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어느 날
조지 실버 지음, 이재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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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1일, 호텔 근무를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버스에 몸을 실은 채 창밖을 바라보던 로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책을 읽고 있던 한 남자와 운명적으로 눈이 마주친다. 한 순간의 벼락과도 같은 짧은 눈맞춤이었지만 이내 무언가를 느낀 듯 읽던 책을 덮고 버스 쪽으로 다가선 남자. 하지만 야속하게도 버스는 출발해버리고 이후 로리는 '버스보이'를 찾아 헤매며 말 한 마디 건네보지 못한 그를 향한 그리움을 키워나간다. 그 후 1년,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버스보이'인 그 남자, 잭이 세라의 옆에 서 있다. 로리의 가장 친한 친구의 연인으로! 충격을 받은 로리는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잭과 인사를 나누는데, 이상하다, 어쩐지 그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로부터 9년간 계속되는 그들의 인연. 과연 로리와 잭의 마음의 종착역은 어디가 될까.

 

우와아악! 책을 읽는 내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슴 설렘으로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이렇게 흥분되다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때문인 것인가! 그도 아니면 이 책이 정말 지독하게도 재미있어서인가! 확실한 건 결혼하고 곰돌이 두 명 키우면서 무뎌진 감성으로 한동안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나를 이렇게 들썩이게 만든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거다. 예전에는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지만 연애시장에서 자유로워지고보니 그런 일도 가능하겠다는 유연한 사고가 생겼다. 왜, 처음 만났는데도 유난히 친근하게 느껴지고, 가까워지고 싶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그런 감정이, 본인은 깨닫지 못했을 뿐 첫눈에 반했다는 증거 아닐까. 그렇게 서로에게 반했지만 얄궂게도 친구의 연인과, 연인의 친구로 만나게 된 두 사람. 진부한 설정. 그런데! 진부한데 너무 재밌다! 꺅!

 

잭에 대한 마음을 잘 숨기고 지낸다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쓰러진 이후 심적을 약해진 로리는 우연히 자신들의 '첫번째' 만남에 대해 잭에게 기억하는지 묻고 만다. 사실 잭도 그의 독백을 통해 그녀를 꿈에서까지 그리워할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순간적으로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하고, 감정을 못이겨 흐느끼는 로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키스한다. 그 날의 일을 계기로 어색해진 두 사람. 그리고 태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로리. 그 곳에서 만난 매력적인 오스카를 만나 인연을 맺고 결혼까지 이르지만 오스카와 로리의 사이도 순탄하지 않다. 잭과 세라의 사이도.

 

오스카와의 만남도 로맨틱하다.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와의 러브스토리라니,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한 번쯤 그려봤을, 하지만 이루어지기 쉽지 않은 로맨스. 죽여주는 미남에 명예와 부를 아는 남자, 게다가 자신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상황이라니 나라도 홀랑 넘어갈 판이다. 로리도 '어떤 면에서는' 오스카를 사랑했고 결혼까지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 자리잡은 구멍을 메워주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일이 바빠 일주일에 절반은 얼굴을 볼 수 없는, 예전 사귀었던 여자와 계속 일을 하는 오스카라니! 오마이갓! 작은 곳에서 시작된 균열은 점점 커져 걷잡을 수 없어지고, 그 균열은 로리와 오스카 뿐만 아니라 잭과 세라에게서도 감지된다.

 

거의 10년의 세월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이 서로만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세라가 있어 그랬고,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20대의 나라면, 어쩌면 30대 초반까지의 나라면 '아니, 어떻게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결혼을 하거나 다른 상대를 만날 수 있지?!' 라며 흥분해 날뛰었겠지만, 이제는 알겠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마음 속에 누가 있든, 어쨌든 지금이라는 시간을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자신만 한 자리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럼에도 돌고 돌아 만나게 된 두 사람. 그렇기 때문에 더 의미 있다.

 

읽을수록 매력적인 소설이다. 그렇다. 나 앉은 자리에서 두 번 읽었다. 새벽에. 밤 새워가면서. 한 번 손에 잡으니 가슴이 두근거려 끝까지 읽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판타지, 어쩌면 현실에서 실현 가능할 법한 사랑. 잠들어있던 유부녀의 연애세포를 새벽에도 날뛰게 만드는 진귀한 작품이다! 그나저나 로리도 좋지만 세라도 너무 멋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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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살인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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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도 없던 소년에게 폭행당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온 이치로이 고즈에. 그녀를 습격한 범인은 근처 고등학에 다니던, 이제 열일곱이 된 소년 구츠와 기미히코였다. 그는 고즈에 뿐만 아니라 이미 의사, 초등학생, 독거노인을 살해한 전력이 있었고 고즈에는 그의 네 번째 타깃이었다. 격렬한 저항으로 살아남았지만 그가 자신을 공격하던 순간의 살의는 사건 발생 후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왜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인가. 자신의 기억에는 없지만 그에게 모욕을 준 일이 있었나. 구츠와는 고즈에를 공격한 직후 행방을 감춰 현재까지 오리무중이다. 고즈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과 두려움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그 동안의 고충을 사건담당 형사였던 나루토모에게 하소연한다. 그는 그녀의 괴로움에 진지하게 응답해, 미스터리 작가와 전직 형사 등이 멤버인 추리모임 <연미회>에 그녀의 사건 조사를 의뢰한다.

