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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ㅣ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평점 :
이름과 작품 외의 개인정보가 베일에 가려진 작가. '후지마루'라는 단 네 글자만 무심히 툭 내세워 발표한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은 일본에서 20만부가 팔리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보다도 우리나라에서는 [내일 나는 죽고 너는 되살아난다]라는
소설이 먼저 발표되었는데요, 저의 기준에 한참 못미치는 표지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미 절판되었더라고요.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같은 작품이라면
인기가 없었을 리가 없는데 뭔가 아주 아쉬운 기분이에요. 그만큼 읽는 동안 내내 저는 이 작품 속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이 아르바이트는 최악이지.
시간 외 수당은 안 나와.
교통비도 없어.
아무렇지도 않게 이른 아침부터 불러내지.
게다가 유령 같은 '사자(死者)'를 저 세상으로 보낸다는 상식 밖의 일을 시켜.
무엇보다 시급이 300엔이야.
300엔이라고.
어이없는 수준을 넘어서 웃음이 날 정도지.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너한테 이 아르바이트를 추천할게"
"알아주었으면 해. 이 세상에 멋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
흩날리다 사라지는 눈 같은 이야기.
어느 날 현관 앞에 나타나 느닷없이 사신으로 채용하겠다는 말을 듣는 사쿠라. 눈 앞에는 동급생 하나모리 유키가 서 있습니다.
시급 300엔에 시간 외 수당도 없고 근무 스케줄 조정도 어려운, 이 사신이라는 아르바이트. 하나모리의 말에 황당해하면서도 사쿠라는 어떤 일에
대한 매듭을 짓기 위해 사신 일을 받아들입니다. 그가 맡은 첫 번째 임무는 예전에 교제했던 아사쓰키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 그녀는 입원한
동생에게 언니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을 사과하고 늘 고마웠다는 마음을 전달해 소원해진 사이를 회복하고 싶다고 말해요. 아사쓰키가 동생의 병원을
다녀온 그 날 밤, 오랜만에 사쿠라와 아사쓰키는 대화를 나누고, 하나모리는 '오늘 밤을 소중하게 간직하라'며 자리를 비켜줍니다. 그리고 찾아온
깨달음. 그 날 이후 사쿠라의 본격적인 사신 아르바이트가 시작됩니다.
가벼운 라이트노벨이라 생각해 읽기 시작한 소설. '일상의 소중함'을 주제로 하는, 그저 그런 진부한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읽어가는 동안 흐트러져있던 자세를 바로 하게 되었고, 어느새 가슴을 짓누르는 감동과 고통에 눈물이 났습니다. 사쿠라와 하나모리는 사신
일을 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요. 잃어버린 지갑을 찾고자 그들을 하인처럼 부리는 구로사키, 아기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히로오카, 엄마에게 학대당해
목숨을 잃은 시노미야 유.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다 한 후 사자로서의 새롭지만 가상의 세계에서 살게 된 그들은,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거나
반성하며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끝에 자리잡은 하나모리의 비밀. 6개월이면 사신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그 동안의 기억은 모두 사라지는
사쿠라에게, 일생일대의,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일들이 벌어져요.
이 작품에 제가 더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엄마로서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에피소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 히로오카가 가진 미련은, 같은 여자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가상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100%의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섞인 감정이라는 자각 속에서 그녀는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아들을 향한 사랑을,
가상의 시간이 지나가면, 어린 아들은 기억조차 못할 거라는 현실에 제 마음이 미어졌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학대당한 시노미야 유의 사연은 지금
저의 행동들을 돌아보게 해주었어요. 교사인 유의 엄마, 스트레스에 취약한 유의 엄마, 스트레스를 유에게만 푸는 유의 엄마. 요즘 첫째 곰돌군에게
화를 내는 일이 늘었는데, 혹시 이것이 나의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푸는 것이 아닌가, 가벼운 엉덩이 팡팡이 언젠가 심각한 폭력을 초래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드러나는 하나모리의 비밀은, 정말, 엄마로서 산다는 것, 아이가 나라는 사람을 엄마로 두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부분까지 생각하게 해주었죠. 읽는 내내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진부하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반복되는 일상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육아에 지치고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 같아
문득문득 힘에 부치더라도 사랑하는 남편과 아기들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 아침에 헤어진 가족이 저녁시간이면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이 소중한 시간들을 헛되이 쓰지 않도록, 매일매일 마음을 다잡으며 살아야겠어요.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마음 깊이 느끼고
생각하게 해준 이야기. 후지마루 작가의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추가시간을 통해 '사자'는 미련을 풀 방도가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
그러고 나서야 '사자'는 비로소 청산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조그마한 행복을 찾아내는 청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