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아데나 할펀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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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한 가지 지울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면 '지금 느끼는 것을 조금 더 어렸을 때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조금 더 어렸을 때' 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 더 젊었다면'으로 바뀌어 가겠죠. 학생 때 어떻게든 더 많이 여행을 다녀볼 걸  ,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서 풍부한 경험을 쌓아볼 걸,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 사람 저 사람도 만나서 많이많이 사랑해볼 걸.-하는 아쉬움들은 분명 앞으로 살아갈 날들 속에서는 기회가 점점 적어질 것이라는 걱정에서 비롯된 듯 합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봐도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을 테니까요.

 

와우. 그런데 이 할머니, 엘리. 저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하지 못할 말을 거침없이 내뱉습니다. 자신의 손녀딸이 부러워죽겠다고, 스물 아홉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며 말이에요. 아마 저였다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얻은 것도 많으니 나는 절대 네 나이가 부럽지 않다며 허풍을 떨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솔직하고 호탕한 이 엘리 여사, 심지어 생일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불면서 진심으로 소원을 빕니다. 하루만 스물 아홉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요. 그리고 마법처럼 그 다음 날 아침, 엘리 여사는 스물 아홉의 예쁜 아가씨로 하루를 시작하죠. 지나간 시간들 속에서 하지 못했던 일들, 할머니라는 이유로 포기하고 살았던 많은 일들을 즐겁게 해치워나가면서, 엘리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집니다. 내가 이 나이로 돌아온 이유는 뭘까.

 

이미 영화화가 결정된 이 작품은, 연말이 다가오며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는 향수와 로맨틱함, 판타지를 모두 만족시켜주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지금에 충실하라는, 진부하면서도 소중한 깨달음까지 전달해주죠. 솔직히 요즘, 잠이 많은 제가 밤잠을 깊이 못 이루고 있어요. 나의 미래는 뭘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청소년기에나 할 법한 고민들 때문에요. 이런 고민들은 나이를 먹으면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인생이란 끝없이 이어진 산들을 하나하나 넘어가는 여정인 것 같습니다. 그 산들이 높고 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순간순간에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지도 몰라요. 지금 느끼는 행복과 즐거움이 그 산을 넘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 줄테니까요.

 

저는 우선은 '나는 예쁘다'로 시작해 보려구요. 요즘 얼굴 좋아진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듣기도 할 뿐더러 (왜 그럴까요;; 잠도 설치기 일쑤고 많이 피곤한데 말이죠. 밤에 영양크림을 푹푹 퍼 바르기 때문인지도;; ) 남아있는 날들 중에서는 오늘의 제가 가장 젊고 예쁘지 않겠어요?! 엘리 여사의 말씀처럼, 햇빛을 조심하고, 부지런히 배우고 읽고 생각하고, 아침 저녁 수시로 보습을 잊지 않고, 일생에 한 번 할만한 미친 짓을 뭘까에 대해 생각해보고, 지나간 날들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아 보렵니다. 적어도 엘리 여사처럼 일흔 다섯이 되었을 때 손녀딸을 향해 이를 부득 갈면서 '네가 부러워죽겠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부럽기는 하겠지만 그 한편에 나이를 먹은 저에 대한 뿌듯함도 함께 느끼고 싶다는 것이 작은 소망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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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왼팔
와다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들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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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의 소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보우의 성]이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와다 료의 작품이에요. [노보우의 성]도 시대극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책 역시. 1556년 센고쿠(전국)시대를 배경으로 다이묘들의 전쟁을 그린 작품인데요, 타고난 천재 사수인 소년과 도자와 가문의 명장 한에몬, 그의 적수인 기베에의 혈투 속 의리가 빛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병사들이 픽픽 쓰러지기도 하고 안타까운 죽음들도 있어서 때때로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싸나이들의 의리와 용기,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높은 자존감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역시 승리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버리는 한에몬의 처절한 모습입니다. 무사로서 비겁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확고한 법칙이, 인육을 먹는 병사들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은 인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목적을 위해 잔인한 방법을 택한 그가 어리석어보였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타인이 자신을 평가하는 눈이 아닌, 자신이 자신을 평가하는 내면의 눈이겠죠.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무너진 한에몬은 결국 당당한 방법으로 천재 소년 고타로와 마주하며 찬란한 영혼을 되찾게 됩니다.

