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콤한 밤 되세요 ㅣ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1
노정 지음, 드로잉메리 그림 / 폴앤니나 / 2019년 10월
평점 :
나날이 무너지고 있는 드림초콜릿호텔. 말 그대로 무너지고 있다. 소설의 시작은 주차장 위에 있던 물탱크가 땅에 떨어지면서 시작된다. 다행히 주차되어 있던 아우디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다. 그 와중에 902호 외국인으로부터 프런트에 걸려온 전화. 영문과를 졸업한 덕분에 수시로 외국인 통역을 맡고 있던 나주임은 오늘도 이 전화로 호출당한다. 그런데 이걸 어째. 그 외국인은 러시아어를 쓴다. 괜히 잠을 깬 나주임. 그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쇠락하고 있지만 어떻게든 운영되고 있는 이 호텔의 캐셔다. 돈받고 키만 내주면 되는 일-이 아닌 것도 해야 하는 캐셔.
정신병원에서 만난 박사장과의 인연으로 나주임, 나명은 드림초콜릿호텔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리재. 그의 사망으로 일주일동안 잠 한숨 잘 수 없었던 그녀는 수면제와 편두통약을 쓸어먹은 후에야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그저 잠을 자고 싶었을 뿐인데 자살기도를 했다 생각한 동지들에게, 그녀는 스스로 정신병원을 알아봐달라 부탁했다. 캐셔로 일하면서 그나마 자신을 달래가는 중이긴 한데, 이 캐셔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층마다, 객실마다 테마가 다른 객실 현황 체크해야지, 침대 유형도 외워야지, 요일마다 다른방값과 입퇴실 시각, 마일리지 적립 기준과 쿠폰이나 상품권 적용 방침도 알아두어야 한다! 우와, 호텔에서 하는 일, 특히 프런트에서 캐셔가 하는 일이 이렇게 많은 줄 상상도 못했다. 그저 인터넷으로 예약 현황 체크하고 나와 있는 사항 알려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게다가 닫혀도 닫히지 않는 문에, 손님에게 마스터키까지 내주어야 하는 상황에, 데이트 폭력이 발생한 상황에서 프로처럼 대처도 해야 하고, 언젠가 룸에서 자살한 시체를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껴안고 일해야 한다. 불륜에 성매매까지 호텔에서 볼 수 있는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줄줄이 펼쳐진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사랑과 허무가 함께 묵는 곳. 그 안에서 리재의 죽음으로 망가진 가슴을 부여잡고 간신히 삶을 이어가던 나주임이 서서히 부활한다. 후임을 걱정하며 배라묵을 팥빙수 기계를 훔쳐나올 수 있을만큼!
호텔에 묵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에피소드 형식으로 묶여 있을 줄 알았는데, 물론 그런 이야기도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나주임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호텔, 그녀가 바라보는 호텔 사람들, 그녀의 과거, 그녀의 현재, 그녀가 걸어가야 하는 미래. 낯선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에서 마침내 편해질 수 있었다는 그녀의 고백이 가슴 시리게 다가오는 것은 나주임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세계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곳에서 비로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발견하고 당당하게 호텔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이 멋지다. 잔잔한 이야기와 함께 아기자기하고 예쁜 일러스트를 함께 만날 수 있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