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그해, 여름 손님》 리마스터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 / 잔(도서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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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출간 전에 원고를 손봐야 하는 젊은 학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여름마다 그들을 손님으로 맞는 부모님, 부모님을 따라 별장에서 그들을 맞이하고 여름만 되면 자신의 방을 내어주고 할아버지가 쓰던 좁디좁은 옆방으로 옮겨 생활하는 엘리오의 가슴에 사랑이 찾아왔다. 헤어질 때 '나중에'라고 말하는 사람, 굳이 다시 만나거나 연락하고 싶지 않다는 무심함을 가린 냉정하고 퉁명스러우며 어쩌면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의 가까이 힘들 것 같은 사람. 처음에는 접근하기 어려운 유형이라 생각하고 주눅이 들었지만 미국에서 교수로 일하는 올리버가 찾아온 순간, 아마도 사랑은 시작되었다. 매일 그를 향한 열정으로 잠 못들던 엘리오의 마음을 올리버는 언제부터 눈치챈 것일까. 결국 자신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사랑을 고백한 엘리오에게 올리버 또한 엘리오를 원하고 있었음을 털어놓고 둘의 짧지만 강렬한 시간이 지나간다. 이들 사랑의 끝은 어디일까. 과연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솔직히 기대하던 분위기의 작품은 아니었다. 나의 경우에는 사랑에 빠지게 되는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에게 끌렸는지, 서로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기 전까지의 설렘 같은 것들에 흠뻑 빠지는 것을 원하는데, 그런 과정이, 서사가 조금 부족하다고 해야할까. 어떤 전조없이 올리버도 엘리오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엥?'하고 말았다. 17세 소년과 24세 남자의 사랑치고 상상이상으로 에로틱한데 이 장면들이 생각보다 노골적이라 어쩌면 거부감이 드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겠다. 두 사람의 감정 알아채기에 대해 '엥?'하고 생각한 것치고 나는 나쁘지 않았다. 사랑도 환상에서만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두 남자가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들 사이에 사랑의 행위가 진행되는 것은 당연하다.

 

설렘 같은 것은 조금 부족했지만 여운이 깊게 남는다. 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일까? 어째서 올리버가 그렇게 서둘러 '결혼'이라는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올리버와 처음 관계를 가진 후 혼란에 빠진 엘리오를 보면서, 이 사랑이 결코 오래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엘리오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배신. 그런 올리버가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별장에 찾아왔을 때 엘리오가 독백하는 부분에서는 마음이 쿵쿵 울렸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을 때 했던 둘만의 약속. 자신의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기. 아직 엘리오의 마음에는 올리버가 남아있다. 후속편에 해당하는 [파인드 미]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다. 그들의 그 이후에 대해.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사랑의 그 오묘함에 더 이상 현실이 개입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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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고양이 카페 - 손님은 고양이입니다
다카하시 유타 지음, 안소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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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에 계약직으로 일하던 출판사에서 정리해고 당하고 그나마 받던 실업수당도 조만간 끊겨 거리로 쫓겨나게 생긴 마시타 구루미. 잠시 산책길에 나섰다가 거센 비를 만나고, 이 와중에 강가에서 택배상자 안에 버려진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구출한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한 사람과 한 냥이를 발견하고 자신의 카페에 와서 몸을 말릴 것을 권유하는 구로키 하나씨. 남편과 둘이 운영했었지만 그 남편이 죽고나서는 마음 내킬 때만 문을 연다는 카페는, 마치 고전 프랑스 영화에 나올 법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마침 눈에 들어오는 점장 모집 문구. 곧 아들 내외에게 아이가 태어나서 아기도 돌봐줄 겸 함께 살기로 했기 때문에 대신 카페를 운영할 점장을 모집한다는 이야기에 구루미의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다음 날 용기 내어 다시 카페를 찾은 구루미 앞에 엄청난 미남자가 카페의 점장이라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갑자기 '나의 집사가 되어줘, 고양이 목걸이를 원해, 사육당하고 있다는 증표를 원해'같은 원인불명의 말을 꺼낸다. 알고보니 이 남자, 전날 구루미가 강가에서 구출해낸 바로 그 검은 고양이다!

