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 - 오래된 책마을, 동화마을, 서점, 도서관을 찾아서
백창화.김병록 지음 / 이야기나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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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느 범주에 넣어야할까-를 쪼큼 고민한 끝에 '인문'으로 선택했습니다. 유럽 4개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보긴 했으니 여행서인 것 같기도 하고 저자들이 여행의 목적으로 선택한 것은 '도서관'과 '서점'이었기에 단순히 그것에 대한 에세이인 듯 싶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유럽으로 떠나 탱자탱자 즐기다 온 것이 아니니 여행서는 아니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길을 떠났으니 단순 에세이도 아닌 것 같거든요. 여행서+에세이+도서관과 서점에 대한 생각들을 한 데 모아놓고, 장차 우리나라의 도서관과 서점이 갖춰야 할 태도와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제시하고 있으니 그냥 제 마음대로 '인문'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이 분들, 제가 가장 꿈꾸고 원하는 삶-책과 함께 하면서 무언가를 이룩해가는-을 살아가시는 듯 해요. 여성잡지와 출판사에서 글 쓰고 책 만드는 일을 해온 아내와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미디어교육과 방송 문화 일을 해오던 남편이, 아이를 낳고 키우며 마음 속에 생긴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해 2002년 '숲속작은도서관'이라는 작은 마을 도서관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길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테지만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줄 수 있는 다른 누군가 (심지어 그 사람이 배우자!) 와 함께 지금까지 굳건히 걸어왔다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현재는 충북 괴산에서 도서관 마을을 꿈꾸며 시골 마을 도서관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는 이들 부부의, [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 입니다.

 

1부에서는 도서관을, 2부에서는 서점을, 3부에서는 동화마을을, 4부에서는 책으로 되살아난 농촌마을공동체인 유럽의 책마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시간이나 나라 순서가 아니라 주제에 맞추어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가 번갈아가며 등장하기 때문에 다소 중첩되는 부분도 있고 각 나라들의 소소한 풍경들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만 한 도서관과 서점 풍경이 가슴을 설레게 해요. 사실 여행자들의 주머니는 가볍고 호기심은 왕성하기 마련. 이번 책처럼 간접적으로나마 만족도가 높은 책은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3부의 동화마을과 4부의 유럽의 책마을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였고 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나도 그런 책마을 속에서 살아보고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책 모으는 것에도 중독되어 있는 저인지라 도서관과 서점 풍경을 담은 1부와 2부에 빠져들었습니다. 수도원 도서관 입구에 적혀있다는 '영혼을 치유하는 요양소'라는 말에 심하게 공감하면서요.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가 싫어하는 도서관/ 좋아하는 도서관 구분도 재미었고, 오랜 역사를 지닌 수도원 도서관의 풍취에는 녹아들었고, 프랑스의 미테랑 전 대통령의 책에 대한 열정과 도서관 건립에는 감동했으며, 공공도서관의 나라인 영국에도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게다가 유럽의 골목골목마다 숨어있는 헌책방들과 서점들이 지닌 무구한 역사들을 접하니 저도 당장 짐을 싸서 그저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로 날아가고 싶습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적혀 있어요. 저자가 '문화 예술의 나라' 러시아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푸시킨을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러시아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푸시킨을 읽으며 거리에서 만난 초등학생들에게 푸시킨의 시를 알고 있느냐 했더니 너나 할 것 없이 푸시킨의 시를 암송하는 모습이 비춰졌답니다. 순간 울컥. 우리에게는 저런 '아름다운' 교육이 있는가? 책 읽는 전통과 책 읽는 교육이 살아있는가를 고민하고 그 그리움을 느껴보고 싶었다며 여행의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광범위하게 보급되면서 요즘들어 책 읽는 풍경이 사라졌다고 느낀 것은 비단 저 혼자 뿐인 걸까요? 그래도 예전에는 지하철을 타면 몇몇 분들은 책을 읽고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 바쁜 듯 했어요. 호기심 많고 새로운 것 좋아하는 아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죠. 스마트폰의 보급과 기술의 발달은, 분명 우리에게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줄 겁니다.

