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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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밀려오는 안타까움과 분함에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폭행과 살인이라는 더러운 범죄와, 살해당한 딸의 복수를 위해 피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혼재되어 속이 메스꺼워졌다.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데 있어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법이겠지만 지금은 그 법과 사법체계라는 것이 장애물처럼만 느껴진다. 정의라는 이름 아래 공명정대하게 휘둘러져야 할 그 칼날이 과연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정의의 칼날이라는 것을 한치의 의심없이 순순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나가미네는 딸을 잃었다. 아내를 잃고 홀로 애지중지하며 키워온 소중한 보물같은 딸을. 어쩌면 그 딸이 사고나 병으로 죽었다면 한동안 무척 슬프고 괴로웠겠지만, 나가미네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딸과 아내의 모습을 추억하며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딸은 순조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없었고, 그들 가족의 행복은 깨어졌으며, 나가미네는 복수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쓰야와 가이지라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자신의 딸을 유린하는 장면을 그의 두눈으로 보았다. 보물같은 딸이 멍한 표정으로 하나의 고깃덩어리 취급을 받는 그 장면을. 아무도 침범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딸과의 행복한 순간을 추억하고 억울한 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가 하지 못하는 일을 직접 하기 위해 나가미네는 범죄자들에 대한 처단을 결심했다.
 
누가 나가미네에게 '당신이 지금 하려는 일은 옳지 않소'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기 전의 나였다면,  어쩌면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다른 누구보다 심취해있던 나였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적인 복수는 옳지 않다고. 그러니 법이라는 정의 앞에 세워서 공정한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그것은 직접 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의 단순한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 가족이, 내 친구가, 내 연인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나는, 우리는 그저 가만히 두 손 놓고 '법대로 하시오'라고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 범죄자들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무거운 형벌을 받지 않고 금방 석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말이다.
 
이 작품에서 갈등이 증폭되는 요소가 여기에 있다. 범죄자들이 성인이 아니라는 것,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소년법이 적용되어 가중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 한 개인이 피해를 입어도 그 피해를 사회와 법이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한 보상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소녀를 폭행하고 촬영하여 개인의 인권을 침해해도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아쓰야와 가이지는 경찰에 붙잡혀도 길어야 3년 정도 감옥에 있었을 뿐이었다. 나가미네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갱생'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아쓰야와 가이지에 의해 농락당한 다른 소녀가 자살을 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어도 반성하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에서도 이와 같은 사건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동급생을 술을 먹여 강간하고, 학교폭력으로 친구를 숨지게 했어도 미성년자인 피의자들은 한동안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거나, 소년원에서 짧게 생활하다 나올 뿐 그들이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었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소년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도, 범죄방지를 위한 것도 아니다. 청소년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것에는 피해자와 그 가족의 슬픔과 분노는 반영되지 않고, 현실을 무시한 이상적인 도덕만이 존재한다(p88)
 
개인적인 복수는 당연히 지양되어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마음 속은 나가미네를 응원하게 된다. 이런 모습은 책을 읽는 독자들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인 경찰들에게서도 보여진다. 피해자의 아버지가 피의자로 변해버린 상황 속에서 경찰들 또한 혼란스러워한다. 법과 정의가 하려는 일이, 자신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의문을 품는다. 경찰들마저 딜레마에 빠져버린 법제도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 현시점에서는 우리 중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러나 작가는 자기 나름대로 하나의 의견을 내놓는다. " 전 이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나가미네씨가 직접 경찰서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적어도 사람들은 한 번 더 따님의 비극을 떠올리겠지요. 그것만이 아니에요. 당신은 법정에 서서 소년법을 포함해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요. 당당하게 자수한 당신의 말이라면 세상 사람들도 귀를 기울일 거에요"
(p484)
 
청소년 범죄가 늘어가는 요즘, 우리의 법체계에도 변화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법은 사람의 상처를 외면해도 되는가'라는 말이 나와서는안 될 것이다. 경찰서에서 피의자보다 피해자가 더 머리 수그리고 부끄러워하는 사회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상처입은 피해자의 권리는 제대로 지켜지고,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죄를 저지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나는 또한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우리 모두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책 한권을 읽고 나서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책 표지가 나가미네의 눈물과 분노를 그리는 것만 같아 마음이 스산하다.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작가, 다시 보인다. 이런 소재가 단순히 하나의 소설로 그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발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딘가에서 상처입고 누구에게도 말못할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을 그 누군가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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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대답해주는 질문상자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이레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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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려서부터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는 '돼지는 어째서 돼지인가'였다. 돼지는 어째서 돼지로 불리게 되었고, 책상은 어째서 책상으로 이름붙여졌으며 하늘은 왜 하늘로 명명되는지,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어렸을 때 가끔 어른들이나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오히려 그런 것이 왜 궁금한지 되물음을 받았던 것 같다. 글쎄...나는 왜 그것이 궁금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답이 확실하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꼭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어린이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그냥 넘길 수가 없었나보다. '무엇이든'대답해주겠다니, 어쩌면 내가 궁금해했던 것을 똑같이 궁금해한 누군가가 여기에 질문해서 그 답이 실려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과 조바심이 생겼다. 아쉽게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나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도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고 조금 기뻤다. 

