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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체이스 (10만 부 기념 특별 에디션) ㅣ 설산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2월
평점 :

이상하게도 스포츠를 소재로 한 책은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그것이 추리소설이라 하더라도. 경기 규칙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약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다고 지금까지 그런 책을 한 편도 읽지 않은 것은 아니고, 또 읽다보면 감동과 가슴 벅참을 느끼기도 해서 가끔 읽기도 하지만 역시나 다른 책들에 비해서는 읽는 비율이 높은 편은 아니다.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서도 읽지 않은 작품은 거의 스포츠 소재. 그럼에도 [눈보라 체이스]를 읽기 시작한 이유는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 때문이다. 이 분, 어느 새 나에게 이렇게 신뢰를 주는 작가가 되었다!!
10만 부 기념 특별 에디션으로 제작된 [눈보라 체이스]는 일본 독서미터 1위를 차지한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설산 시리즈 중에서도 최고 인기작으로 꼽힌다. 사건의 주인공은 와키사카 다쓰미. 대학 4학년생으로 한겨울 보드를 즐기는 그는, 금지구역 안의 설질을 맛보기 위해 겁없이 뛰어든다. 그 곳에서 만난 절세 미녀!! (캬캬!!) 홀로 사진을 찍는 그녀에게 다가가 대신 사진을 찍어주면서 작업을 걸어볼까 잠시 고민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여신님'은 감사 인사를 남기고 훌쩍 보드에 올라 내려가버리고 만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다쓰미. 그는 아직 자신에게 큰 일이 닥쳤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 무렵 도쿄에서는 후쿠마루 진키치라는 노인이 살해되었다. 문제는 그 후쿠마루 노인의 집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아르바이트를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다쓰미라는 것. 경찰은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본 데다, 여기에 경찰 내부의 권력 싸움이 더해져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수사가 이루어진다. 담당 형사들 중에서도 거의 말단인 고스기는 직속 상사인 난바라의 성화에 못 이겨 어딘가 미심쩍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쓰미의 뒤를 쫓기 시작하고, 자신이 심각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게 된 다쓰미는 친구인 나미카와의 도움으로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여신님'을 찾아 사토자와 온천스키장으로 향한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답게 가독성은 최고!! 이런 저런 용어들이 초반에 등장해서 잠시 머리가 핑 돌기는 했지만, 그래도 옆지기를 따라 보드를 타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장면을 그려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 게다가 다쓰미는 쫓기고 있는 주제에 어딘가 태평한 구석이 있는데, 그런 모습이 한심해보이면서도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해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음이 무거운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다쓰미 친구 나미카와가 아니었을까. '여신님'을 찾으러 온 미션도 잊을 정도로 사토자와 온천스키장의 설질을 보고 눈을 반짝이거나,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잠을 자고 있는 다쓰미를 바라보는 나미카와의 눈빛이 나에게도 번뜩이는 것 같아 낄낄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또 결코 가벼운 소설만은 아니다. 다쓰미와 나미카와의 뒤를 쫓아온 고스기에게 일침을 가하는 여관 주인 유키코의 기백 있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울리는 작품이기도 했다.
고스기 씨 역시 아무 야심도 없이 경찰관이 된 건 아니잖아요. 경찰 조직이 어떤 것인지 나는 짐작도 못 하겠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못 할 만큼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는 곳인가요? 장기 말이라고 그저 하라는 대로 움직이기만 해도 되나요? 때로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 움직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결과, 한 방 크게 역전의 공을 세워버리면 진짜로 속이 시원할걸요?
p 309
어떻게든 공을 세워보고자 다쓰미를 범인으로 몰아가려는 상사와는 달리 차분히 다쓰미의 이야기의 들어주려는 고스기 뒤에는 바로 유키코가 있었다. 비록 살인사건이 벌어졌고 용의자를 쫓고 있는 상황일지라도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잃지 않으려는 고스기의 시선. 그것은 어쩌면 작가 자신의 시선이지 않을까. 잔혹하게 여겨지는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지만, 그 안에서 항상 빛나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장 큰 매력은 아마도 인간을 향한 그런 신뢰와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여신님'을 찾기까지 고생한 다쓰미와 나미카와. 그녀의 정체가 의외로 빨리 밝혀지지 않아 안달이 나기도 했지만 사건은 무사히 종결된다. 과연 후쿠마루 영감님을 살해한 진범은 누구였을까??!! 태평한 다쓰미는 오늘도 보드에 올라 내달린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니 얼마 되지 않은 실력이지만 나도 보드를 다시 타볼까 하는 생각이 살짝, 아주 살짝 고개를 쳐든다.
한겨울 눈의 냄새와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느낌이 생생히 살아있는 [눈보라 체이스]. 겨울에 읽어서 더 생생하게 다가왔던 작품이었다. 이 겨울이 지나가기 전에 이벤트로 선물받은 [백은의 잭]도 한 번 도전해봐야겠다!! 설산시리즈는 역시 겨울에 읽어야 제 맛일테니까!!
** 출판사 <소미미디어>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