아니라 앤이 사는 초록 지붕 집, 앤이 처음 매슈 앞에 등장했을 때의 모습이나 앤이 지내게 되는 동쪽 방의 모습, 마릴라가 앤을 위해 지어준 세 벌의 드레스 등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요. 놀라운 점은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사과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종류별로 소개하며 각각의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물론 세심함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의 결과물을 살펴보면 작가의 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빨간 머리 앤 하면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또 있죠. 저의 경우에는 앤의 절친 다이애나와 후에 앤의 남편이 되는 길버트입니다. 앤이 실수로 다이애나에게 과일주를 먹인 경우를 제외하고 두 사람은 사이가 벌어진 적이 없는데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두 사람의 관계를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서로의 마음을 깊게 허락하는 데는 용기와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소녀 시절의 로맨스 또한 빠트릴 수 없는데, 처음에는 앤을 '홍당무'라 놀리던 길버트가 나중에는 앤에게 다가와 친구가 되자며 손을 내미는 대목에서는 어찌나 가슴이 두근거리던지요. 히히. 말하자면 [빨간 머리 앤]은 저의 소녀시절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작품인 겁니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책 뒷편에 등장하는, 작가가 모아놓은 <앤의 말들>도 인상깊었는데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앤의 목소리가 마치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저기, 마릴라 아주머니,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일이 바로 기뻐하는 일의 절반이에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상상은 할 수 있잖아요.

 

이 책을 읽다보니 [빨간 머리 앤]을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한 때 열 권 짜리 전집을 구매한 적도 있었는데, 결혼하면서 자취를 감춰버린 그 전집을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쓰라리네요. 하지만 꿈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앤이 지금도 어딘가의 누구에게 친한 친구가 되어있으리라 생각하니 웃음이 납니다. [빨간 머리 앤]의 작가인 몽고메리는 자서전 [험난한 길]에서 '요정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요. 부디 이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 가 당신에게 그런 여권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하여 잊고 있었던 시절의 당신만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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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 중국을 만든 음식, 중국을 바꾼 음식
윤덕노 지음 / 더난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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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론서를 이용해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간식처럼 색다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음식이라는 테마 하나로 역사를 전부 알 수는 없겠지만, 음식은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을 때,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같이 무언가를 먹는다. 하다못해 차 한 잔이라도 나눈다. 저자 또한 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음식인만큼 음식의 역사는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주는 생활사의 중심이 된다고 보았다. 중국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왔을까. 입에 담는 음식을 통해 어떤 역사를 이루어왔을지, 음식에 담긴 그들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기회다.

 

처음 등장하는 화제부터 흥미진진하다. 고대 중국에서는 요리사가 재상이었다니, 요리사의 업무와 재상의 업무가 명백히 구분되는 현재와 비교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질만한 이야기다. [도덕경]에는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요리하는 것과 같다' 라는 말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이는 생선을 요리할 때 자주 뒤집으면 살이 부서지듯이 나라를 다스릴 때 번거롭게 굴면 백성이 흩어지니, 생선요리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 때문인지 고대 중국의 재상 중에는 요리사 출신이 많았는데 한자의 어원 자체가 요리사라는 뜻이란다. 재상이라는 단어는 천관총재라는 벼슬에서 비롯되었는데 천관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일, 총재는 제사 지낼 때 쓰는 음식을 장만하는 역할을 맡았다. 씨족사회였던 고대국가에서는 나랏일 중에서 조상님께 제사지내는 일을 가장 큰 일로 여겼고, 내치와 외교를 담당하는 것이 바로 음식이었던 것이다.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요리사를 맡겼던 것이 국가의 틀을 갖추면서 재상이 된다.

 

복날과 보신탕의 개념은 우리나라의 전통인 줄로 알았는데 이들의 유래는 [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 사마천은 복날 관련 기록을 두 곳에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진나라의 역사를 서술한 [진본기], '덕공 2, 처음 복날을 정해 개로 벌레의 피해를 막았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12제후국의 주요사건을 연도별로 정리한 [십이제후연표]에도 복날의 기록이 나와있다. 그 시작은 진나라였는데 뿌리는 서쪽 오랑캐라고 알려진 서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 백성을 구성하고 있는 서융 부족 중 견융은 개가 조상인 부족으로, 복날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제사를 지낼 때도 이왕이면 조상님과 관련된 가축이 좋다고 생각하여 개를 잡아 성문에 걸어 나쁜 기운을 막았다는 [사기]의 기록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 외에도 복날의 개고기를 통한 춘추 시대 전후의 육식문화와 사회구조에 대한 이야기, 출산 장려책으로 사용된 개고기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전 먹고 살 것이 없어 인간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개를 잡아 먹었던 풍습이 요즘의 복날과 보신탕으로 변화한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새로운 발견이었다.