다니카와 슌타로는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한 시인이다. 많은 사람들의 질문과 그의 대답을 묶은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귀여운 그림과 조금은 엉뚱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답변에 마치 나는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꼬마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의 답변에 지지 않게 질문 내용도 무척 다채롭다. '미래에는 무엇을 타게 될까요'라는 현실적인 질문부터, '남편의 빚지는 버릇을 고치고 싶어요'같은 생활이 묻어나는 질문에, '왜 목욕을 해야 하나요'라는 엉뚱한 질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만큼 그 질문도 가지각색이었다. 

내가 마음에 든 것은 다니카와 슌타로의 대답 방식이다. 질문자들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대가 다양한데, 어떤 질문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어린이라면 어린이에 알맞게, 성인이라면 성인에 알맞은 눈높이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답변을 제공한다. 문득 진정한 상담자는 이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뢰한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상담가의 신념과 생각을 의뢰자에게 강요하지 않는 점일 것이다. 다니카와 슌타로는 자신의 생각을 조근조근 말하고는 있지만, 절대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말하는대로 무엇이든 다 이루어질 것만 같은 포근한 기분에 휩싸이게 한다. 

책을 넘기는 내내 갑자기 목욕이 하고 싶어졌다. 느긋한 몸과 마음으로 다정하게 그려진 그림들과 대답을 음미하고 싶어졌다. 목욕하면서 읽고 싶어지는 책이라니, 태어나서 처음이다. 앞으로 우울한 일이 있을 때나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때 이 책을 펼치면 금방 킥킥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일본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고, 애니메이션의 노래까지 작사할 정도의 굉장한 실력을 갖춘 이 사람의 매력을 나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질문상자는 인터넷에서 계속되고 있다니, 접속해서 오늘 나도 꼭 하나 질문해야겠다. 이봐요, 다니카와씨~돼지는 왜 돼지고, 책상은 왜 책상이고, 하늘은 왜 하늘로 이름붙여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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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세이타로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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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기와라 히로시의 책을 앞에 둘 때면 항상 설레임을 느낀다. 이번에는 또 어떤 상황속에서 유쾌하면서도 감동깊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를 기대하게 만드는 작가. 다양한 소재로 부지런히 책을 써내면서도 지금까지 내 기대를 한 번도 무너뜨린 적이 없는 사람. 때문에 그의 새로운 작품이 나왔다고 하면 어김없이 서점으로 달려가 훑어보게 된다. 기대만큼 실망도 크다는 말은 이 작가에 한해서는 해당되지 않는 말인 듯 싶다. 

하나비시 세이타로의 가족은 유랑한다. 끊임없이 다른 일자리를 찾아서.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대여가족'이다. 홈 엔터테인먼트 서비스사, 약칭 HES로부터 일을 받아 의뢰인이 주문한 가족의 모습을 연기한다. 때로는 노부인의 죽은 아들 가족으로, 때로는 여자를 버린 중년남자로 또 때로는 온 가족이 모여 결혼식 하객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세이타로의 가족은 모두 6명이다. 무슨 일을 하든 끝을 맺지 못하는 아버지 세이타로와 그의 아내 미호코, 애니메이션 학원에 다니고 싶어하는 장남 다이치와 노래를 좋아하는 장녀 모모요, 그녀의 아들 다마미, 그리고 차남 간지까지. 

모모요는 엔카 가수가 되겠다며 떠나고 다이치는 꿈을 실현하겠다며 집을 나간 어느 날, 세이타로는 예전 몸 담았던 극단의 단장인 단노스케를 찾아가 빚을 갚을 돈을 부탁한다. 그 청을 들어주는 대신 단노스케는 자신의 아들이 맡고 있는 극단에서 다시 일해주기를 명령하고, 마땅히 할 일도 없었던 세이타로는 눈을 빛내며 과거의 영광을 되새김한다. 하지만 착각은 잠시. 단노스케의 아들은 예술과 예능을 혼동하는 철부지에, 고전미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괴상한 내용들을 공연하는데다가, 아내 미호코마저 집을 떠나버린다. 간지와 단 둘이 남겨진 세이타로의 고단한 인생길, 과연 다리미로 다린 듯 평탄하게 펼쳐질 날이 오기는 할 것인가. 