 

해가 지면 사람으로 변하는 고양이 구로키 포. 하지만 피부에 사람의 몸이 닿으면 바로 고양이로 돌아가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금물이다. 하나씨를 어떻게 구슬려 놓았는지 두 사람은 이미 연인 사이로 둔갑, 둘이 함께 힘을 합쳐 카페 매상을 올릴 것을 결심한다. 그런데 기다리는 손님은 오지 않고, 정작 찾아온 손님들은 사람으로 변신한 다른 고양이들! 미소년(고양이)인 마게타와 거친 사나이의 매력을 풍기는 러시아(고양이) 남자 유리. 각자의 사연을 안고 카페를 찾은 매력적인 고양이들과 함께 과연 구루미는 이 가게를 지켜낼 수 있을까.

 

해가 지면 사람으로 변신하는 고양이라니! 게다가 사람이 되면 무조건 알몸이다. 그들은 자각하지 못하고 부끄러움은 온전히 구루미의 몫. 원래 주인이 스토킹을 당하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으니 자신의 집사가 되어달라는 마게타나, 주인인 유미씨가 주는 밥을 절대 먹지 않으려 하는 유리나, 갑자기 나타나 고양이 목걸이를 원한다고 시크하게 말하는 포나, 고양이에게는 고양이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 당장 자기 한 몸 건사하기 힘든 부족한 구루미지만 고양이들과 어울리며 있는 힘껏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그녀의 모습은 훈훈하게 다가오고, 시크한 미남자로 변신한 포와의 미묘한 분위기에 은근 로맨스를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포는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이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것인가!

 

마게타나 유리와 달리 포의 사정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아 그에게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궁금하다. 속편이 나올 것 같은 예감. 마치 한 편의 따스한 만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의 소설. 카페를 지키는 구루미와 고양이들의 이야기를 또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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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웨이 다운
제이슨 레이놀즈 지음, 황석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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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죽었다. 윌의 형 숀이. 총성이 들리고 소동이 끝난 후 고개를 든 순간 발견한, 쓰러져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숀. 숀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본 순간 윌은 지진을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지진이 일어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 땅이 갈라지고 자신을 집어삼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엄마가 쓸 습진 비누를 사러 길모퉁이 가게에 갔다가 죽어버린 숀. 윌은 8층 집으로 돌아와 숀과 자신이 쓰던 방, 숀의 서랍장 가운데 서랍에 들어있던 총을 챙겼다. 울지는 않는다. 그 지역 룰대로. 울지 않을 것, 밀고하지 않을 것, 복수할 것. 날이 밝고 숀을 죽인 범인이라고 확신하며 릭을 죽이기 위해 집을 나선다. 엘리베이터가 한층씩 내려갈 때마다 등장하는 죽은 사람들, 구멍난 사람들. 삼촌 마크, 아버지 마이키, 어릴 적 죽은 대니와 그 동네 룰을 숀에게 알려준 벅, 그리고 마지막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인물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그리고 마침내 멈춰선 엘리베이터.

무척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소설이라기보다 영화의 시나리오 같은 느낌. 한줄 한줄 읽어내려갈수록 예정된 장면들이 휘리릭 지나간다. 단어와 문장의 배치, 폰트 기울기, 굵기까지 치밀한 계획 하에 연출되어 있다. 원문을 들여다본다면 라임이라는 것이 살아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시적이고, 문장들이 음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이되 보통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은 그저 추측할 뿐이다. 숀과 윌이 사는 동네는 위험한 지역인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인지, 어떻게 그런 룰들이 전해져내려올 수 있었는지, 그들의 생존 이유는 무엇인지. 작가는 오직 현재, 지금 여기에만 집중해서 숀이 죽었고, 때문에 윌은 복수하러 간다는 간단한 설정 속에서 엘리베이터라는 환경을 접목시켜 독특한 전개를 보인다.

