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수록 다시 보는 서양 조각 100 알수록 다시 보는 서양 100
차홍규.김성진 지음 / 미래타임즈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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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 그 중에서도 그림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조각이라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조각이라니, 이걸 왜 놓치고 있었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양미술에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공부해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도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그림과 클래식에는 좀 더 많이 알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서양조각에 관한 책은 무척 반갑다.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회화가 색이나 선에 의해 2차원적 화면에 평면적으로 표현되는 데 반해, 조각은 공간을 점유하고 현존하는 3차원적 입체로 구현된다. 회화와 조각 중 어느 것이 더 뛰어나는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논쟁이고 각각 가진 매력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조각은 다방면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점이 아닐까 싶다.

 

조각의 기원은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저자는 구양성서 <창세기>의 서두가 조각의 기원 및 창작과정에 관해 훌륭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고 보았다. 태초에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직접 노동을 투여하지는 않았지만 흙을 빚어 인간의 형상을 완성했다. 그러나 헤겔은 피조물인 아담에게 입김을 불어넣었을 때에야 물질에 불과하던 인간이 생명체로 탄생할 수 있었던 점에 주목한다. 조각은 물질적 성질을 초월하여 그 속에 인간의 정신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정신은 <발렌도르프의 비너스> 조각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누구나 한 번쯤 역사책에서 보았을 <발렌도르프의 비너스> 조각을 통해 수렵과 채집 등의 경제활동으로 생존하던 인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동력의 확보를 위해 출산 능력이 있는 모성을 숭배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회화도 마찬가지겠지만 조각은 회화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힘이 들어가는 작업인만큼, 그 과정을 상상하기만 해도 어쩐지 인간의 혼이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리스의 고졸기부터 시작되는 조각의 변천사. 책에 실린 모든 조각이 감탄과 경외심을 갖게 하는 작품들이지만 이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젖은 천 주름'기법을 선도한 안토니오 코라디니의 <베일을 쓴 여인>이다. 거부할 수 없이 유혹적인 베일을 쓴 여인 조각의 효시는 안토니오 코라디니의 <겸손>으로 시작되는데, 이 조각상은 온몸과 얼굴이 통째로 베일에 뒤덮여 있다. 순간 이것이 그림인가 착각했다. 아무리 인간의 능력이 뛰어나고 마음을 먹으면 못할 것이 없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운 베일의 질감까지 재현했는지 신기하기만 할 뿐이었다. 눈 앞에 있다면 손으로 한 번 쓸어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전부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조각들이 소개되어 있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며 작품의 배경과 함께 조각상을 관람하는 재미가 엄청나다. 조각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나 신화 등도 소개되어 있어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서명하게 수록된 사진자료와 풍부한 설명이 압권이었다. '알수록 다시보는' 시리즈는 [그리스 로마 신화 100] 만 읽어보았는데 [서양미술 100] 이라는 책도 궁금하고, 앞으로는 어떤 주제로 책이 나올지 기대되고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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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나가카와 나루키 지음, 문승준 옮김, 신카이 마코토 / 비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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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가 기억난다. 비오는 거리에서 데려온 고양이에게 무언가를 주는 그녀와, 그녀 옆에 자리잡은 고양이. 그리고 또 빗소리.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에 빠지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를 생각하면 나는 항상 외로움과 쓸쓸함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다. 그 때의 내가 슬펐었다는 것도 기억한다. 그래서였을까. 원작을 읽어보니 전혀 슬픈 이야기가 아님에도 예전에는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면 가슴 한구석을 지나가는 바람에 마음이 시렸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혼자만 간직하던 그 슬픈 느낌을 떠나보낼 수 있어서. 외로움과 쓸쓸함 대신 따뜻함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었다.

초봄, 비가 내리던 어느 날 고양이는 그녀와 만난다. 그리고 초비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녀는 어떻게 생각하는 지 몰라도 초비는 그녀를 자신의 연인이라 생각한다. 그녀가 자신을 거두었으므로 자신은 그녀의 고양이다. 그녀는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각에 출근하고 일정한 시각에 퇴근한다. 노부라는, 자신은 사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지만 그와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아 불안한 그녀.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은 초비, 초비에게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그녀다. 그런 그들 주변에 존재하는 여러 고양이와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관계는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세상과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에 신비함과 아련함을 선사한다.

