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연민]을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 슈테판 츠바이크의 장편소설입니다. 뛰어난 전기작가로 알려져 있는 그이기에 소설을 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인지 [연민]이후 읽게 된 이 작품은, 그 평이 어떻든 반가울 따름입니다. 표지로 사용된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나에>의 황홀한 표정만 보면 주인공 크리스티네가 얼마나 변신에 도취해 있었는지 그 기쁨과 열락을 표현한 소설이라 오해하기 쉬울 것 같은데요, 이 작품은 전쟁이 끝난 후 변신에 도취했던 크리스티네가 그 변신 이후 자신의 삶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지를 밀도있게 그려낸 심리소설이라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우체국에서 일하는 크리스티네. 그녀는 전쟁 중 오빠와 아버지를 잃었고 병을 앓는 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스물 여덟의 아가씨입니다. 매일 일정한 시각에 우체국에 출근해서 정해진 시각에 퇴근하고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는 그녀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단조로운지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죠. 어느 날 미국에 살고 있는 이모 클레르가 스위스로 여행을 왔다며 자신과 남편을 보러 오라는 초대의 편지를 보냅니다. 몇십 년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낼 수 있었던 크리스티네의 삶은 이모를 만나는 순간 급격하게 변화하죠.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명랑쾌활해지고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진정한 삶은 이런 것이라 느꼈던 시간들. 그러나 변화의 시간은 꿈처럼 끝나버리고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자리는 다시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어머니의 무덤가입니다.

 

이 작품은 크리스티네가 스위스에 도착해 그 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들의 가치를 깨닫게 된 순간부터 빛을 발합니다. 특히 꿈같은 시간을 뒤로 한 채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 사실을 감당하지 못해 어울리던 무리의 어떤 독일남자에게 매달리는 순간의 대사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크리스티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쁜 드레스, 맛있는 음식, 솜털같은 이불과 편안한 잠자리, 지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일상, 유쾌한 사람들,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남자들. 이 모든 것을 남겨두고 병든 어머니와 초라한 집, 단조로운 업무가 기다리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식을 갑작스럽게 전해들은 크리스티네의 절망이 생생히 느껴져요.

 


 당신과 함께 갈래요. 나를 데려가주세요. 우리 함께 떠나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좋아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고향에는 죽어도 가기 싫어요. 못 견디겠어요. 어디든지 가요. 당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언제까지라도!...내일은 안 돼요, 내일 아침에 나는 떠나야 해요. 그 분들은 저를 쫓아버리려고 하고 있어요. 소포처럼, 우편물처럼...그렇게 가기는 싫어요. 싫어요!...저를 데려가세요. 지금 당장. 도와줘요. 더는 견딜 수 없어.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크리스티네의 마음은 이제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당연히 예전같을 수 없겠죠. 자신이 전쟁 때문에 포기하고 살았던 것, 자신이 놓치고 살았던 것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누리고 사는지 보아 버렸으니까요. 지금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 것인지 느껴버렸으니까요. 그런 그녀 앞에 페르디난트라는 남자가 나타납니다.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귀향했지만 역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서글픈 삶. 남자가 토해내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에 대한 내면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어떤 의사도 6년간의 젊음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을 치료할 수는 없어. 누가 내 젊음을 보상해주지? 국가가? 그 고위층 사기꾼들이? 그 고위층 도둑놈들이? 40명이나 되는 장관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라도 대봐. 법무부 장관? 복지부 장관? 산자부 장관? 공정하게, 사리사욕 없이 정말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고급 공무원이 있으면 단 한명이라도 이름을 대봐.

남자가 토해내는 현실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한탄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유럽으로 망명했다가 약물과다복용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유대인인 작가의 마음이 녹아들어있는 듯 해 한층 생생하게 다가오죠. 이런 상황 속에서는 두 남녀가 느끼는 끌림은 절망의 또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이야기는 그런 두 남녀가 우체국 강도를 계획하면서 마무리됩니다. 이게 진정 끝인가 싶을 정도로 갑자기 끝나는 느낌이 강한데요, 츠바이크 전문가들은 이 소설이 미완성이라는 주장에 대부분 동의한다는 점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있었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작가는 작품에서 페르디난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죽어야 할 때뿐 아니라 스스로 원할 때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유일하게 동물보다 우월한 점이다-를 실천이라도 하듯 1942년 부인과 함께 약물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간의 욕망,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는 서글픈 현실을 감각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한 작가 자신도 결국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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