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안녕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8
구보데라 다케히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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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체 이 이상한 아이는 뭘까-가 주인공 사토루에 대한 저의 첫 감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가 중학교에 가지도 않고 자신이 살고 있는 단지에서 평생동안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니까요.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그저 단순히 학교 가기 싫은 아이의 변덕이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읽기 시작한 이 작품은, 생각지 못했던 반전과 주인공 사토루의 가슴시린 성장기를 보여주네요. 어떤 일이 한 인간의 삶에 전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새삼 전율을 느끼면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안의 생활을 자신의 평생의 삶이라 결심하며 사토루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나가던 그 때, 이미 단지 안에서는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토루가 졸업한 후쿠다 초등학교의 졸업생 중 몇 명이 이미 이사를 갔기 때문이죠. 운동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며 영화와 책에 몰두하던 사토루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파트 단지를 순찰하는 일입니다. 이 아이의 집은 아무 일이 없는지, 저 아이의 집은 오늘도 평안했는지 살피며 돌아다니는 사토루의 모습에 단지 안 사람들은 물론, 저도 의아함을 느꼈어요. 대체 이 아이의 인생은 과연 어떻게 펼쳐지려고 이러는 걸까, 작가가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시키려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뒤통수를 맞는 듯한 반전이 등장했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졸업식 날 친구 마요네가 무참히 살해당하는 모습을 바로 눈 앞에서 목격하고 만 사토루. 그 때부터 사토루는 단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다른 친구들 집에 아무 일이 없는지 살펴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거죠. 친구들이 하나 둘 자신의 꿈을 좇아 단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던 사토루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사토루도 나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단지 밖 풍경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옆집에 살던 마쓰시마도 떠나고, 사랑하는 여자친구와의 약혼도 깨지고, 정성을 바쳐 일하던 케이크 가게도 문닫을 수밖에 없었던 그 때, 사토루에게 진정한 성장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처음의 황당한 감상과는 달리 의외로 깊이 있고 알싸한 느낌을 전달하는 내용에 생각보다 후한 별점을 매기기는 했지만,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어요. 음, 적나라하다고 해야할까, 솔직하다고 해야 할까 의외로 구체적인(?) 성적 묘사가 저는 좀 불편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장면들이 빠져도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싶거든요. 오히려 그런 장면들로 인해 작품이 진지하게 평가받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열린 결말로 큰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운동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단지 밖을 나갈 수 없었던 이유. 그 시련을 극복하고 그는 이제 바깥 세상으로 한발짝 내딛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단지 안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사토루가, 또 다른 한 사람의 죽음으로 단지 밖을 나가게 된 이 오묘함. 저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앞으로 펼쳐질 사토루의 인생도 무척 궁금하네요. 작가가 여력이 된다면 사토루의 이 다음 이야기도, 단지 밖을 나간 그의 생활도 그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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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 단편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0. 헨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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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붙잡은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그 느낌은 대체 뭐였을까요? 오 헨리의 작품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크리스마스 선물> 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름다운 머리채를 가진 부인과 소중한 시계를 가진 남편이 서로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에게 있어 가장 가치있는 것을 용기있게 희생할 수 있었던 순수한 사랑 이야기. 저에게 있어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마지막 잎새>가 아니라 바로 이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어린 나이임에도 그들의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오 헨리의 작품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네요. <마지막 잎새>, <크리스마스 선물>, <20년 후> 정도랄까요. 

 

그런 저에게 오 헨리의 단편집은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30여 편의 대표작이라니, 으흐흐. 마치 좋아하는 과자를 아껴놓고 야금야금 집어먹듯, 급하지 않게 천천히 그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하루에 한 편씩은 쪼큼 감질맛이 나서 하루에 두 편 정도 읽었더니 딱 좋았어요.  <마지막 잎새>와 <크리스마스 선물>, <20년 후>처럼 알고 있었던 작품은 또 다른 감상으로 다가왔고, 이번에 처음 접한 이야기들은 그들대로 저를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유쾌한 건 따뜻하고 감성적인 이야기임에도 마지막 부분에는 꼭 예상치 못한 반전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미스터리 소설도 아닌데 이번에는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하면 그 때부터 이미 즐거워지는 겁니다. 오 헨리가 미스터리 소설을 썼어도 굉장히 잘 쓰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런 오 헨리가 처음부터 작가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고나니, 사람의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안다는 말이 떠올라요. 처음에는 약제사로 일하다가 은행원에서 출납계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은행 공금 횡령 혐의로 기소도 되었다가 결국 교도소에서 복역까지 했다니 마치 한 편의 영화같은 삶 아닙니까. 교도소 약제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쓴 글 중 <레이버 캐년의 기적>이라는 단편이 신문에 실린 것을 계기로 오 헨리의 작가 인생이 펼쳐지게 됩니다. 요즘 진로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은 때라 저의 인생 지도도 이렇게 펼쳐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할까 하는 마음이 들어요. 약제사-은행 출납원-작가. 인생이란 참 오묘한 것이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불행한 어린 시절 이야기야말로 작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육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많은 경험, 겪어봐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의 상흔들, 넓어지는 이해의 폭. 좋은 작품이란 수많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일까요. 어린 시절 겪은 뼈저린 고통과 절망이 작가가 작품을 쓰는 데 창조적 에너지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런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과정야말로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들 수 있는 것이겠죠. 그러고보니 세상의 모든 작가들의, 그들만이 가진 고통이야말로 불꽃처럼 그들을 살아있게 만든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외감이 드네요.