로비에 도착하는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지는 일을 영화처럼 선보였다. 읽는 내내 '영화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도니, 당연히 영화화가 확정되었을 수밖에. 이야기에 미친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복수하러 가는 소년 앞에 나타난 구멍난 사람들. 잘못된 복수의 목격담과 정말 소년 자신이 무엇을 하러 가는지 시험하는 듯한 아버지의 행동들은, 마치 지금 네가 하려는 일은 잊고 다시 집으로 올라가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외면당하는 것에 지친 젊은이들을 보는 것에 지쳤다는 작가. 이 작가가 궁금하다. 실험적이고 여백의 미가 매력적인 이런 작품도 좋지만, 만약 그가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장편을 쓴다면 어떤 내용들을 풀어놓을지 무척 기대된다. 25주 연속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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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퍼슨
크리스틴 루페니언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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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가 로버트를 만난 것은 가을학기가 끝나가던 어느 수요일 밤, 그녀가 일하는 예술영화 전용극장의 구내매점에서였다. 첫만남에서 마고가 로버트에게 살짝 끼를 부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팁을 받기 위한 수단이었고, 팁을 받지 못한다해도 그녀의 눈에 로버트는 귀여워보였다. 로버트는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으나 그 다음 주에 다시 극장을 찾은 것을 보면, 그 역시 마고에게 관심이 있지 않았을까. 영화가 끝나고 다시 찾아온 로버트는 마고의 전화번호를 얻어간다. 단순한 문자 메시까지 꿈꾼다. 스무 살인 마고와 서른 넷인 로버트. 사랑을 나누기 위해 그의 집에 들어가 벗은 로버트의 몸과 마주한 순간, 마고의 감정은 급격히 식어버리고, 그와 섹스하기로 한 것은 생애 최악의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관계 후 급하게 그의 집을 나선 마고는 계속되는 로버트의 연락에 곤혹스럽기만 하고, 그에게 이별을 통고하기를 망설이는 마고 대신 룸메이트가 '안녕, 당신한테 관심없어. 이제 나한테 문자 메시지 보내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송해버린다. 당황스러우면서도 홀가분함을 느끼는 마고. 얼마 후 친구들과 찾은 술집에서 로버트의 모습을 발견하고, 간신히 그를 피하지만, 그날 밤 로버트로부터 여러 통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그 중 하나에서 그는 그녀를 창녀라 부르고 있었다.

 

단순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작가는 이 짧은 소설을 통해 남녀 사이의 오묘한 심리를 그려내고 있다. 호감을 느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며 갖는 설렘, 어느 새 꿈꾸게 되는 미래를 넘어 데이트 도중 여성이 느끼는 불안-내가 이 남자를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인가, 그는 나를 지금 어디로 데려가는 것인가, 그가 혹시 연쇄살인범이나 성폭행범은 아닐까 -, 벗은 남자의 신체를 보고 꺼져버리는 감정, 어느 새 남자의 집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고의 심리를 보면서 '대체 이 여자 뭐야?'할 수도 있겠다. 심지어 마고는 로버트의 집에 순순히 따라가고 그와 섹스하고싶다는 신호를 보내기까지 했으니까. 그녀의 이별 방식이 친구에 의해 어쩌다보니 저질러진 일이라고는 해도 사실 무척 예의없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잠깐이었다 해도 로버트에게 호감을 느꼈고, 사랑한다고까지 생각했고, 로버트에게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으니 단순히 그의 착각이라 할 수는 없겠다. 이별할 때 잠수타거나, 상대에게 이별의 말이 나오도록 종용하는 사람 정말 싫어하는데, 친구의 방식에 편승해 그런 방법으로 이별을 택한 마고는 비겁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렇게 순식간에 마음이 변해버린 마고를 이해할 수 있냐고 물으면, 이해는 할 수 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이해는 된다. 나도 갸우뚱.

 

‘캣퍼슨(cat person)’은 고양이를 좋아하거나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로버트는 자신이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사는 ‘캣퍼슨’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의 집에 갔을 때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마고는 문득 그가 지금까지 한 말이 모두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실, 고양이는 다른 방에 있었을 뿐이고 로버트는 정말로 캣퍼슨이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마고의 불안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며 이 불안은 ‘아는 사람만 아는’ 종류의 것이다. 어쩌면 이 불안이 로버트를 향한 마고의 감정이 사그라드는 데 일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상징과 심리묘사로 가득찬 이 이야기. 쉽지 않았다.