다양한 시점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펼쳐나가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간지의 시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약간 모자란 것처럼 보이는 간지는,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사물과 상황을 파악하며 특유의 순수함과 열정으로 찾아오는 위기를 헤쳐나간다. 극단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은 세이타로에게 있어서 제2의 인생의 시작이었지만, 간지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의미를 지닌다. 바보라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던 간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해낼 수 있는 일을 찾아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이치와 모모요도 개성 넘치는 인물이지만, 심각한 상황에서 유머를 만들어내고 '웨엡'하는 우렁찬 대답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간지는 나에게만큼은 이 책의 주인공이었다. 

사실 세이타로는 과거의 영광에만 젖어사는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든 잘 될기라~를 연발하지만 항상 실수투성이인 데다 권위적인 모습은 아이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의 아내 미호코도 참다참다 집을 나가버리니 할 말 다 했다. 그러나 힘든 생활을 딛고 자신이 충실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낸 세이타로에게 앞으로의 인생은 충만함으로 다가올 것이라 믿는다. 그의 듬직한 모습에 아내도 언젠가는 돌아오지 않겠는가. 티격태격하며 다투고 지긋지긋하다며 저마다의 길을 찾아 떠나가버리지만, 결국에는 하나가 되어 어려운 일을 헤쳐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가족임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 하다.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모습을 그렸지만, 결국 세상의 모든 가족의 모습을 그린 오기와라 히로시. 극단을 중심으로 일본의 전통예능에 대한 약간의 지식도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표지만큼이나 유쾌한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 또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역시 다음 작품 또한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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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거타임
오가와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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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은, 그 책의 두께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가끔 깨닫고는 한다. 백과사전처럼 두꺼워도 아무것도 전달하지 못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한 시간만에 읽어버릴만한 책이라도 그 깊이와 무게감이 가슴 속을 세차게 때리는 경우도 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처음 만난 오가와 요코의 작품인 이 책은 단연 후자의 경우다.

슈거타임.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달콤함이 느껴진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작은 케이크가 그려진 분홍빛 표지는 그 느낌을 한층 강렬하게 인식시킨다. 하지만 이 달달한 표지가 어쩌면 가장 슬픈 이미지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행복하게만 보이는 모든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주인공 가오루의 빛나는 청춘이 그러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있어야 할 그녀의 인생은, 그러나 항상 즐겁지는 않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동생이 눈에 밟히고, 같이 야구경기를 보러 간 애인은 아무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고는 달랑 전화 한 통과 우연한 만남 한 번이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가오루는 이상식욕까지 보이고 있다. 그런 자신의 증세에 심각함을 느끼고 일기까지 써보지만 무의식적으로 엄청난 양을 먹어버리는 가오루는 이제 그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얇은 책이지만 어쩐지 휘리릭 넘겨버릴 수 없다. 그저 한장(障)씩, 천천히 넘기면서 가오루의 마음을 내 마음같이 느꼈다. 가오루의 폭식증을 보면서 예전 내 모습을 생각하기도 했다. 처음 집을 떠나 멀리 공부하러 갔을 때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았던 그 허기를. 나처럼 가오루도 외롭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확신할 수 없는 연인의 마음과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동생에 대한 연민과 평범하게 지나가 버리는 생활들. 일본의 연애소설이 대부분 그러하듯 담담한 문체 속에서 어느 때이고 흥분하지 않는 침착한 가오루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녀의 폭식증은 어쩌면 그런 모든 것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자신의 가장 아름다울 젊음 속에서 뭔가를 찾고 싶어하는 그녀의 욕망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터져나왔던 것은 아니었는지. 분홍색의 깜찍한 표지는 마치 역설의 증거인 것만 같다.

오가와 요코의 초기작이어서 그런지 휴대폰도 등장하지 않는 소설은, 그러나 참 좋았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익숙함과 담담하지만 아련한 슬픔이 느껴지는 마음과, 거세게 휘몰아치는 폭식증.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을 평범하게 그리지 않는 그녀의 묘사가 좋았지만 다만 한 가지. 떠나는 애인의 마지막 편지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결국 떠나는 남자들의 변명은 하나구나'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작가는 가오루가 안고 있는 모든 시련과 아픔이 언젠가는 달콤하게 느껴지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그런 남자의 이별의 편지라도 어느 날, 가오루가 기억하는 찬란한 젊음 안에서 달콤한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녀가 먼 훗날 아름답게 추억할 그녀만의 슈거타임으로 말이다.