 

또 재미있는 점은 한에몬과 그의 적수 기베에의 독특한 관계에요. 전장에서는 적으로, 그러나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같은 편인 병사들보다 더한 우정을 지닌 그들의 모습은 조금 생소해보이기도 하는데요, 상대에게 목숨이 빼앗겨도 좋다, 진정한 실력을 겨뤄보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크게 웃을 수 있는 그들의 배포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변신술을 사용하는 닌자가 등장하는 것도 묘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일본영화 <시노비>를 통해 닌자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저로서는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습디다.

 

그리 깊이있는 소설은 아니지만 오락용으로는 손색이 없는 재미있는 이야기였어요. 만화 [바람의 검심] 속 켄신이 생각나기도 하고, 신념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뻐하며 목숨을 내던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오랜만에 진정한 용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보우의 성]은 이보다 더 평이 좋은 것 같던데, 이제는 한 번 읽어봐도 좋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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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
김지수 지음 / PageOne(페이지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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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고 하면,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곤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건 어쩌면 의미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 원작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해석된 의미에 맞추어 문제를 풀어야 하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필코 문제를 맞추어야 하는 기묘한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문학에 대한 애정을 이제서야 수줍게 고백할 수 있게 된 저로서는, 시는 그야말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시들이, 이 가을에 비로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때가 있는 것처럼, 시가 저에게 다가온 지금이, 바로 시와 제가 친밀함을 느끼게 될 적정시점이 아니었나 싶어요.

 

아직까지 어느 한 작가의 시를 몰두해서 읽을 용기는 나지 않아 고심 끝에 고른 책이 바로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입니다. 여러 작가의 시를 두루 만나볼 수 있다는 점과 '가난하다'와 '사치'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낸 묘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사진이 포착해내는 것처럼, 시인들은 단어로 그 순간을 포착해내는 거겠죠. 시와 더불어 김지수님의 잔잔한 글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어떤 작품은 김지수님의 글을 통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또 어떤 작품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빛납니다.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 서정주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

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

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 없이 웃

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그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서정주 시인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겠지만, 그만큼 시를 잘 쓰는 사람도 드물다-는 것이 제가 알고 있는 한 국어 선생님의 의견이었습니다. 저도 그래요. 저는 평소 서정주 시인의 <신부>라는 시를 참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고운 시를 쓰는 사람이 친일파였다는 것은 참 안타깝습니다. <신부>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에서 발견한 순간, 그 안타까움은 배가 되었죠.

 

시에서 얻을 수 있는 감정이 아련함, 슬픔, 고통, 분노가 아니라 깊은 해학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가르쳐 준 작품도 있었습니다.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얼마나 놀라운 실수인가!

 

저는 아직 결혼을 안 해서 '부부'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이 시를 읽는 순간,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더라구요. 문정희 시인의 <나의 아내>라는 시와 <부부>라는 시도 꼭 한 번 찾아 읽어보고 싶네요.

 