 

금발의 소년이 빨간 풍선을 손에 쥐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비춘 표지가 쓸쓸하게도, 따뜻하게도 보입니다. 그 느낌이 오 헨리 작품의 모든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랜만에, 그리고 시즌이 아님에도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든 사랑스러운 작품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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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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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오즈의 작품은 처음이지만 이 작품집은 '세계의 다른 한편에서 알레고리로 읽히곤 하는' 그런 소설이 아닙니다. 작가가 원하는대로 일반적인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모습이 그려져 있죠. 그는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듯 하지만 저는 이 작품집에서 메세지보다 분위기에 흠뻑 매료되었답니다.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알퐁스 도데의 작품 <별>이 떠올랐어요. 이 [시골 생활 풍경]은 '서정미'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작가는 가공의 마을 텔일란을 배경으로 마을 사람들의 평온한 삶 뒤에 숨겨진 비밀과 사랑, 쓸쓸함, 균열 등을 안정되고 침착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누군가는 또 다른 어딘가에서 주변인물로 그려지며 하나의 가공된 세상을 이루고 있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 독립적 개체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에 굳이 해석을 더해보자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고민, 사랑, 갈등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결국 혼자만의 과제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총 여덟 편의 에피소드입니다. 누군가는 낯선 이의 방문을 받고, 누군가는 오기로 약속한 조카의 당도가 늦어짐을 기다리죠. 어떤 이는 딸과 함께 노년을 보내고 또 어떤 이는 쪽지를 남기고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기다려요.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소년도 있고 십대 아들을 자살로 잃은 부부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다루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제가 감탄한 점은 이 모든 이야기의 소재와 감정은 제각각이지만 '서정성'이 작품 전체에 퍼져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한 편의 미스터리 같은 이야기도 소년의 격정적인 짝사랑도 미스터리와 격정적인 사랑보다는 감미롭게 다가온다고 해야 할까요. 결론을 내지 않고 물 흐르듯 계속되는 듯한 분위기도 서정성을 한층 진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젊은 작가는 이런 책을 쓸 수 없을 겁니다'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죠. 시간이 흘러야만 알게 되는 감정이 있고 오랜 세월을 통해 만들어지는 삶에 대한 통찰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젊은 작가들이 드러내는 삶에 대한 격정, 로맨스, 활기참도 좋지만 노작가가 그려낸 은은하면서도 고요한 삶의 풍경도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0 지중해 문학상 외국문학상 수상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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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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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연구]로 급관심을 가지게 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아리스 시리즈> 입니다. 솔직히 내용도 궁금하긴 했지만 저의 주된 관심사는 작가 아리스와 탐정 히무라 콤비의 알콩달콩 애정(?)행각이었답니다. 두 사람에게 애인이 생기는 것은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이 콤비들, 정말 사랑스러워요. 과거의 무슨 일로 인해 상처를 갖게 된 듯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범죄 수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히무라와, 그런 그의 곁에서 개인적인 사정을 캐묻지 않고 묵묵히, 때로는 구박을 당하며 히무라의 뒤를 서포트해 주는 아리스는 이상적인 친구 관계이자 이상적인 연인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에헹.

 

[주홍색 연구]리뷰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이 <아리스 시리즈>의 차근차근 행보가 마음에 듭니다. 저는 작품 안에서 사용된 트릭이나 사건의 경위들을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작가를 선호하는 편인데요, 그런 점에서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저의 워너비 작가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결코 가볍지 않은 두께임에도 가독성이 있어 슉슉 읽히는 데다 문장 하나하나가 저를 흡입하는 것 같은 느낌은, 캬! 이것이야말로 책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무아지경, 누구나가 추구하는 독서의 시간 아니겠습니까. 작가가 문장을 유려하게 쓴 것인지, 옮긴이가 적절하게 번역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오홋.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의 신봉자이자 연매출 100억 엔대의 주얼리 브랜드 사장 도조 슈이치입니다. 그는 살바도르 달리를 너무나도 추앙한 나머지 달리의 트레이드 마크인 기이한 수염마저 따라하는 사람이었는데요, 고치로 표현되는 프로트 캡슐 안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게다가 그의 수염은 잘려나간 상태. 언뜻 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탐색한 결과 누군가가 용의자로 지목됩니다. 겉으로는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보였던 도조 슈이치의 숨겨진 가족사와 그의 사랑이 사건 속에서 어떻게 밝혀지는 지 페이지를 넘길수록 흥미진진, 두근두근해져요.