 

하지만 뭔가, 내면을 채워줄 수 있는 것, 생각하고 판단하고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에 책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저자들도 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을 돌며 소중한 자료를 모으고 동화마을과 책마을을 돌아보는 거겠죠. 디지털 시대지만 '아날로그'를 잃어서는 안 되는 부분도 확실히 있어야 하니까요. 수도원도서관이 '영혼을 치유하는 요양소'라는 문구를 도서관 입구에 적어놓은 의미,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여전히 도서관과 서점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들을 깊이 생각하고 되새겨볼 시간입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들은 우리를 과거로 인도한다. 그것은 꼭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 때문은 아니다. 그 책을 읽었을 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우리는 누구였는가를 둘러싼 기억들 때문이다. 책 한 권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그 책을 읽은 어린아이를 기억하는 것이다.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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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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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온전한 공간이 생긴 여자는 신경이 예민해진다. 현관문을 열 때는 주위를 살피기도 하고 모퉁이 한 구석에서 갑자기 괴한이 나타나 집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한밤 중 복도에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며 바깥의 동선에 집중하기도 하고,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집이었기에 옆방에서 들리는 수상한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고, 겁이 너무 많다고 간단히 넘어가기에는 매일 접하는 사건사고가 너무나 잔혹했다. 여자를 무서움에 떨게 만들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수상(해보이는)한 흔적들이었다. 크고 작은 구멍들, 형광등을 끄고 바깥의 불빛에만 의지해 본다면 어떤 괴물의 형상같기도 한 얼룩 같은 것들에 여자는 지레 겁을 집어먹고 그 근처에는 가지도 않으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여자'는 바로 나였다. 워낙에 겁이 많기도 했지만, 자유로운 공간이 생긴 것이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혼자 있는 공간에서 극도의 무서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집이 내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잠깐 들어와서 잠만 자는 일종의 정거장 같은 곳이라 여겨졌던 탓도 있었겠지만, 나를 가장 겁먹게 한 것은 각각의 집의 '사연'이었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집에서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일들이, 어째서인지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워야 할 시기들에 나를 괴롭혀 소심한 마음을 더욱 작게 만들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새벽에 윗층에서 들리는 그치지 않는 물소리에 '헉! 설마 @.@'하는 잔인한 생각이 들었던 것도 그 집의 터가 좋지 않았던 탓이었을까. 실제로 그 집들은 곰팡이가 심했고, 마지막 집은 비만 오면 실내에서도 바깥처럼 비가 내렸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파스칼린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그녀가 이제 막 남편과 이혼하고 새 인생을 시작해보려던 찰나에, 그녀의 미래를 빛나는 것으로 만들었어야 옳았을 그 집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안 그 심정이 어떠했을지. 도저히 그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녀의 예민한 마음과 상처를 이해한다. 그리고 외로운 섬처럼 주위에 이해받지 못하고 불쌍한 사람 취급받던 그녀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처받았을지도 이해한다. 그녀는 14년 전에 어린 딸을 잃었고, 딸의 죽음과 함께 행복한 결혼생활도 막을 내렸으며,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 그녀에게 자신을 놓아달라고 했다. 그녀의 영혼이, 삶이 얼마나 황폐해지고 상처로 얼룩져있었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녀가 '어머니'였었기에 잔인한 범죄자에게 딸을 잃은 다른 어머니들의 심정으로 사건이 일어났던 공간을 찾아 자기만의 추모식을 진행한 것도 '완벽히는 아니지만' 이해한다. 그러면서 그녀도 자신의 상처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그래야 그녀에게 행복이란 것이 찾아올 것이니까.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스스로의 삶을 망치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파스칼린 그녀 자신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라면 이러지 않을텐데, 나라면 떠나간 남편은 잊고 새로운 행복을 찾는 데 집중했을텐데'라는 말을 얼마나 중얼거렸는지. 그만큼 그녀의 붕괴되어가는 정신이 안타까웠고, 무서웠다. 사랑도 아니고, 집착도 아닌. 어둠의 공간들을 돌면서 추모식을 진행했던 그녀는 추모의 대상이 아니라 추모를 하게 만든 범인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시작했던 감정이 끝으로 갈수록 혼돈에 빠졌고 급기야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이 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사라의 열쇠] 의 모태가 된 작품이라면 그럴만도 하다는 의견이다. [사라의 열쇠]는 [벽은 속삭인다] 보다 공간이 간직한 사연을 훨씬 애잔하면서도 냉철하게 풀어놓았다. [벽은 속삭인다] 를 먼저 읽고 [사라의 열쇠]를 읽었다면 괜찮았을테지만, 그 순서가 바뀌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다. 그나저나. 이제는 아무 집에나 이사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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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작은 새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고정아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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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초록눈 프리키는 알고 있다]에 비해 그리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닙니다. 이 작품에 비하면 [초록눈 프리키...]는 팔랑팔랑 책장도 아주 잘 넘어가고, 무엇보다 아동문학선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주인공 프랭키의 성장의 곡선도 뚜렷했거든요. 두 작품 모두 '가족'을 소재로 하지만 [초록눈 프리키...]가 아이들을 위한 성장소설이라면, [천국의 작은 새]는 잔혹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등장인물들의 어두운 세계를 냉철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의 굴레. 그래서였을까요. 꽤 많은 분량이기는 하지만 생각처럼 진도가 휙휙 나가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황량한 내면과 상처받은 영혼들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에 답답증도 생겼습니다.

