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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혼자만의 온전한 공간이 생긴 여자는 신경이 예민해진다. 현관문을 열 때는 주위를 살피기도 하고 모퉁이 한 구석에서 갑자기 괴한이 나타나 집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한밤 중 복도에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며 바깥의 동선에 집중하기도 하고, 방음이 잘 되지 않는 집이었기에 옆방에서 들리는 수상한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고, 겁이 너무 많다고 간단히 넘어가기에는 매일 접하는 사건사고가 너무나 잔혹했다. 여자를 무서움에 떨게 만들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수상(해보이는)한 흔적들이었다. 크고 작은 구멍들, 형광등을 끄고 바깥의 불빛에만 의지해 본다면 어떤 괴물의 형상같기도 한 얼룩 같은 것들에 여자는 지레 겁을 집어먹고 그 근처에는 가지도 않으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여자'는 바로 나였다. 워낙에 겁이 많기도 했지만, 자유로운 공간이 생긴 것이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혼자 있는 공간에서 극도의 무서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집이 내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잠깐 들어와서 잠만 자는 일종의 정거장 같은 곳이라 여겨졌던 탓도 있었겠지만, 나를 가장 겁먹게 한 것은 각각의 집의 '사연'이었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집에서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일들이, 어째서인지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워야 할 시기들에 나를 괴롭혀 소심한 마음을 더욱 작게 만들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새벽에 윗층에서 들리는 그치지 않는 물소리에 '헉! 설마 @.@'하는 잔인한 생각이 들었던 것도 그 집의 터가 좋지 않았던 탓이었을까. 실제로 그 집들은 곰팡이가 심했고, 마지막 집은 비만 오면 실내에서도 바깥처럼 비가 내렸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파스칼린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그녀가 이제 막 남편과 이혼하고 새 인생을 시작해보려던 찰나에, 그녀의 미래를 빛나는 것으로 만들었어야 옳았을 그 집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안 그 심정이 어떠했을지. 도저히 그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녀의 예민한 마음과 상처를 이해한다. 그리고 외로운 섬처럼 주위에 이해받지 못하고 불쌍한 사람 취급받던 그녀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처받았을지도 이해한다. 그녀는 14년 전에 어린 딸을 잃었고, 딸의 죽음과 함께 행복한 결혼생활도 막을 내렸으며,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 그녀에게 자신을 놓아달라고 했다. 그녀의 영혼이, 삶이 얼마나 황폐해지고 상처로 얼룩져있었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녀가 '어머니'였었기에 잔인한 범죄자에게 딸을 잃은 다른 어머니들의 심정으로 사건이 일어났던 공간을 찾아 자기만의 추모식을 진행한 것도 '완벽히는 아니지만' 이해한다. 그러면서 그녀도 자신의 상처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그래야 그녀에게 행복이란 것이 찾아올 것이니까.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스스로의 삶을 망치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파스칼린 그녀 자신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라면 이러지 않을텐데, 나라면 떠나간 남편은 잊고 새로운 행복을 찾는 데 집중했을텐데'라는 말을 얼마나 중얼거렸는지. 그만큼 그녀의 붕괴되어가는 정신이 안타까웠고, 무서웠다. 사랑도 아니고, 집착도 아닌. 어둠의 공간들을 돌면서 추모식을 진행했던 그녀는 추모의 대상이 아니라 추모를 하게 만든 범인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시작했던 감정이 끝으로 갈수록 혼돈에 빠졌고 급기야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이 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사라의 열쇠] 의 모태가 된 작품이라면 그럴만도 하다는 의견이다. [사라의 열쇠]는 [벽은 속삭인다] 보다 공간이 간직한 사연을 훨씬 애잔하면서도 냉철하게 풀어놓았다. [벽은 속삭인다] 를 먼저 읽고 [사라의 열쇠]를 읽었다면 괜찮았을테지만, 그 순서가 바뀌어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다. 그나저나. 이제는 아무 집에나 이사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