 비록 낙담과 괴로움에서 싹튼 우억일지라도, 지금은 모든 것이 달콤한 맛을 띠고 있다. 그 사실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p155
당시에는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럽게 느껴졌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지는 것처럼, 나중에 나의 인생을 무심히 되돌아보았을 때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을 슈거타임이 넘쳐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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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을 만드는 여인들
카트린느 벨르 지음, 허지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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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향기를 풍기는 표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초콜릿 향기가 나는 책이라는 말은 아니다;;) 원시시대의 비너스를 연상하게 하는 초콜릿빛 피부의 두 여인이 장식한 표지는 어쩐지 보기만 해도 자꾸 초콜릿을 생각나게 했다. 공부할 때는 원기회복제가 되어주었고, 홀로 외국에 나가 생활할 때는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향수병전용 약이었고, 심지어 시험 보러 들어갔을 때는 기억력을 좋게 해주었던 친구가 바로 이 초콜릿이었다. 우울하거나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때 입에 쏙 들어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초콜릿. 초콜릿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나에게 이 책은 운명이지 싶다! 

표지의 초콜릿빛 피부를 하고 있는 두 여인은 안느와 자스민이다. 이 두 분의 여성. 신앞에 영원한 사랑과 복종을 맹세한 (혹은 맹세하려 하는) 성스럽고도 성스러운 수녀님인데, 지금 한창 모험 중이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생 줄리앙 수녀원은 과거 엄청난 영광을 누린 풍요로운 곳이었지만 언젠가부터 형편이 기울기 시작했다. 수녀원을 살리기 위해서는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녀원의 사업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바로 초콜릿을 만드는 일. 다행히 수녀원의 초콜릿이 '황금 카카오 상'을 수상하여 앞으로의 미래가 밝아졌지만, 초콜릿을 만들 카카오가 부족하다. 그래서 이 두 명의 수녀님들이 전설의 수녀 마리아 막달레나 드 킵다 수녀의 고향 콜롬비아로 질 좋은 카카오를 찾으러 떠난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분 수녀님들의 모험은 그리 순탄하지 않다. 그녀들의 카카오를 빼앗기 위해 나쁜 악당 제레미가 시시각각 그녀들의 숨통을 죄어오기 때문이다. 카카오와 관계없는 먼 아마존으로 보내버리는가 하면, 노수녀를 공격해 초콜릿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기를 쓴다. 제레미 때문만이 아니라 상황은 수녀님들께 좋지 않다. 자신들을 안내해 줄 사람은 이미 죽어 관 속에 들어가 있었고, 발음 하나 잘못해서 마약상으로 오인받아 총살당할 위기에도 처하며, 무례한 남자들을 만나 혼비백산 줄행랑을 치기에 급급하고, 그 와중에 가슴을 뒤흔드는 남자들도 만나 짧은 시간 안에 온갖 모진 풍파를 다 겪게 된다. 

그러나 가장 큰 장애물은 그들 두 사람. 안느에게는 자스민이, 자스민에게는 안느가 가장 힘겨운 상대였다.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안느는 밝고 해맑은 자스민을 질투하고, 자신이 선배 수녀라 하여 사사건건 가르치려 든다. 자스민에게 그런 안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상대하기 버거운 노처녀 수녀일 뿐이다. 그러나 여행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시간을 갖는다. 자스민이 어째서 수녀가 되려고 결심했는지, 어린 시절 가진 추억은 무엇인지 서로 나누면서,  깐깐하고 새침데기 같았던 안느는 어느새 정열적이고 자유로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자스민 또한 안느와의 다툼에서 그녀를 용서하고 이해하게 되면서 따스한 감정을 품게 된다. 세상과 단절된 수녀원 생활에서 접할 수 없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자신의 신념이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어느덧 그녀들의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드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사건들과 마지막에 제레미가 응징당하는 장면은 약간 식상한 면도 없지 않았지만, 초콜릿 재료를 얻기 위해 두 수녀님들이 모험을 떠난다는 설정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좌충우돌 유쾌한 그녀들의 여행 속에는 악당은 응징당하고, 자신을 위해 각자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모습이 초콜릿 향기와 함께 잘 그려져 있다. 아름다운 성가도 귓가에 맴돌고 개성 넘치는 수녀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읽었더니 마음이 무척 즐거웠다. 아~책장을 덮고 나니 초콜릿 향기가 더 진해지는 것 같다. 이 달콤한 냄새는 따뜻한 사람의 냄새겠지. 초콜릿을 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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