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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둘째 곰돌군이 우와악 소리를 내며 일어나는 바람에 첫째 곰돌군이 덩달아 잠에서 깼다. 평소라면 조금 뒹굴하고 일어났을 첫째 곰돌군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일어나자~맘마 먹고 어린이집 가자' 몇 번을 이야기해도 일어나지 않더니 결국 9시가 다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등원 시간이야 조금 늦어도 상관없으니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맘마 먹자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놀이방으로 들어간다. '안먹어, 어린이집 안가' 를 몇 번 반복하더니 어린이집은 가지 않아도 되지만 맘마를 먹지 않으면 간식을 주지 않겠다는 말에 식탁의자에 앉았다. 첫째 곰돌군에게 아침을 챙겨주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가 식탁 밑으로 물을 흠뻑 흘렸다. 돌아와보니 둘째 곰돌군이 그 물 웅덩이에서 좋다고 물장구를 치고 있다. 나의 신경선이 어디서 끊긴 것일까. 마음으로는 '참자, 있을 수 있는 일이야'를 되뇌어보지만, 결국 좋지 않은 소리가 입을 뚫고 나가버린다. 한 번 시작한 꾸중이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결국 시무룩해져 겨우겨우 밥을 우겨넣은 첫째 곰돌군을 보자니 또 마음이 철렁한다. 한 번만 더 참을걸.
낮버밤반이라고 했던가. 낮에는 버럭하고 밤에는 반성하는 것. 요즘 내 모습이 딱 이러하다. 첫째 곰돌군이 미운 네 살에 접어들어서인가, 아니면 내가 육아에 지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첫째 곰돌군이 네 살에 접어든 것을 핑계삼아 나의 사나운 마음을 아이에게 쏟아내는 것인가. 사실 첫째 곰돌군은 미운 네 살 시기라고는 해도 미운 짓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그저 아이들이라면 할 수 있는 실수, 동생을 본 형아의 사랑받고자 하는 약간의 질투어린 행동, 그것이 전부라고 할만큼 순한 아이다. 그러니 결론은, 내가 이 아이에게 아주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어느 밤,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쓸어넘겨주며 또 한 번 반성하던 밤, 내가 이 아이의 엄마라는 것을 첫째 곰돌군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하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아이를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부모도 선택할 수 없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은 나는, 못난 엄마 만나 고생한다는 생각에 유독 아이가 안쓰러웠더랬다. 감정적으로 이토록 불안정하고 예민해져있는 나를, 이 아이는 후에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내가 딱 이맘 때였을 무렵, 네가 동생을 잘 돌보지 못해 동생이 다쳤다고 나를 노려보던 엄마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처럼, 이 아이도 자신을 혼내던 나의 목소리, 나의 눈빛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서늘해졌다.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사회라면, 우리 아이들은 나를 엄마로 선택해주었을까.
세상의 모든 부모는 불안정하고 불안한 존재들 아니에요?
그들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잖아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 같아요.
많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자기 약점을 감추고
치부를 드러내지 않죠.
그런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무너져요
이희영 작가의 [페인트]는 아이 낳기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자 국가가 책임지고 아이를 키우는 세계를 선보인다. 단순히 양육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낳은 아이를 키우기 원치 않을 때 정부에서 그 아이를 데려와 키우는 방식이다. 그렇게 NC 센터가 세워졌고, 그 아이들은 국가의 아이들(nation's children)이라고 불린다. 갓 태어난 아기들과 미취학 아동을 관리하는 퍼스트 센터, 초등학교 입학 후 열두 살까지 교육하는 세컨드 센터, 열세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부모 면접을 진행할 수 있는 라스트 센터. 부모 면접을 줄여 '페인트'라 부르는 아이들 속에 제누 301이 있었다.
작품은 센터를 나가야 하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제누301이 '부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내용, 누구도 원하지 않을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살아온 사람의 모습 등을 내보이며 좋은 부모의 기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부모를 직접 면접하고 점수를 매겨 선택할 수 있다는 상상은 어쩌면 상상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청소년심사단들은 현실을 전복시키는 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엄마인 나로서는 그 동안의 내 행동을 돌아보게 만드는 오싹함을 느꼈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식도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이제 더는 '너는 내 자식이니까, ~야' 같은 말은 통하지 않는다.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족이 될 수 있고, 혈연이기에 더 깊은 상처를 받고 평생 등지고 살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부모 면접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제누301이 한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서는 모습을 그리는 성장소설임과 동시에, 현재의 가족관계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작품이다. 나는 과연 엄마로서 몇 점을 받을 수 있는가. 적어도 미움받거나 존재를 부정당하는 엄마는 되지 않겠다며, 소설 속 세상이 아직 닥치지 않은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