 

주인공 크리스타와 애런의 인연의 시작은, 얄궂게도 애런의 어머니 조이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조이를 죽인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크리스타의 아버지인 에디. 그리고 애런은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의 시신을 처음으로 발견합니다. 노래를 사랑한 밝고 사랑스러운 여자 조이와 그런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에디이지만, 에디의 가족에 대한 (특히 크리스타에 대한) 사랑도 엄청난 것이라 그는 혐의를 부인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며 안타까운 죽음을 맞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크게 두 줄기로 갈라집니다. 크리스타와 애런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조이를 죽인 범인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죠.

 

처음부터 끝까지 밝은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작품입니다. 좋아하게 된 남자의 어머니를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했다는 운명 속에 놓여있는 크리스타니까요. 하지만 크리스타가 정말로 애런을 사랑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상대의 정체를 모르고 사랑에 빠졌다가 내막이 밝혀진 후 괴로워하는 인물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지고 난 다음 '의식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역할이기 때문이에요. 아버지의 살인 혐의와 그로 인한 죽음, 훌륭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했던 한 사람이 다른 가족에게 해를 입히고 그 가족을 해체시켰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보상심리는 아니었을까요. 그 지점에서 크리스타는 자신들의 가족 또한 커다란 상처를 받고 해체되었다는 사실에는 비중있게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에디가 사랑한 자식, 크리스타 딜로서 나름의 방법으로 사과하고 싶다는 감정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죠. 크리스타는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온전한 '크리스타'가 아니라 '에디 딜의 자식'으로서 존재하는 나약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생애 처음으로 '크리스타'로서 살아가기를 꿈꾸게 됩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재회한 크리스타와 애런은 조이 살인사건의 진범을 알아낸 후 처음으로 자신들의 욕망에 몸을 맡깁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 크리스타와 애런의 운명에 마음 아파하며 내심 이 두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의 생각과 같이 크리스타 생각에도 그들의 운명이 그리 밝아보이지만은 않았던 듯 합니다. 그들의 어린 시절이 점철되어 있고 이미 자신에게는 허물처럼 느껴지는 스파타를 정신없이 떠나는 크리스타의 모습은, [초록눈 프리키...]에서 프랭키가 아버지의 죄를 고백하던 모습과 오버랩됩니다. 뭔가 한꺼풀 벗어던지고 이제서야 '크리스타'로서, 밝은 미래를 꿈꾸며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려는 의지가 엿보였다고 할까요.