애니메이션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는 신카이 마코토가 게임회사 재직 시절에 각본, 작화, 연출 등 전 과정을 홀로 작업한 작품으로 제12회 DoGa CG 애니메이션 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책의 표지에 있는 컬러와는 달리 5분짜리 흑백 단편으로, 그래서 그 때의 조금은 슬펐던 내가 외로움과 쓸쓸함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와 함께 좋아하는 작품으로 <초속 5센티미터>가 있다. 이 두 작품의 공통 키워드는 '서정성'이다. 감독의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두 작품 전반에 깔린 서정성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간지러운 느낌, 가슴 뛰는 느낌, 어쩐지 안절부절 못할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 작품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울컥하는 느낌이다. 사실은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책에서는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초비를 중심으로 다른 고양이와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실려 있다. 마냥 밝지만은 않다. 관계에서 오는 외로움과 오해에서 비롯된 고통 또한 존재한다.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아릿함도. 하지만 그런 감정들이 바로 세상과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 아닐까. 초비가 그 이름으로 그녀가 이어지고, 그녀를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책도 좋았지만 책을 읽고나니 애니메이션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 빗소리. 빗소리 속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곁을 내어준 초비와 그녀를 다시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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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포티큘러 북
댄 카이넨 외 지음, 장정문 옮김 / 소우주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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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티큘러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올케 덕분이었어요. 우연히 [사파리] 책을 보다가 첫째 곰돌군이 생각났다면서 집으로 한 권 보내주었습니다. 역동적인 동물들의 모습은 무척 매력적이었지만 한 가지 단점은 원서로 된 것을 보내주었다는 점이랄까요. 하핫. 움직이는 책은 참 신기했고 신세계를 보여주었으나 어떤 설명 없이 책만 넘겼더니 4세 곰돌군,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출간된 [바다]편은 원서가 아니었어요! 올레! 전 당연히 이 책도 원서일 줄 알았는데 도착한 책은 다행히도 번역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책을 넘겨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일단 보실까요!

바닷속 생물들이 이렇게 움직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곰돌군이 맞추기에는 생소한 동물들도 있었어요. 사실 저도 많고 많은 바다 생물 중에 하필 왜 곰치나 아귀가 실려있는 걸까 의아했습니다. 덤보문어, 해마, 샌드타이거상어, 푸른바다거북, 기하 곰치, 태평양 대양해파리, 심해아귀 등 7종류의 바다 생물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지구 표면의 4분의 3은 바다로 덮여 있습니다. 자연 앞에서 늘 그렇듯 우리는 바다 앞에서도 너무나 작은 존재이고, 수없이 많은, 이름도 다 알지 못하는 생물들이 지금도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수영을 못하는 저로서는 생물들이 바다에 떠다니고, 헤엄치며,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모습에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재작년 4월에 필리핀에 간 적이 있어요. 수영을 잘하고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남편 때문에 바다로 나갔는데, 전 구명조끼를 착용하고도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와서 거북이도 구경 못하고 가는 건 너무한 것 같아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풍덩 뛰어들었죠. 둥둥 떠서 얼굴을 물속에 들이밀었더니, 영상으로만 봐왔던 세계가 거기 있었습니다. 그 때의 감동이란!

