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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겨울
아들린 디외도네 지음, 박경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평점 :
품절
폭력적인 아버지와 무기력한 어머니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집이었지만 괜찮았다. 소녀에게는 동생 질이 있었으니까. 순진하고 아름답고 밤에 나의 품을 파고들며 잠드는 사랑하는 질. 그것만이 행복이었고 오직 이 집에서 버티게 해주는 생명줄 같은 것이었다. 그런 끈이, 어느 날 툭 끊어진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사고로 반쪽이 날아가는 것을 바로 눈 앞에서 목격하면서 질 안에 있던 어떤 것이 무너지고, 또 다른 무엇에 잠식당해갔다. 아버지에게도 존재하는 하이에나의 본능. 약한 것을 때리고 괴롭히며 그 마지막 숨결을 빼앗는 것을 즐기는 잔인함이, 질의 몸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나는 타임머신을 개발해야 한다. 사고가 있기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질을 빼앗길 수 없으니까.
소녀를 무너지지 않게 해주는 것은 과학에 대한 열망, 질을 향한 희망, 그리고 소녀에서 여인이 되어가는 몸의 변화로 인한 열정이었다. 비록 마을에서 고양이와 개가 점점 사라지면서 질은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처럼 변해버렸고, 아버지의 폭력은 계속되었으며, 어머니는 여전히 그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지만 그런 열정들이 없었다면 소녀는 이미 망가지거나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 남자를 향한 욕망. 아버지가 자신을 먹잇감으로 삼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 밤에 피어난 전사로서의 투지. 소녀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하며 이제 울지 않겠다고, 저항하겠다고 생각해본다.
가족 사이에 만연하게 된 폭력으로 의지할 사람이 두 사람 뿐이었던 아이들이, 한 아이의 변화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계기를 얻는다. 이 작품은 내가 그 동안 읽어왔던 성장소설들과는 결이 다르다. 지금까지의 성장소설들이 외부 환경에 기반한 아이의 내적 성찰에 초점을 둔 것이 대부분이었다면, 이 작품은 차라리 스릴러에 가깝다. 아버지의 폭력과 우연한 사고를 계기로 잔인함에 눈을 뜬 동생. 그 두 사람에게 당하지 않는 한편, 동생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누나의 모습은 여전사, 딱 그것이었다. 이 소녀가 열다섯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놀라움을 선사하지만, 불행한 가정환경이 일찍부터 소녀를 눈뜨게 만든 게 아니었을까. 그 모든 가혹한 시간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어디이고 무엇을 해야하는 지 결정한 그녀의 의지와 동생을 향한 사랑은 놀랍고 안타까우면서 기특하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여름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마음과 그들이 사는 집은 내내 겨울이었으리라. 혹독한 칼바람이 불고, 포근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기가 감도는 집. 이제 소녀가 계절을 있는 그대로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여름을 겨울이라 여기지 않고, 혼자서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열다섯은 마냥 행복하기만 해도 되는 나이, 아무 생각 없이 인생의 감미로움을 느껴도 되는 나이다. 세상의 모든 아이가, 폭력 앞에 더 이상 노출되지 않고, 따뜻한 봄, 무더운 여름, 풍성한 가을, 춥지만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겨울을 마주하게 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