 

긴 분량에 걸맞게 사건의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 또한 세세하고 적나라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장황한 설명들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앞에서 한 이야기 또 하고, 그 앞에서 한 상황설명 또 한다는 느낌에 몇 차례나 책장을 건너뛰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재미와 상상력만을 자극하는 소설이 아니라, 철학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는 듯한 이미지는마음에 듭니다. 노벨문학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조이스 할머니라는데 (작가 사진 쫌 무서워요;;), 삼 세번이라고, 한 편쯤은 더 읽어봐야 진가를 알 수 있을 듯. (그런데 지금까지 출간된 작품들은 어쩐지 피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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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 上 - 신화적 상상력으로 재현한 천 년의 드라마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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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역사를 다룬 책들 중 제가 기다리고 있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스티븐 세일러의 <로마 서브 로사> 라는 작품으로, 주인공 고르디아누스(이 이름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니!) 가 정계의 암투와 모략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에요. 엄격히 구분하자면 인문서적이 아니라 소설로, 여느 추리소설처럼 범인을 색출해내는 과정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그보다 몇 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속에 녹아있는 로마 역사였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도 그렇고 여러 작가들이 로마를 주제로 수많은 책을 집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로마가 우리 삶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은 것은 아닐텐데요.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흥미와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으면 익히기 어려운 분야 중 하나라서, 로마의 길고 장대한 역사를 단순히 '학문'으로 접하고자 한다면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까 싶네요.

 

스티븐 세일러의 <로마 서브 로사> 시리즈는 소설이기 때문에 허구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저에게는 '로마'라는 세계에 대해 또다른 관심과 흥미를 일으켜 준 매우 고무적인 작품이에요. 그런 <로마 서브 로사> 시리즈가, 지난 1년 동안 어찌된 일인지 출간되지 않아 노심초사하던 중이었습니다, 이 책을 만난 것은!!  [로마] 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단숨에 '스티븐 세일러'가 떠올랐고, 내용과 상관없이(당연히 로마 관련 이야기이기는 했지만요), 구성도 보지않고 그의 이름만으로 선택한 작품입니다. <로마 서브 로사> 시리즈의 주인공이 고르디아누스라면 [로마]의 실제적인 주인공은 '파스키누스'라고 해야 할까요.

 

파스키누는 로마의 유서깊은 가문인 포티티우스 집안에 오랫동안 전해내려오는 호신부입니다. 늑대의 아들로 전해지는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세우기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시대의 시작부터 바로 이 파스키누스가 함께 해요. 포티티우스의 이름과 파스키누스를 물려받은 가문의 자손들과 함께 펼쳐지는 로마 역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포티티우스 가문과 함께 하는 로마의 알려진 인물들과 그들의 욕망, 희생과 사랑, 죽음 등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져요. 마치 파스키누스에 저의 영혼 한 조각이 흘러들어가 그들과 같이 숨쉬고 울고 웃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드라마틱한 사건들에 지지 않을만큼, 자연스러운 로마 역사의 전개 또한 탁월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는 그들의 모습은 현실의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죠.

 

이렇게 장대한 시간을 다룬 책을 읽고 나면, 역사의 기나긴 시간 속을 지나 우리들이 숨쉬고 있다는 것에 대해 늘 이름붙일 수 없는 아련한 감정이 가슴 속을 휘젓곤 했는데, 작가는 그 감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난밤까지만 해도, 카이사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의 할아버지가 치른 끔찍한 희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가 모르고 있는 일이 얼마나 더 많을 것인가? 그 엄청난 무지에 그는 그만 숨이 막혔다. 파란만장했을 수많은 인생에 대해 그는 완전히 무지했고 이후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뭐라고 했던가?

 '과거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알 수가 없는 거야.'