포티큘러 북으로 그 감동을 전부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역동적인 덤보문어의 달리기하는 것 같은 모습, 바다거북이 헤엄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4세 곰돌군도 제가 책을 보며 조금씩 설명하면서 보니 [사파리]보다 더 집중해주기도 했고요. 사실 [사파리] 책만 봤을 때는 전부 원서인 줄 알았는데 [바다]를 보니 다른 책들에 대한 호기심도 커졌습니다. 아이도 마찬가지인 듯, 이 책을 보고나더니 물고기 보러 가자고 하더라고요. [사파리] 편을 보고는 동물원에 가자고 해서 동물원도 다녀왔답니다. 이번에는 아쿠아리움을 향해 고고! 하겠습니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기에 참 좋은 책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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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 오프라 윈프리, 세기의 지성에게 삶의 길을 묻다
오프라 윈프리 지음, 노혜숙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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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선정 '20세기 영향력 있는 인물',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년간 최고의 자리를 지킨 <오프라 윈프리 쇼>의 진행자이자 제작자로 불우한 과거를 딛고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성공을 이뤄낸 오프라 윈프리. <오프라 윈프리 쇼>는 미국 내 시청자만 2200만 명에 달하고 전 세계 140개국에 배급되며 최고의 토크쇼 자리에 올랐다. 나처럼 문외한인 사람조차 이 쇼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니 그녀의 성공이 얼마나 대단한 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자신의 부와 명성을 나누는 일에도 열정적이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리더십 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국경을 넘나드는 자선활동을 펼쳐온 그녀가, 2011년 <오프라 윈프리 쇼>의 은퇴를 선언하면서 OWN 방송국을 설립, 현재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각계각층의 명사들을 초청해 솔직하고 통찰력 있는 대화를 나누는 토크쇼 <슈퍼 소울 선데이>를 제작했다. <슈퍼 소울 선데이>는 고정 시청자만 100만 명 이상이고, 9년 간 16시즌이 제작되었으며, 에미상을 일곱 차례 수상하며 명실공히 최고의 프로그램 자리를 차지했다. [위즈덤]은 <슈퍼 소울 선데이> 명사들의 핵심 사상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한다.

오프라 윈프리는 이 책에서 명사들에게 질문하고 답을 얻은 사항을 우리에게도 묻는다. 깨어 있음, 의도, 마음챙김, 영혼의 GPS, 자아, 용서, 내면의 문이 열리는 것, 은총과 감사, 성취, 사랑과 연결. 모두 우리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길에 대한 이야기다. [연금술사]의 파울로 코엘료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엘리자베스 길버트,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시리즈의 저자 잭 켄필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의 에크하르트 톨레, [마음 가면]의 브레네 브라운과 틱낫한, 세계적인 기업가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CEO 등 현재 존경받고 큰 영향을 끼치는 명사들이 자신의 삶에서 깨달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눈다.

솔직히 책의 첫 장을 펼쳤을 때 약간 당황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혹은 한 번쯤 들어봤을지라도 어쩐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영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의미하는 '영성'은 의마와 목적을 추구하는 우리의 일부다. 우리를 희망으로 이끌어서 절망에 굴복하지 않게 하는 일부이기도 하며, 선을 믿고 더 중요한 무언가를 믿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결국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어떻게 하면 지금, 바로 여기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가다. 그것도 행복하게. 우리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그것이 무엇이든 사무실 바닥에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므로-, 어떻게 해야 우리의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는지 탐구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충전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우울할 때가 많다.

기운이 없다. 화가 난다. 절망적이다.

반면에 아침에 일어나서

"살아 잇으니 기쁘다. 오늘 할 일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그러한 내면의 성공을 거두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드러난다.

 