 

[캣퍼슨]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 대부분이 가볍지 않다. 읽다가 머리가 멍-해지는 작품들이 많다. <캣퍼슨>의 거울상과도 같은, 남자의 시점으로 쓰인 소설도 있고(<좋은 남자>), 동화처럼 시작해 순식간에 장르를 비틀어버리기도 하며(<거울,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성 반전 시킨 듯한 작품(<겁먹다>), 직장 내 성추행 문제와 맞물려 통쾌한 재미를 선사하는 소설도 있다(<무는 여자>). <거울, 양동이, 오래된 넓적다리뼈>에서는 기괴함과 오싹함을 느낄 수 있고, <정어리>에서는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 환상인지 의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장르의 소설은 아니기에 어째서 이 작품들이 이리 인기가 많았는지 초반에는 의문이었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아리송. 하지만 문학이라는 것이 내가 좋다고 남들도 좋아하고, 내가 싫어한다고 남들도 싫어하는 세계가 아니지 않은가. 곱씹을수록 왠지 선 하나만 넘으면 작가의 팬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 한 권의 작품집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만큼, 작가가 선보일 장편소설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그 뒤로 미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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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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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섯 소녀가 납치된다! 아직 십대지만 뱃속에 아기를 품고 있는 여자아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누구라도 비명을 지르며 패닉에 빠질 법한 상황이지만 이 소녀는 당황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 정확히 초를 세며 가늠하고, 납치되어 감금된 33일동안 치밀하게 복수할 계획을 세운다. 소녀를 보러 오는 사람은 간수와 의사와 '물으나마나' 부부. 일주일에 한 번씩은 요리를 하러 누군가가 찾아오지만 그들이 소녀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하다. 바로 소녀의 몸안에서 태어날 날을 기다리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아기. 의사는 소녀의 몸상태를 측정하고 분만에 도움을 주기 위해, '물으나마나' 부부는 태어난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다. 폭력적이고 모자라보이는 간수 외에도 그와 똑닮았으나 사이코같은 쌍둥이 브레드도 한 팀이다.

 

이쯤되면 과연 이 소녀는 대체 어떤 인물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짐작한대로 보통 아이들과는 조금 다르다. 자신의 감정을 켰다 껐다하며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범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여 그의 심리를 파악하고는, 단번에 상황을 제압헀다. 그런 소녀였기에 주어진 환경 속에서 복수할 도구들을 물색하며 면밀히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소녀가 아니라 납치범들이다! 그리고 마침내 복수의 날이 밝았다!

 

피해자의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주도면밀한 계획과 그 실행으로 작품이 꽉꽉 채워져 있다. 제목인 [복수해 기억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납치된 소녀가 복수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과정, 복수의 실행이다. 자신의 감정을 손쉽게 컨트롤하는 주인공이라 담담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누구라도 까무러칠 상황이지 않은가. 더구나 간수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녀가 어떻게 될 지, 이미 살해당한 다른 소녀를 보여주며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기민한 관찰력과 영특함, 감정조절 능력이 아니었다면 아마 소녀도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새우다 다른 소녀들처럼 살해당하지 않았을까. 독자들은 과연 그녀가 납치범들에게 어떻게 복수할 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어마무시 잔혹한 복수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정된 상황에서의 복수였기 때문인지 간수에 대한 복수가 전해주는 카타르시스가 기대보다 약하게 느껴졌다. 분명 뒤에 뭐가 더 있지 않을까-라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마구 넘겼지만 의사에게도, '물으나마나' 부부에게도 가해지는 복수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아주 정의(?)롭게 행해지는 탓에 다소 김이 새는 느낌이랄까. 소녀는 브레드에게조차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데 어쩌면 그 편이 브레드 개인에게는 더 잔혹한 형벌일 수 있겠지만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답답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내가 그 동안 너무 피철철 스릴러에 노출된 탓인가!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소녀가 계획을 세우는 과정 하나하나의 치밀함은 눈여겨볼만 하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섀넌 커크. 일단 다음 작품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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