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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나와 내 친구들에게 '여름 눈 송아지(나쓰=여름, 메=눈, 소세키는 그냥 한국어 발음대로의 의미)'씨로 불리던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문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문학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대학 다닐 때 한 교수님은 '일본 가서 생활할 때 필요한 말은 스미마셍, 도우모, 도우조+나쓰메 소세키야' 라고 말씀하셨었는데 이 여름 눈 송아지씨는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듯 하다. 할 말이 없어지면 나쓰메 소세키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의 운을 띄워 보라고, 그럼 그 일본 사람이 너를 대단한 사람이라 여길 거라던 이야기들은 자연스럽게 -대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길래-라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직결되었다. 근대 문학의 아버지이자 일본작가 중 대다수가 자신의 문학적 영혼의 근거로 들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 대학 때는 그의 작품을 원서로 읽으며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와 행간의 여운까지도 곱씹었었는데, 맙소사! 그게 대체 몇 년 전이람!
[그 후], [산시로]와 함께 나쓰메 소세키 전기 3부작이라 불리는 [문]은 임용고시 문제에도 출제된다 하여, 기계적으로 열심히 외웠었다. 하지만 직접 작품을 만나 볼 기회도 없었고 어쩐지 시험 문제용 작품같아 약간 거리를 두고 있던 참에 이렇게 접하게 되니 반가운 마음 그지 없다 할까나. 많은 수는 아니지만 여름 눈 송아지씨의 작품을 몇 편 읽어본 경험으로는 꽤 의미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아 약간 기대를 했는데, 그 동안 읽은 작품들에 비해 큰 재미를 얻지는 못한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가 굴곡이 없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또한 작가의 의도였는지도 모르지만.
주인공은 소스케. 아내와 함께 조용하고 한적한 삶을 이어가는 평범한 남자다. 큰 소리 한 번 내는 일 없이 하루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쉬고, 다시 일어나 일을 나가며 휴일에는 뒹굴뒹굴 늦게까지 잠을 자는 것으로 휴일을 즐기는 별 특징없는 사람이라고 할까. 그의 아내 오요네도 조용한 여인으로 때 되면 밥 하고 집안일하고 직장 갔다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하는 것이 일상인 평범한 주부. 그런 그들의 삶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소스케의 동생 고로쿠다. 사실 고로쿠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춘으로 그가 상상했던 삶과 실제로 지내는 삶의 간극이 너무 커서 방황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아무리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본다고 해도 동생인 그의 눈에도 소스케는 참으로 우유부단하고 생기없는 남자인 것이다.
아직 젊은데도 노부부같은 일상을 이어나가는 데다,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로 볼 때 아이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삶은 흘러가는 물처럼 그저 고요할 뿐이다. 초반을 거쳐 중반으로 이어지는 부분까지 계속되는 그런 분위기에 슬쩍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런 분위기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스케와 오요네의 관계가 불륜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일까. 친구의 부인이었던 오요네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소스케의 가정에는 어찌 된 일인지 아이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을 업보라 여기며 소스케와 오요네는 조용한 삶을 자청해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소스케에게 '문'이란 소스케 내면의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죄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오요네를 얻은 대가로 자신의 죄를 늘 의식하면서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한 삶을 이어나가는 것. 그 문은 결코 그냥 통과할 수도 사라져 버리게 할 수도 없이 오롯이 그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삶의 표식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마음]에서도 친구의 신의를 배신한 주인공을 내세워 그것을 인간의 존재와 결부시켜 표현했었는데 [문]을 읽고보니 작가는 그런 인간의 비겁한 마음들을 소재로 한 번의 잘못된 선택들이 그 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박하게 시작된 작품은 소박하게 끝이 난다. 오요네가 봄의 기운을 느끼고 기뻐하자 소스케는 금방 또 겨울이 올 거라며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예전 배신했던 야스이와의 예기치 않은 만남을 한 번은 피할 수 있었지만 다시 그런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염려하는 목소리같기도 하다. 결국 자신과 오요네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들은, 지금까지 어떤 모습으로든 보여져왔으며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또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들의 인생의 굴곡에 걸맞지 않게 단조롭게 쓰여진 작품이라 -재미있다-고 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여운이 느껴지고, 그 여운에 자꾸만 빠져들게 되는 그런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