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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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커플이 모텔에 들어가고 잠시 후, 여자가 달려내려옵니다. 남자친구가 젤리를 먹다 목에 걸렸다며 도움을 요청, 남자는 병원으로 실려가지만 결국 보름 후 숨을 거두고 말아요. 평범한 커플의 안타까운 사고 정도로 잊혀질 수 있었던 일이, 여자가 남자친구의 이름으로 보험에 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여자가 수령한 돈은 무려 5억원. 유가족은 피해자인 남자와 여자의 사이가 평소 좋지 않았고,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했으며, 특히 남자는 치아가 좋지 않아 단 음식을 멀리했다며 그가 살해당했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가족을 끔찍히 사랑했던 그가 가족이 아닌 여자친구를 보험수령인으로 할 리가 없다면서요. 반면 여자는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든간에 자신은 남자친구를 사랑했으며, 그에게 가족력이 있어 건강이 걱정되는 마음에 보험을 들어놓았던 것이라고 고집하죠. 누가 봐도 여자의 범행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가운데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고, 판사들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고심하게 됩니다.

제가 접하는 도진기 작가의 첫 작품입니다.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되었고, 2010년 단편소설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고 해요. 주중에는 판사로, 주말에는 작품을 집필하던 그는 [붉은 집 살인사건],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정신자살], [악마의 증명] 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2017년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를 마지막으로 공직을 떠나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는, 엄청난 이력을 자랑하는 작가님입니다. 읽어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국내 추리소설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 저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그의 작품을 이제서야 만나게 되었네요. 다른 작품들의 성향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합리적 의심]은 도진기 작가의 첫 본격 법정물이라고 하니 기대가 컸습니다. 법정에서의 날선 공방, 그 팽팽한 긴장감과 상대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한 설전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 지 궁금했는데요, 공기가 부풀어 터질 것 같은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변호사나 검사가 아닌 판사의 눈으로 바라본 사건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감히 짐작해봅니다.

판사인 '나'는 그녀, 김유선의 유죄를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로 분노마저 느끼고 있죠. 배석판사들과 그녀의 유죄를 확실히 하기 위해 회의를 열지만 그들은 '합리적 의심'이라는 명제를 들며 그녀의 유죄를 반대합니다. 특히 이제 2년 차인 민지욱은 부장판사인 나의 의견에 조금도 지지 않은 채 한 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이기까지 합니다. 결국 그들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나는, 법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마는데요, 그 판결에 피고인인 김유선은 '수고하셨습니다!'를 크게 외치며 밝은 얼굴로 퇴정해요. 그 후 벌어진 또 한 건의 살인사건. 나와 김유선과 죽은 남자의 가족이 묘하게 얽히며 사건은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것은 변호사나 검사입니다. 그들이 자아내는 어떤 긴장감은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응원하는 편이 이기기라도 하면 '해냈다!'와 같은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하기 때문일 거에요. 그에 반해 판사들의 세계를 그린 작품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적었는데요, 작년 종영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는 정말 재미있게 봐서인지 판사들의 세계가 무척 궁금했어요. [합리적 의심]은 드라마틱한 모습들보다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판사들이 보내는 일상,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건, 판결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조금 답답하다고 느껴질정도의 일상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그들 각자의 마음 속에도 타인에게 쉽게 내보일 수 없는 격랑의 물결이 존재했던 거겠죠. '인간'이기보다는 '판사'이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선택, 그 선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누군가의 또 다른 선택은 과연 옳았던 것인가, 복잡한 마음이었어요. 특히 작가 자신이 판사로 재직했었기 때문에 작품이 더 현실감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적인 감정이 결여된 사람이 많다는 것, 억울한 죽음이 몇 번이나 발생한다는 것이 새삼 무척 가슴 아팠습니다.그런 그들을 사건의 한가운데서 바라보아야 하고,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일이 보통이 아니구나 실감했어요. 다음 법정물은 어떤 모습으로 발표될 지, 한 번 더 판사들의 세계를 보여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다만, 작품 속 '나'가 죽은 아내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젊은 직원을 바라보는 개인적인 시선들은 조금 불편했습니다. 꼭 필요한 장면이었나 싶을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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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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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가 케빈으로부터 '살아남은' 그 후. 마을은 여전히 그녀에게 잔인하고, 사람들은 그녀 뿐만 아니라 페테르손 가족 전부에게 잔혹하다. 스타 플레이어였던 케빈이 마을을 떠난 후 베어타운의 하키팀은 더 이상 명맥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위기에 빠졌고, 마야의 편에 서서 그녀를 옹호했던 아맛과 벤야민, 하키만이 구원의 밧줄이었던 이들에게도 어두운 시간이 지나간다. 마야의 아버지이자 하키팀의 단장인 페테르 안데르손에게 정치인인 리샤르드 테오가 거래를 제안하고, 평생동안 하키가 전부였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그가 내민 손을 잡지만, 그도 알 수가 없다. 이 선택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검은 구덩이로 빠지는 길인지. 아맛은 하키를 할 수 없어 절망하고, 벤이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갈등하고, 누군가는 죽음으로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그런 계절. 베어타운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생존자야, 아나. 생존자. 우리는 생존자야.