이 외에도 정윤천 시인의 <천천히 와>, 신현림 시인의 <침대를 타고 달렸어>, 마종기 시인의 <전화>가 마음에 들었어요. 얼마 전 한 예능프로에서도 남자들이 시를 짓고 있던데, 그러고보면 우리의 모든 순간순간은 위대한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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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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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을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 슈테판 츠바이크의 장편소설입니다. 뛰어난 전기작가로 알려져 있는 그이기에 소설을 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인지 [연민]이후 읽게 된 이 작품은, 그 평이 어떻든 반가울 따름입니다. 표지로 사용된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나에>의 황홀한 표정만 보면 주인공 크리스티네가 얼마나 변신에 도취해 있었는지 그 기쁨과 열락을 표현한 소설이라 오해하기 쉬울 것 같은데요, 이 작품은 전쟁이 끝난 후 변신에 도취했던 크리스티네가 그 변신 이후 자신의 삶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지를 밀도있게 그려낸 심리소설이라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우체국에서 일하는 크리스티네. 그녀는 전쟁 중 오빠와 아버지를 잃었고 병을 앓는 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스물 여덟의 아가씨입니다. 매일 일정한 시각에 우체국에 출근해서 정해진 시각에 퇴근하고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는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단조로운지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죠. 어느 날 미국에 살고 있는 이모 클레르가 스위스로 여행을 왔다며 자신과 남편을 보러 오라는 초대의 편지를 보냅니다. 몇십 년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낼 수 있었던 크리스티네의 삶은 이모를 만나는 순간 급격하게 변화하죠.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명랑쾌활해지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진정한 삶은 이런 것이라 느꼈던 시간들. 그러나 변화의 시간은 꿈처럼 끝나버리고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자리는 다시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어머니의 무덤가입니다.

 

이 작품은 크리스티네가 스위스에 도착해 그 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들의 가치를 깨닫게 된 순간부터 빛을 발합니다. 특히 꿈같은 시간을 뒤로 한 채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해 어울리던 무리의 어떤 독일남자에게 매달리는 순간의 대사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크리스티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쁜 드레스, 맛있는 음식, 솜털같은 이불과 편안한 잠자리, 지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일상, 유쾌한 사람들,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남자들. 이 모든 것을 남겨두고 병든 어머니와 초라한 집, 단조로운 업무가 기다리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식을 갑작스럽게 전해들은 크리스티네의 절망이 생생히 느껴져요.

 


 당신과 함께 갈래요. 나를 데려가주세요. 우리 함께 떠나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아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고향에는 죽어도 가기 싫어요. 못 견디겠어요. 어디든지 가요. 당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언제까지라도!...내일은 안 돼요, 내일 아침에 나는 떠나야 해요. 그 분들은 저를 쫓아버리려고 하고 있어요. 소포처럼, 우편물처럼...그렇게 가기는 싫어요. 싫어요!...저를 데려가세요. 지금 당장. 도와줘요. 더는 견딜 수 없어.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크리스티네의 마음은 이제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당연히 예전같을 수 없겠죠. 자신이 전쟁 때문에 포기하고 살았던 것, 자신이 놓치고 살았던 것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누리고 사는지 보아 버렸으니까요. 지금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 것인지 느껴버렸으니까요. 그런 그녀 앞에 페르디난트라는 남자가 나타납니다.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귀향했지만 역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서글픈 삶. 남자가 토해내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에 대한 내면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어떤 의사도 6년간의 젊음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을 치료할 수는 없어. 누가 내 젊음을 보상해주지? 국가가? 그 고위층 사기꾼들이? 그 고위층 도둑놈들이? 40명이나 되는 장관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대봐. 법무부 장관? 복지부 장관? 산자부 장관? 공정하게, 사리사욕 없이 정말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고급 공무원이 있으면 단 한명이라도 이름을 대봐.