데번 프랭클린

이 책을 읽다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 탐색하게 되고, 진정한 행복과 자유, 자신이 소망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외부의 시선과 영향에 의해 내버려두었던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는 시간을 얻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가 산타바바라에 있는 자택에서 찍었다는 사진은 그래서 더 의미가 깊다. 그녀 자신이 신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자신보다 거대한 모든 것들에 연결되어 있음을 가장 깊이 느낀 장소를, 어떻게 보면 그녀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니까. 그녀의, 그리고 각계각층의 명사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것들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들의 속삭임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보자. 어쩌면 한결 편안하고 고요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무 노력 없이 그들이 인생을 통해 깨달은 중요한 것들을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들여다볼 수 있다니 엄청난 행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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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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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억. 나노로봇에 의한 기억 개조 기술이 만들어낸 가공의 기억이 존재하는 세상. 허구를 세상 무엇보다 사랑했던 치히로의 부모는 그가 있는 현실보다, 그가 없는 허구에서 살아가기를 더 원했다. 의억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사는 부모를 바라보는, 의억이 하나도 없는 세계에 있는 소년은 늘 혼자였다. 진짜 사랑도 가짜 사랑도 알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된 치히로는 열아홉이 된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다가 그 어떤 즐거운 추억 하나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삶에 회의감을 느낀다. 그의 선택은 의억을 구입하지는 않으나 아무것도 없는 인생을 잊어버리기 위한 '레테' 구입. 주문한 '레테'를 단숨에 먹어버렸지만, 어째서인지 그에게 도착한 것은 '그린그린'이었다. 청춘 콤플렉스 해소를 위해 이용되는, 가공의 청춘 시절을 사용자에게 제공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그린그린. 그 후 치히로에게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지만 소중하게 기억되는 소꿉친구가 생겼다. 그녀의 이름은 나쓰나기 도카.

순간순간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으며 마치 정말 있었던 일인 것처럼 기억이 순식간에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여름축제에서 나눈 키스, 부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교실에서 단 둘이 남았을 때의 달콤함, 도카와 친구가 된 계기,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서재에서 들었던 음악들과 서로 기댔던 등에 전해져오는 따스한 감촉 등. 도카에 관한 모든 것이 치히로의 오감을 자극하며 그녀는 실재한다고, 어서 그녀를 찾아내라고 재촉한다. 의억 속 인물이라고 치부하지만, 숨길 수 없는 그리움으로 혼란스러운 치히로 앞에 마침내 실재하는 도카가 나타난다. 그가 사는 바로 옆집에.

누구나 한 가지쯤, 아니 몇 가지쯤 잊고 싶은 기억이야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주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기억. 그 기억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해 우리 모두 이불킥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끄럽고 아픈 기억이라도 그 기억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지금의 우리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당연한 의문 앞에서 자신의 기억 일부라도 삭제하기 위한 결심을 한 치히로의 인생은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웠던 것일까. 의억이라고, 가짜라고 외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카가 진짜인지 확인작업에 나서는 치히로의 모습 그 자체가 온몸으로 자신도 행복하고 싶었다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단 한 명이라도 필요했다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찌르르 울려왔다.

행복한 기억이 있다면 얼마든지 힘을 내어 살아갈 수 있다. 의억에 도움을 받아도 좋다.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기억은 어느 정도 현실 세계에 발 딛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도움만 주면 된다. 의억이 만들어낸 세상을 음미하며 허구의 세상으로 숨어버린 치히로의 부모는 죽어있는 것과 다름없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반문한다. 만약 그린그린과 레테가 있는 세상이라면 당신들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진짜의 세상에서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갈 것인지, 허구의 세상에서 행복만을 맛보며 살아갈 것인지 말이다. 과연 어느 쪽이 행복할까. 선택은 개인의 몫이겠지만 작가는 작품의 결말로 자신의 대답을 대신하는 듯 하다. 그런 점에서 [너의 이야기]는 SF 장르 소설이자, 한 소년과 소녀의 로맨스이며, 선택의 기로에서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소년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읽는 내내 마음이 갈 곳을 헤맸다. 내가 치히로인 것 같아서, 또 도카가 된 것만 같아서. 이 세상 어딘가에 운명의 상대가 있기를 바라는 그들의 외로운 마음이 절절해서. 그들이 서로에게 내민 손을 꼭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의 손이 서로에게 닿았다면 그건 그린그린이나 레테 덕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간절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실현시킨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의 중요한 일은 마음이 원하기 때문에 이루어지고,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현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음은 허구가 아닌 지금 여기, 현실에 존재한다

미아키 스가루의 작품은 처음이다. 사실 [너의 이야기]보다 더 궁금했던 것은 [수명을 팔았다. 1년에 1만엔으로]라는 작품이었는데, [너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궁금했던 작품을 오히려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일본 발매 이틀 만에 4쇄를 돌파한 데다, 2019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최종 후보작에 오른 작품. 그 명성이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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