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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
김지수 지음 / PageOne(페이지원)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시-라고 하면,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곤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의미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 원작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해석된 의미에 맞추어 문제를 풀어야 하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필코 문제를 맞추어야 하는 기묘한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문학에 대한 애정을 이제서야 수줍게 고백할 수 있게 된 저로서는, 시는 그야말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시들이, 이 가을에 비로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때가 있는 것처럼, 시가 저에게 다가온 지금이, 바로 시와 제가 친밀함을 느끼게 될 적정시점이 아니었나 싶어요.
아직까지 어느 한 작가의 시를 몰두해서 읽을 용기는 나지 않아 고심 끝에 고른 책이 바로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입니다. 여러 작가의 시를 두루 만나볼 수 있다는 점과 '가난하다'와 '사치'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낸 묘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사진이 포착해내는 것처럼, 시인들은 단어로 그 순간을 포착해내는 거겠죠. 시와 더불어 김지수님의 잔잔한 글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어떤 작품은 김지수님의 글을 통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또 어떤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빛납니다.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 서정주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
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
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 없이 웃
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그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서정주 시인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겠지만, 그만큼 시를 잘 쓰는 사람도 드물다-는 것이 제가 알고 있는 한 국어 선생님의 의견이었습니다. 저도 그래요. 저는 평소 서정주 시인의 <신부>라는 시를 참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고운 시를 쓰는 사람이 친일파였다는 것은 참 안타깝습니다. <신부>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에서 발견한 순간, 그 안타까움은 배가 되었죠.
시에서 얻을 수 있는 감정이 아련함, 슬픔, 고통, 분노가 아니라 깊은 해학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가르쳐 준 작품도 있었습니다.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얼마나 놀라운 실수인가!
저는 아직 결혼을 안 해서 '부부'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이 시를 읽는 순간,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더라구요. 문정희 시인의 <나의 아내>라는 시와 <부부>라는 시도 꼭 한 번 찾아 읽어보고 싶네요.
이 외에도 정윤천 시인의 <천천히 와>, 신현림 시인의 <침대를 타고 달렸어>, 마종기 시인의 <전화>가 마음에 들었어요. 얼마 전 한 예능프로에서도 남자들이 시를 짓고 있던데, 그러고보면 우리의 모든 순간순간은 위대한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