 

한겨울 뱃속을 따뜻하게 해주는 호떡에 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양귀비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 중 하나가 호떡이었다고 하는데 1300여년 전 호떡의 위상은 지금과는 크게 달랐다. 서민들의 군것질거리같은 값싼 음식이 아니라 아주 고급 음식이었던 것이다. 호떡의 뿌리는 서역의 중앙 아시아로 [세종실록]에도 중국에서 호떡을 말할 때 쓰는 표현 중 하나인 '소병'이란 말이 보이며 우리나라에서 상류층의 별미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호인(胡人)들이 먹는 떡이라는 뜻의 호떡. 여기서 ''는 오랑캐가 아니라 서역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고대의 밀가루 빵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을 거쳐 전해진 것이 지금의 호떡이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밀가루와 함께 전해진 서역의 조리법, 두부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다양한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중국을 만든 음식>, <역사를 바꾼 음식>, <오해와 진실을 밝히는 음식>으로 나누어져 소개되어 있다. 단순한 음식 문화가 아니라 하나의 음식을 통해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점이 매력이다. 복날과 개고기, 고구마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음식에 대한 반전도 재미있었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람이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왔던 시간들이 모여 역사가 되어 지금 우리에게 전해졌다. 음식을 통해 하나의 문화가 생성되기도, 없어지기도 한다. 개론서만으로는 맛볼 수 없는 생생한 삶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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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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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곰돌군이 우와악 소리를 내며 일어나는 바람에 첫째 곰돌군이 덩달아 잠에서 깼다. 평소라면 조금 뒹굴하고 일어났을 첫째 곰돌군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일어나자~맘마 먹고 어린이집 가자' 몇 번을 이야기해도 일어나지 않더니 결국 9시가 다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등원 시간이야 조금 늦어도 상관없으니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맘마 먹자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놀이방으로 들어간다. '안먹어, 어린이집 안가' 를 몇 번 반복하더니 어린이집은 가지 않아도 되지만 맘마를 먹지 않으면 간식을 주지 않겠다는 말에 식탁의자에 앉았다. 첫째 곰돌군에게 아침을 챙겨주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가 식탁 밑으로 물을 흠뻑 흘렸다. 돌아와보니 둘째 곰돌군이 그 물 웅덩이에서 좋다고 물장구를 치고 있다. 나의 신경선이 어디서 끊긴 것일까. 마음으로는 '참자, 있을 수 있는 일이야'를 되뇌어보지만, 결국 좋지 않은 소리가 입을 뚫고 나가버린다. 한 번 시작한 꾸중이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결국 시무룩해져 겨우겨우 밥을 우겨넣은 첫째 곰돌군을 보자니 또 마음이 철렁한다. 한 번만 더 참을걸.

낮버밤반이라고 했던가. 낮에는 버럭하고 밤에는 반성하는 것. 요즘 내 모습이 딱 이러하다. 첫째 곰돌군이 미운 네 살에 접어들어서인가, 아니면 내가 육아에 지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첫째 곰돌군이 네 살에 접어든 것을 핑계삼아 나의 사나운 마음을 아이에게 쏟아내는 것인가. 사실 첫째 곰돌군은 미운 네 살 시기라고는 해도 미운 짓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그저 아이들이라면 할 수 있는 실수, 동생을 본 형아의 사랑받고자 하는 약간의 질투어린 행동, 그것이 전부라고 할만큼 순한 아이다. 그러니 결론은, 내가 이 아이에게 아주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어느 밤,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또 한 번 반성하던 밤, 내가 이 아이의 엄마라는 것을 첫째 곰돌군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하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아이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부모도 선택할 수 없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나는, 못난 엄마 만나 고생한다는 생각에 유독 아이가 안쓰러웠더랬다. 감정적으로 이토록 불안정하고 예민해져있는 나를, 이 아이는 후에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내가 딱 이맘 때였을 무렵, 네가 동생을 잘 돌보지 못해 동생이 다쳤다고 나를 노려보던 엄마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처럼, 이 아이도 자신을 혼내던 나의 목소리, 나의 눈빛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서늘해졌다.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사회라면, 우리 아이들은 나를 엄마로 선택해주었을까.

세상의 모든 부모는 불안정하고 불안한 존재들 아니에요?

그들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잖아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 같아요.

많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자기 약점을 감추고

치부를 드러내지 않죠.

그런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무너져요

p111-112

이희영 작가의 [페인트]는 아이 낳기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자 국가가 책임지고 아이를 키우는 세계를 선보인다. 단순히 양육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낳은 아이를 키우기 원치 않을 때 정부에서 그 아이를 데려와 키우는 방식이다. 그렇게 NC 센터가 세워졌고, 그 아이들은 국가의 아이들(nation's children)이라고 불린다. 갓 태어난 아기들과 미취학 아동을 관리하는 퍼스트 센터, 초등학교 입학 후 열두 살까지 교육하는 세컨드 센터, 열세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부모 면접을 진행할 수 있는 라스트 센터. 부모 면접을 줄여 '페인트'라 부르는 아이들 속에 제누 301이 있었다.

작품은 센터를 나가야 하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제누301이 '부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내용, 누구도 원하지 않을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살아온 사람의 모습 등을 내보이며 좋은 부모의 기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부모를 직접 면접하고 점수를 매겨 선택할 수 있다는 상상은 어쩌면 상상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청소년심사단들은 현실을 전복시키는 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엄마인 나로서는 그 동안의 내 행동을 돌아보게 만드는 오싹함을 느꼈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식도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이제 더는 '너는 내 자식이니까, ~야' 같은 말은 통하지 않는다.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족이 될 수 있고, 혈연이기에 더 깊은 상처를 받고 평생 등지고 살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부모 면접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제누301이 한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서는 모습을 그리는 성장소설임과 동시에, 현재의 가족관계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작품이다. 나는 과연 엄마로서 몇 점을 받을 수 있는가. 적어도 미움받거나 존재를 부정당하는 엄마는 되지 않겠다며, 소설 속 세상이 아직 닥치지 않은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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