 

미스터리 베스트셀러 작가인 오츠카와 헤이타, 미스터리 작가 겸 에세이 작가인 야츠메 아리사, 전직 현경 출신의 사립탐정 회사를 운영하는 요보로베 야스노리, 범죄심리학 전문인 이즈미다테 유미코, 본격 미스터리 전문의 슈타라 아츠시. 나름 추리와 미스터리 쪽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의 의견을 개진한다. 이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 사람이 반론을 내거나 동의하기도 하면서 여러 가설이 흥미진진하게 오가지만 범인인 구츠와가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100% 확신할 수는 없다. 과연 고즈에는 이 모임에서 구츠와가 자신을 공격한 동기에 대해 알게 될까. 구츠와가 연쇄살인을 계획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이야기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가다가, 마지막에 자리한 경악할만한 진실에 그만 입을 떠 벌리고 말았다.

 

구츠와의 동기, 구츠와 외의 다른 진범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로 진행되어 정말 깜짝 놀랐다. 게다가 이 사람의 범행 동기는 평범한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악의 화신의 탄생이라고 해야할까.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지른 그를 보면서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됐을 지 생각하니 모든 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마치 하나의 끈처럼 이어져 있는 것 듯한 느낌이 든다. 부디 누군가 나타나 그를 멈춰주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정도. 충격적인 결말에 너무 정신이 없다. 띠지에 적힌 홍보문구처럼 이런 범죄 소설은 처음이다.

 

내용도 흥미롭고 무척 재미있게 읽었지만 개인적으로 표지 이미지나 속지 이미지가 너무 아쉽다. 아프로스미디어에서 출간된 작품을 몇 번 읽었는데 가장 충격적인 표지는 츠지무라 미즈키의 [동그라미]. 츠지무라 미즈키의 완전 팬인데 이 작품의 표지를 보고는 구매의욕을 잃었다. 흥미로운 작품들 많은데 부디 표지의 알흠다움에도 신경 써주시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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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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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수용소의 물건들이 차례로 하나씩 떠오르는 게 아니라 무더기로 나를 덮친다. 그래서 나는 안다. 물건들이 나를 찾아오는 건 내가 기억하려 해서가 아니라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임을...밤이면 물건들은 나를 추방시키려 하고, 나를 원한다. 한꺼번에 쏟아져내리므로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위가 조여든다. 그 느낌은 점점 올라와 입천장에 닿을 것 같다. 숨그네가 공중을 한 바퀴 돌고, 나는 헉헉거린다. 배고픔이 괴물이듯 그런 이빨빗바늘가위거울솔은 괴물이다. 배고픔이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물건들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p 37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에서 함께 읽는 도서로 선정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주년 특별판 시리즈의 그 첫 번째,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만났다. 루마니아 중서부 지역에서 러시아행이 결정되었을 때 '나'는 열일곱 소년이었다. 한창 랑데부, 같은 남자와의 사랑에 빠져 있던, 수용소에 갇히기 훨씬 이전부터 나라와 가족들에 대한 공포로 살아왔던 사람. 나라가 자신을 범죄자로 가두고, 가족들이 치욕으로 여겨 내쫓으리라는 공포 속에서 차라리 수용소행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철없던 소년. 가족들이 챙겨준 물건을 품에 안고 러시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루마니아를 뒤로 하고 어느 새 맞이한 러시아의 밤 속에서 그와 다른 이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성의 말살을 경험한다. 모두가 일렬로 자리해 용변을 봐야했던 그 밤. 예전의 삶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마침내 현실을 직시한다. 살고 싶어서, 살기 위해 그들은 무더기로 모여 똥을 누었다.