불현듯 자신의 존재는 두 개의 무한한 어둠-이전과 이후-사이에 난 지극히 작은 틈으로 비쳐든 빛-현재-에 비치는 조그마한 점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p316 

좋은 책은 늘 책장을 덮은 후에 한 번 더 읽고 싶다는, 고이고이 간직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으면, 그 책들과 함께 저의 역사도 만들어져가는 것 같거든요. 지금은 [로마] 를 허구에 집중해 정신없이 읽었다면, 다음에는 좀 더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되짚어가면서 다른 인문서적과 함께 읽어나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새해부터 좋은 책과 함께 해서 기분이 좋아요! 무엇보다 추수밭, 어서어서 [로마 서브 로사] 를 이리 내놓아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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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고양이는 없다 - 어쩌다 고양이를 만나 여기까지 왔다 안녕 고양이 시리즈 3
이용한 글.사진 / 북폴리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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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들의 앙증맞고 놀라운 사진으로 만족감을 채워주었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 책은 다소 무거운 분위기로 전개됩니다. 시종일관 어두운 분위기가 계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변에 깔려있는 감정은 분명 '슬픔'과 '안타까움'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저자가 이번 책을 통해 분명히 전달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바로 제목 그 자체일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나쁜 고양이는 없다.' 고양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좋지 않은 것은 비단 도시뿐만은 아닌 듯 해요.(도시는 어떤 동물에 대해서든 관대함이 부족한 곳이긴 하겠지만요) 저자가 생활하는 시골에서도 시골 사람들의 '풍성한' 인심은 이미 옛말이 되어버린 듯, 그 어떤 연민 없이 음식에 쥐약을 섞어 내놓고 그 음식으로 인해 피해를 본 고양이들을 또 아무렇지 않게 내버리는 모습이 비일비재한 듯 합니다. 거기에 어린 아이들의 돌팔매질과 같은 짓궂은 장난, 혹독하고 잔인한 겨울까지 합세하면 우리의 고양이들이 마음 놓고 생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겠죠.

 

 

제가 저자의 메세지를 제대로 간파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책에서는 유난히 고양이들의 고달픈 생활이 눈에 들어옵니다. [명랑하라 고양이] 에서부터 쭉 인연을 같이 해 온 달타냥은, 고양이 좀 묶어놓으라는 이웃들의 성화를 못이긴 주인할머니가 목줄을 매어놓는 바람에 무지개 다리를 건넜고, 역시 [명랑하라 고양이]에서 벗을 잃고 홀로 외로움을 달래던 덩달이도 가을에 철장에 갇혀 여름 장마철이 되어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까지고 상처받은 덩달이의 모습에 제 마음이 온통 생채기가 난 기분이었어요. 그럼에도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저자는 한숨 섞어 이야기합니다. 개울집에 살던 여울이의 아기고양이 중 세 마리는 주인이 텃밭에 쥐약을 놓는 바람에 고양이별로 떠나기도 했어요. 고양이라는 존재 자체가 싫다면 그냥 피해버리면 될텐데, 시골에서는 농작과 관련이 있어 그냥 놓아두기도 쉬운 일은 아닌 듯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생명을 해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모습에 오싹, 소름이 돋았습니다.

 

하루만, 딱 하루만 고양이들의 생활모습을 살피다보면 어쩌면 그 분들의 마음도 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저의 헛된 희망인 걸까요. 형제들과 함께 햇빛을 받으며 해바라기를 하고, 식빵을 구우며 눈을 꼭 감고 있는 털북숭이 생명체들. 혹독하고 추운 겨울이지만 눈밭에서 구르며 발라당을 하고, 마치 사람처럼 위험에 처한 다른 냥이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들을 본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지구별의 경이를 체험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텐데요. 사람들의 인정없는 처사에도 불구하고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난을 치고 있는 고양이들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인간으로 산다는 것과 동물로 산다는 것의 차이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저자는 -차라리 고양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훨씬 속 편한 여행가로 살았으리라. 그러나 알고는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겠다-라고 합니다. 그의 애정으로 세계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 춤>이 세상빛을 볼 수 있었던 거겠죠. 집에서 한 마리씩 길고양이들을 책임지라는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굳이 먹이를 때 되면 챙겨주라는 이야기도 아닐 겁니다. 저도 고양이들을 사진으로 보는 건 매우 좋아하지만, 길가에서 앙칼지게 우는 고양이들은 무서워하거든요. 하지만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웃을 위한 안내서라는 그의 인사말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에 대해, 하나의 생명에 대해 조금이라도 측은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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