'하키'라는 운동이 내 눈을 가렸었다. 별로 관심 없었던 운동종목이라 단순히 하키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고 [베어타운]을 건너뛰었다. 이럴 수가. [베어타운]을 먼저 읽지 않았어도 [우리와 당신들]을 이해하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베어타운]을 먼저 읽었다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아니다.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 지금도 이렇게 그들의 함성이, 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오는데 [베어타운]을 읽었었다면 난 아마 한참동안 이 프레드릭 배크만이라는 작가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면서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세상에나. 어떻게 이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거지. 가만. 베어타운이 실제로 존재하는 마을인 거 아냐. 이게 전부 소설이라니, 믿을 수 없어! 나는 이제 그만, 프레드릭 배크만이라는 마법에 풍덩 빠져버렸다.

 

하키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로 이루어진 베어타운. 그 안에 인간의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분노와 증오, 용서와 화해가 전부 들어있다.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고, 금방이라도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 것처럼 굴지만, 언제나 자신이 먼저다. 타인을 비방하고, 조롱하고, 상처주는 것에 거리낌없이 동참하는 것이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이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거라고 이야기하고, 덕분에 흠씬 매를 맞고, 누군가의 죽음으로 전쟁같았던 서로의 관계가 잠시 휴전을 맺고, 말없이 망가진 지붕을 고쳐주고, 불길 속에 뛰어들어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타인의 실수를 용서하는 것 또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매력적인 것이다. 이 삶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 어떤 난관을 만나도 뛰어넘고 어쩔 수 없더라도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결국에는 우리 모두 생존자다.

 

우리이이는 고오오오옴!

우리이이는 고오오오옴!

우리는 고오오오옴!

...

인간의 다채로운 모습을 그리는 작가의 실력이 놀랍다. 등장하는 인물 하나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능력, 입체적인 캐릭터, 자신의 다름을 인정하는 쪽지에서조차 완전한 기쁨을 누릴 수 없는 현실적인 모습을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위해 어디까지 보여주고 희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린 이 작품에 나는 아주 녹아버렸다. 공평하지만 공평하지않은 세상 속에서 매 순간 울컥했고, 마지막 100페이지 즈음부터는 그저 줄줄 울면서, 책장을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읽었다. 이런 이야기를 또 만날 수 있을까. 1월 초에 조디 피코의 [작지만 위대한 일들]을 읽으면서 이 작품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었는데, 안되겠다. 그 자리는 이번에 [우리와 당신들]에 내어주어야겠다. 매 페이지, 매 장마다 주옥같은 대사와 장면이 넘쳐나서 나의 비루한 글쓰기로 기록을 남긴다는 게 힘이 든다.

 

여운이 너무 짙다. 심지어는 자면서도 생각난다. 우리는 생존자라고 말하는 마야의 목소리, 헤드의 응원단이 외치던 '우리는 베어타운의 곰!'이라고 외치던 그 장면이. 프레드릭 배크만이라는 작가를 이제서야 만나게 되어 커다란 즐거움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너무너무 아쉽지만, 아직 읽지 않은 그의 국내 출간작이 남아 있어 한편으로는 가슴 벅차게 기쁘다. 앞으로 최애 작가님 중 하나로 모시겠습니다. 당신의 팬이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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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세계 미술관
이유민 지음, 김초혜 그림 / 이종주니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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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곰돌군들에게 바라는 것 중 하나는, 명화와 클래식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욕심일까요. 흐흣. 정통하지는 못해도 어떤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듣고 누구의 무엇이다 정도는 알아줬으면 하는 것.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명화와 클래식을 즐기게 되면 관련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자연히 여러 분야로 시각이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정통하지는 못해도 명화와 클래식을 좋아해요. 곰돌군들을 임신했을 때는 일부러 클래식을 더 많이 찾아 듣기도 했고요. 집에는 모 출판사의 <돌잡이명화> 전집이 있는데, 여러 그림들을 소개하면서도 아기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런저런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어 첫째 곰돌군이 자주 보는 편입니다. 특히 클래식 음악이 약간 들어있는 책을 좋아하는데 명화와 클래식을 같이 접할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할까요. 명화와 클래식을 즐기는 멋진 청년. 아들 있는 엄마들의 로망아닐까요, 라고 감히 말해봅니다요.