 

그리고 시작된 수용소 생활. 그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는 '배고픔'이다. 배고픈 천사는 늘 따라다니며 한방울넘치는행복을 맛볼 때까지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일의 경중에 따라 무게가 다른 빵을 배급받았고, 빵 바꾸기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아침에 받은 빵을 그 순간 다 먹지 않으려면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해야 했다. 남은 빵을 베개 밑에 숨겨놓고, 또 누군가는 그 빵을 훔쳐가고, 자체적인 징벌이 가해진 후에도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살아간다. 남의 빵을 훔칠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알기에, 누구라도 그가 될 수 있었기에, 하지만 자신들만의 도덕은 필요했으므로. '나'는 '너는 돌아올 거야' 라는 한 마디에 의지해 수용소 생활을 견뎌가고, 수용소 사람들 모두를 지탱해주는 존재는 경비원 카티로 불리는 카타리나 자이델이다. 날 때부터 천치였던 그녀를 수용소 사람들 누구도 괴롭히지 않으며 서로에게 저지르는 나쁜 짓을 그녀에게 베푸는 선행으로 용서받고자 한다. 그녀는 수용소 안에 마지막 남은 양심, 마지막 남은 휴머니즘을 상징한다.

 

단어 하나가 소제목이 되어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담백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그 담백함이 오히려 처연하게 다가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뮐러의 아버지는 2차대전 당시 나치 무장친위대로 징집되었다 돌아왔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의 강제수용소에서 오년간 노역했다. 나치의 몰락과 루마니아 독재정권의 횡포 속에서 형성된 시골마을의 강압적인 분위기. 그 분위기는 어린 뮐러에게 잊지 못할 기억과 두려움을 선사했고 , 그 때의 경험들이 그의 문학인생에 근간을 이루게 된다. 그런 배경을 알고 난 후여서인지 작품 안의 담담한 문체가 오히려 가슴이 아프다. 게다가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시를 읽는 것 같은 섬세함이 담겨 있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울림과 무게감이 담겨 있다.

'나'의 고통은 어머니가 보낸 엽서로 절정에 다다른다. 자신이 떠나고 난 뒤 태어난 동생의 존재. 그 존재는 '나'에게 전혀 기쁨도, 반가움도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죽어버리를 바랐다. 이제 자신은 가족들에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 어쩌면 아무도 그가 살아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은 그를 더 절망으로 몰고 간다. 그에게 어머니는 어째서 그런 엽서를 보낸 것일까. 단순히 동생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그 엄마의 심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나라면, 만약 엽서를 보낼 수 있다면 어떤 사진을, 어떤 문구를 보냈을까. 망설일 필요 없다. 당연히 보고싶다, 너를 기다린다, 몸이 성치 않아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달라-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5년이나 더 수용소에 있다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수용소에서의 경험은 그를 꽉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누군들 놓여질 수 있을까. 그 황량하고 두려운 죽음과 삶의 길목에 서 있었던 경험에서. '나'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연결되어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현재의 우리에게는 어떤 시간을 주고, 미래의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떤 경험을 겪게 할까. 잊혀질 수도 있는 과거에 눈 돌리게 하는 것. 기억하고 함께 살아가게 만드는 것. 문학이 지닌 이 힘 앞에서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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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를 믿나요? - 2019년 볼로냐 라가치 상 오페라프리마 부문 대상 수상작 웅진 모두의 그림책 25
제시카 러브 지음, 김지은 옮김 / 웅진주니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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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주니어에서 출간된 [인어를 믿나요?].

저는 인어를 믿습니다! 외계인도 믿어요!

인간 외의 다른 신비로운 생명체를 부정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생각을 하곤 해요.

 

[인어를 믿나요?]는 인어를 너무 좋아하고, 자신이 인어라는 상상에 빠진 한 아이의 이야기에요.

아이의 이름은 줄리앙이고, 아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은 줄리앙의 할머니입니다.

저 물고기 꼬리를 가진 사람들은 인어고요!

줄리앙은 인어를 정말 좋아해요. (왜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상상 속에서 줄리앙도 인어가 되어 커다란 물고기와 눈맞춤을 하기도 하죠.

그런 공상 속에서 줄리앙은 자신은 인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실을 할머니에게 털어놓지만, 할머니는 가볍게 '목욕 좀 해야겠다'며 욕실로 들어가버리죠.

 줄리앙은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을 이용해 인어로 변신합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화면에서 사라지는 할머니.

줄리앙은 민망한 듯, 어색한 듯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봅니다.

그리고 다시 등장한 할머니가 조용히 줄리앙을 부르네요.

그러고는 줄리앙에게 어울릴 것 같다며 목걸이 하나를 건넵니다.

함께 문밖을 나서는 두 사람!

앗!

그런데 줄리앙은 인어로 변신한 모습 그대로에요!

어디 가는지 궁금해하는 줄리앙에 곧 알게 될거라고 대답하는 할머니.

많은 사람을 지나쳐 당도한 곳에는 여러 인어들이 함께 걷고 있었어요.