남자가 토해내는 현실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한탄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유럽으로 망명했다가 약물과다복용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유대인인 작가의 마음이 녹아들어있는 듯 해 한층 생생하게 다가오죠. 이런 상황 속에서는 두 남녀가 느끼는 끌림은 절망의 또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이야기는 그런 두 남녀가 우체국 강도를 계획하면서 마무리됩니다. 이게 진정 끝인가 싶을 정도로 갑자기 끝나는 느낌이 강한데요, 츠바이크 전문가들은 이 소설이 미완성이라는 주장에 대부분 동의한다는 점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있었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작가는 작품에서 페르디난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죽어야 할 때뿐 아니라 스스로 원할 때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유일하게 동물보다 우월한 점이다-를 실천이라도 하듯 1942년 부인과 함께 약물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간의 욕망,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는 서글픈 현실을 감각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한 작가 자신도 결국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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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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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노 여사의 히로인 무라노 미로가 등장하는 단편집입니다. 어둠(?)의 기운이 가장 충만하다는 [다크]를 제외하고는 미로 시리즈를 전부 읽었는데요, 사실 조금씩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줄곧 받아왔답니다. 어떤 때는 분위기가 그랬고, 어떤 때는 스토리라인이 그랬어요. 완벽한 만족감을 주지 않는 미로이기에 자꾸 읽게 되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왕이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충만함을 맛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습니다. [로즈 가든]에서는 표제작인 <로즈 가든>에서 아버지 무라노 젠조와 미로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고 해서 관심을 가졌지만, 내용 상으로는 조금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로즈 가든>의 주인공은 그 동안 살짝살짝 공개돼 왔던 미로의 남편 히로오입니다. 고교시절 만난 히로오와 미로의 관계, 미로와 젠조의 관계가 히로오의 관점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분위기상으로 아주 끈적끈적한 것이, 몽환적이기도 하고 퇴폐적이기도 해서 독자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내용들로 아리송하기도 하면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안개에 가린 것처럼 묘사되어 답답한 느낌을 전하기도 합니다. 또 성인 미로와 연결하기 쉽지 않은 학생 미로의 분위기인지라, 어쩌면 이것이 <다크>의 미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그동안 궁금했던, 자살한 히로오의 어두운 심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수확이라고 생각해요.

 

<표류하는 영혼>은 현재의 미로가 사는 맨션에서 가네코라는 사람이 죽은 후의 유령소동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령의 정체와 맨션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일의 원인을 밝혀달라는 의뢰를 받은 미로가, 맨션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악의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랄까요. '유령'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음습하면서도 어두운 분위기가 메마르고 무서운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는 것 같아 섬뜩했습니다. 결론이 조금 허술하다는 점이 아쉽다면 아쉬운 점입니다.

 

<혼자 두지 말아요>는 감성적인 제목만큼이나 감성적인 러브스토리라면 참 좋았을텐데, 역시 미로의 세상에는 해피해피 사랑이야기는 있을 수 없는 것일까요. 상하이 클럽에서 일하는 중국인 여성과 사랑에 빠진 남자가 미로에게 그녀의 마음을 확인해달라는 기이한 의뢰를 들고 찾아오지만, 얼마 후 그 남자는 살해당합니다. 뒤늦게 그의 의뢰를 받아들인 미로는 잔혹하면서도 슬픈 진실에 다가서는데요, 이 단편의 또 다른 매력은 그녀가 조사하는 다른 여자입니다. 바람을 의심받는 의뢰인의 아내. 그녀와 관계된 내용들도 평범하지는 않지만 뭐랄까, 거부감도 들지 않고 오히려 어떤 순간에는 예뻐(?)보이기도 하는 것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실린 <사랑의 터널>은 한 아버지의 의뢰로 시작됩니다. 도쿄에서 성실하게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 믿었던 딸이 어느 날 사고로 사망하는데, 그녀가 숨기고 있던 비밀을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가 미로에게 그 뒷처리를 부탁하죠. 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그녀의 비밀. 그리고 숨겨져 있던 사고의 진상과 음습하게 가려져있던 인간의 헛된 욕망, 무서운 집념, 잔혹한 마음들이 드러나면서 <로즈 가든>과는 다른 끈적함을 선사(?)합니다. 기본적으로 읽기 편안한 내용은 아니었어요.

 

[다크]를 제외한 미로 시리즈를 읽으면서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어둠의 기운이 낮아 안심했었는데, [로즈 가든]은 그 수위가 한 단계 올라갔다고 보시면 될 듯 합니다. 인간의 어두운 마음과 끝없는 욕망, 그리고 집착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운들에 독서 시간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답니다. 어쩌겠어요, 취향인 것을. 다만, 이런 마음들을 묘사할 줄 아는 기리노 여사의 마음에는 어떤 구멍이 있을지 궁금하기는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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