그리하여. 이 [어린이를 위한 세계 미술관] 책에 끌린 것입니다. 둘째 곰돌군은 고사하고, 첫째 곰돌군에게도 아직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인 것 같긴 하지만, 무엇보다 명화들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화가의 이름은 물론 배경지식도 간단하게나마 설명되어 있어 찬찬히 넘겨보면서 읽기에 참 좋았습니다. 게다가 곰돌군이 좋아하는 동물 중 하나인 고양이가 등장! 요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니 곰돌군이 눈이 초롱초롱해지며 '엄마, 야옹이야!'하며 손가락으로 짚어보기도 했어요.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독일, 스페인과 러시아, 미국까지 총 9개 나라의 24 곳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다양한 그림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프랑스 하면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하면 모나리자죠. 곰돌군이 읽는 영아수학동화 중에 미술관 관련 책이 있는데 그 책에도 모나리자 그림이 등장해요. 자주 읽는 책이라 기억이 났는지 '엄마! 이거!'라며 아는 척을 합니다. 이렇게 다른 책과도 연계해서 읽을 수 있어 저는 뿌듯하더라고요.

어린이를 위한 책이라 다른 미술관 책이나 명화 관련 도서와는 달리 쉽게 쓰여져있기는 하지만 어른이 읽어도 매우 좋은 책입니다. 그림들이 페이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글밥의 수가 적어 명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 혹은 접해보기는 했지만 어쩐지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이 들어 멀리하고 있던 사람이 읽는다면 어느새 명화의 세계로 빠져든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에요. 이 책에 소개된 여러 미술관의 다양한 그림들을 보니 곰돌군들과 여행을 계획하고 싶어집니다. 집에서 함께 명화 관련 책을 열심히 읽다가, 곰돌군들이 초등학생 정도 되면 이 책에 있는 미술관들을 탐방해야겠습니다. 곰돌군들이 부디 즐거워해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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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엄마 - 세 아들 모두 스탠퍼드에 보낸 스탠퍼드 출신 엄마의 자녀 교육법 50가지
천 메이링 지음, 강초아 옮김 / 서교출판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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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세 아들을 모두 스탠퍼드 대학교에 보냈다는 문구 때문이었다. 스탠퍼드처럼 구체적으로 대학 명칭까지 생각해본 것은 아니어도 나는 내심 우리 곰돌군들이 공부를 한다면, 이왕이면 좀 잘해서 외국에 있는 대학에 다녔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늘 남편에게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 받고 외국에 있는 대학에 다닐거야. 그러니 걱정마'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남편은 그 말을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듣는 상황. 물론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못해도 상관없다. 자신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어디서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무척 감사할 따름이다. 외국에 있는 대학에 다니면 좋겠다-는 것은 단지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이 개입된 희망일 뿐, 희망은 희망으로 남겨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엄마로서 세 아들을 모두 스탠퍼드 대학에 입학시켰다는데, 그 방법이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이 엄마 또한 스탠퍼드 출신이었다는 것. 게다가 세 아들은 모두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해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힘이 빠졌다. 어떤 조건이든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나의 기준에서의-평범한 가정의 세 아들 교육 이야기였다. 홍콩 출신인 한 여인이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낳은 세 아들들이 기본 교육과정이나 혹은 그녀만의 특별한 노하우로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했다는, 그런 이상적인 이야기. 물론 저자 또한 50가지 교육법을 제시하고는 있으나 그녀의 집안이 평범하지는 않지 않나. 그녀 또한 홍콩에서 태어났지만 가수로 활동하다가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했고, 현재 가수 겸 방송인으로 활동하면서 유니세프 아시아 홍보대사를 역임하기도 하는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일본의 조치 대학과 캐나다의 트렌토 대학까지 졸업한 인재가 낳은 아들들 또한 인재였던 것이다!

 

내 마음이 비뚤어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읽기 시작한 책이라 그런지 그녀가 제시한 50가지 교육법은 크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다만 <다툰 뒤에는 정면으로 소통하자>는 챕터에서 큰아들과의 대화가 마음에 걸려 중요한 회의를 뒤로 하고 아들의 기숙사를 먼저 찾은 이야기에는 공감했다. 나도 평소에 아이들에게 잘못했을 때 마음 속 깊이 미안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엄마가 되자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의, 바쁜 와중에 모유수유를 했다거나 냉동식품이나 패스트푸드를 만들지 않고 세 아들의 체질을 따져 늘 음식을 준비했다는 일화조차 심한 자기자랑처럼 다가왔다. 사정이 안되서 모유수유를 못하는 엄마들도 많고, 일상에 치여 살고 있지만 요리하는 시간보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어 끼니는 간단하게 때우기도 한다는 엄마들도 있다. 읽는 사람마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겠지만, 저자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너무 자기과시처럼 보여 무척 불편했다. 다른 독자들은 어떤 시각에서 읽었을지 궁금하지만, 음, 글쎄 내가 이 책을 다시 들여다 볼 일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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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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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작품 외의 개인정보가 베일에 가려진 작가. '후지마루'라는 단 네 글자만 무심히 툭 내세워 발표한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은 일본에서 20만부가 팔리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보다도 우리나라에서는 [내일 나는 죽고 너는 되살아난다]라는 소설이 먼저 발표되었는데요, 저의 기준에 한참 못미치는 표지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미 절판되었더라고요.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같은 작품이라면 인기가 없었을 리가 없는데 뭔가 아주 아쉬운 기분이에요. 그만큼 읽는 동안 내내 저는 이 작품 속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이 아르바이트는 최악이지.