함께 걷자며 손을 내미는 할머니를 따라 줄리앙도 대열에 합류합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 줄리앙의 행동과 자신은 인어라는 말은 어쩌면 어이가 없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줄리앙의 할머니는 그를 혼내거나 무시하지 않고

조용히 아이가 원할만한 장소, 궁금해할만 장소로 인도하죠.

 

마지막 부분에서 줄리앙은 인어 할머니들의 환대를 받으며 자유롭게 헤엄을 치고 있어요.

누구도 줄리앙의 꿈을 헛되다, 어리석다 일갈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꿈꾸는 다양한 세계를 응원하고 싶어요.

그것이 아무리 허황된다 여겨질지라도 아이에게 그 세계는 전부일 것이므로

부러 그 상상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부디 제가 줄리앙의 할머니처럼

항상 아이를 응원하고 격려할 수 있게 되기를,

모자란 어른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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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김진애의 도시 3부작 1
김진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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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시작할 때부터 서울에 살았다. 친가와 외가도 서울에, 시댁도 친정도 모두 서울에 사신다. 그래서인지 서울에 산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고, 여기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산다는 것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큰이모와 작은이모는 전라도 광주에 사시고, 엄마의 고향도 광주라 어렸을 때 자주 놀러가기도 했기 때문인지 광주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진다. 옆지기가 직장 때문에 다른 지역에 가서 사는 건 어떠냐고 물었을 때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그렇게 당연하게 여겨온 '도시'들에 대해, 그 의미에 대해 물음표를 가져본 적이 없다. 이 책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를 읽기 전까지는.

 

[김진애의 도시 이야기]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 3부작 시리즈의 1부에 해당하는 책이다. 12가지 '도시적' 콘셉트에 따라 도시를 읽는 핵심적인 시각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도시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야기가 되면 더 알고 싶어지고 더 알게 되고 더 좋아하게 된다고. 자기가 사는 도시를 아끼게 되고 도시를 탐험하는 즐거움에 빠지게 되고 좋은 도시에 대한 바람도 키우게 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 그 '사람'을 중심에 놓고, 저자는 12가지 콘셉트를 소개한다. '익명성, 권력과 권위, 기억과 기록, 알므로 예찬, 대비로 통찰, 스토리텔링, 코딩과 디코딩, 욕망과 탐욕, 부패에의 유혹, 이상해하는 능력, 돈과 표, 진화와 돌연변이'. 이 12가지 콘셉트는 도시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 어디에나 적용된다. 바로 그래서 도시의 콘셉트. 인간 사회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이 모여 있는 공간이 도시이고, 이 시대 가장 보편적인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공간이 도시이므로, 이 12가지 콘셉트가 도시라는 조건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정의되느냐에 따라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근대 역사 보전에 대한 관심은 최근에 일어났다고 한다. 근대기라 하면 일제 강점기를 떠올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꺼리는 주제였다. 조선총독부 건물만 봐도 그러하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행해진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는 일제 잔재 청산을 상징했다. 지금은 잔해 일부가 독립기념관 부지 한쪽에 전시되어 있는데, '잔재 청산'과 '역사 기록' 입장 사이에서 상당한 갈등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일제 잔재 청산을 강렬하게 부르짖었던 시기가 지나고 잠시 일본과 화해 무드가 형성된 시기를 거쳐 지금은 다시 어느 정도 갈등 상황을 맞이했다.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따라 도시는 변화한다.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어쩌면 '다크 투어리즘'이 아닐까. 잊고 싶은 기억을 간직한 장소-감옥, 강제수용소, 학살현장, 전쟁터, 항거의 장소-들을 찾아 피해자의 아픔을 기억하고 가해자의 죄악을 기억하는 행동. 어둠의 체험을 마치고 환한 밖으로 나와 삶에 대해 느끼는 희망의 빛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아파트 공화국, 단지 공화국에 대한 글도 흥미로웠다. 요즘은 초등학생들조차 어디 아파트에 사는지, 어디 단지에 사는지에 따라 편을 가른다고 하던데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분명 어른들에게 책임이 있을 것이다. 아파트 공화국이란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이고, 단지 공화국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건축학자 박인석 교수다. 아파트 공화국은 아파트가 대규모로 들어서는 현상 자체를 지칭하지만 단지 공화국은 그 단어에 여러 가지가 함축되어 있다. 그는 대규모 단지를 만드는 경제구조와 주택 유통구조가 문제라는 논지를 펼쳤다. 담벼락을 치고 게이트를 만들고 자신들의 성을 지키려 드는 관습이 도시를 망치고 시민들의 삶을 망치고 있다고. 아파트 단지가 도시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서도 설명되어 있다.

 

오랜 시간 도시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움직이며 변화되어 왔다. 도시의 진화는 인간 삶의 진화와 그 길을 같이 한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게 될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도시에 대해 재미있게 풀어낸 김진애 작가의 다음 이야기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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