시간 외 수당은 안 나와.

교통비도 없어.

아무렇지도 않게 이른 아침부터 불러내지.

게다가 유령 같은 '사자(死者)'를 저 세상으로 보낸다는 상식 밖의 일을 시켜.

무엇보다 시급이 300엔이야.

300엔이라고.

어이없는 수준을 넘어서 웃음이 날 정도지.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너한테 이 아르바이트를 추천할게"

"알아주었으면 해. 이 세상에 멋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

흩날리다 사라지는 눈 같은 이야기.

 

어느 날 현관 앞에 나타나 느닷없이 사신으로 채용하겠다는 말을 듣는 사쿠라. 눈 앞에는 동급생 하나모리 유키가 서 있습니다. 시급 300엔에 시간 외 수당도 없고 근무 스케줄 조정도 어려운, 이 사신이라는 아르바이트. 하나모리의 말에 황당해하면서도 사쿠라는 어떤 일에 대한 매듭을 짓기 위해 사신 일을 받아들입니다. 그가 맡은 첫 번째 임무는 예전에 교제했던 아사쓰키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 그녀는 입원한 동생에게 언니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을 사과하고 늘 고마웠다는 마음을 전달해 소원해진 사이를 회복하고 싶다고 말해요. 아사쓰키가 동생의 병원을 다녀온 그 날 밤, 오랜만에 사쿠라와 아사쓰키는 대화를 나누고, 하나모리는 '오늘 밤을 소중하게 간직하라'며 자리를 비켜줍니다. 그리고 찾아온 깨달음. 그 날 이후 사쿠라의 본격적인 사신 아르바이트가 시작됩니다.

 

가벼운 라이트노벨이라 생각해 읽기 시작한 소설. '일상의 소중함'을 주제로 하는, 그저 그런 진부한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읽어가는 동안 흐트러져있던 자세를 바로 하게 되었고, 어느새 가슴을 짓누르는 감동과 고통에 눈물이 났습니다. 사쿠라와 하나모리는 사신 일을 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요. 잃어버린 지갑을 찾고자 그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구로사키, 아기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히로오카, 엄마에게 학대당해 목숨을 잃은 시노미야 유.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다 한 후 사자로서의 새롭지만 가상의 세계에서 살게 된 그들은,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거나 반성하며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자리잡은 하나모리의 비밀. 6개월이면 사신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그 동안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는 사쿠라에게, 일생일대의,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일들이 벌어져요.

 

이 작품에 제가 더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엄마로서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에피소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히로오카가 가진 미련은, 같은 여자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가상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100%의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섞인 감정이라는 자각 속에서 그녀는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아들을 향한 사랑을, 가상의 시간이 지나가면, 어린 아들은 기억조차 못할 거라는 현실에 제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학대당한 시노미야 유의 사연은 지금 저의 행동들을 돌아보게 해주었어요. 교사인 유의 엄마, 스트레스에 취약한 유의 엄마, 스트레스를 유에게만 푸는 유의 엄마. 요즘 첫째 곰돌군에게 화를 내는 일이 늘었는데, 혹시 이것이 나의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푸는 것이 아닌가, 가벼운 엉덩이 팡팡이 언젠가 심각한 폭력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드러나는 하나모리의 비밀은, 정말, 엄마로서 산다는 것, 아이가 나라는 사람을 엄마로 두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부분까지 생각하게 해주었죠. 읽는 내내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진부하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반복되는 일상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육아에 지치고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 같아 문득문득 힘에 부치더라도 사랑하는 남편과 아기들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 아침에 헤어진 가족이 저녁시간이면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이 소중한 시간들을 헛되이 쓰지 않도록, 매일매일 마음을 다잡으며 살아야겠어요.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마음 깊이 느끼고 생각하게 해준 이야기. 후지마루 작가의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추가시간을 통해 '사자'는 미련을 풀 방도가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

그러고 나서야 '사자'는 비로소 청산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조그마한 행복을 찾아내는 청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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