 

이 작품은 책 표지 뒷면에 쓰인 것처럼 연애소설로도 추리소설로도 손색이 없는 데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안타깝게도 슬프게도 그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뉴스나 신문에서 접하면 무섭게 느껴질만한 사건이지만, 인물의 심리가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해요. 사랑이란, 참 아름다우면서도 지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랄까요. 여기에 하나의 수확이 있었다면,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 속에 그의 작품 제목이 등장하기도 하여 궁금증에 찾아보기도 했는데, 저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세계였지만, 그 수염 하나만은 확실히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튼 접할수록 사랑스러워지고 흥미로워지는 아리스와 히무라 콤비입니다. 히무라가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언제였는지, 그 때의 일과 관련된 사건을 다루는 작품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나 벌써부터 조바심이 생겨요. 혹시 이미 출간되었는데 제가 모르고 있는 것이라면, 이 글을 읽어주신 어떤 분, 부디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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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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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친구들에게 '여름 눈 송아지(나쓰=여름, 메=눈, 소세키는 그냥 한국어 발음대로의 의미)'씨로 불리던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문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문학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대학 다닐 때 한 교수님은 '일본 가서 생활할 때 필요한 말은 스미마셍, 도우모, 도우조+나쓰메 소세키야' 라고 말씀하셨었는데 이 여름 눈 송아지씨는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듯 하다. 할 말이 없어지면 나쓰메 소세키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의 운을 띄워 보라고, 그럼 그 일본 사람이 너를 대단한 사람이라 여길 거라던 이야기들은 자연스럽게 -대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길래-라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직결되었다. 근대 문학의 아버지이자 일본작가 중 대다수가 자신의 문학적 영혼의 근거로 들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 대학 때는 그의 작품을 원서로 읽으며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와 행간의 여운까지도 곱씹었었는데, 맙소사! 그게 대체 몇 년 전이람!

 

[그 후], [산시로]와 함께 나쓰메 소세키 전기 3부작이라 불리는 [문]은 임용고시 문제에도 출제된다 하여, 기계적으로 열심히 외웠었다. 하지만 직접 작품을 만나 볼 기회도 없었고 어쩐지 시험 문제용 작품같아 약간 거리를 두고 있던 참에 이렇게 접하게 되니 반가운 마음 그지 없다 할까나. 많은 수는 아니지만 여름 눈 송아지씨의 작품을 몇 편 읽어본 경험으로는 꽤 의미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아 약간 기대를 했는데, 그 동안 읽은 작품들에 비해 큰 재미를 얻지는 못한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가 굴곡이 없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 또한 작가의 의도였는지도 모르지만.

 

주인공은 소스케. 아내와 함께 조용하고 한적한 삶을 이어가는 평범한 남자다. 큰 소리 한 번 내는 일 없이 하루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쉬고, 다시 일어나 일을 나가며 휴일에는 뒹굴뒹굴 늦게까지 잠을 자는 것으로 휴일을 즐기는 별 특징없는 사람이라고 할까. 그의 아내 오요네도 조용한 여인으로 때 되면 밥 하고 집안일하고 직장 갔다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하는 것이 일상인 평범한 주부. 그런 그들의 삶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소스케의 동생 고로쿠다. 사실 고로쿠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춘으로 그가 상상했던 삶과 실제로 지내는 삶의 간극이 너무 커서 방황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아무리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본다고 해도 동생인 그의 눈에도 소스케는 참으로 우유부단하고 생기없는 남자인 것이다.

 

아직 젊은데도 노부부같은 일상을 이어나가는 데다,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로 볼 때 아이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삶은 흘러가는 물처럼 그저 고요할 뿐이다. 초반을 거쳐 중반으로 이어지는 부분까지 계속되는 그런 분위기에 슬쩍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런 분위기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스케와 오요네의 관계가 불륜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일까. 친구의 부인이었던 오요네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소스케의 가정에는 어찌 된 일인지 아이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을 업보라 여기며 소스케와 오요네는 조용한 삶을 자청해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소스케에게 '문'이란 소스케 내면의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죄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오요네를 얻은 대가로 자신의 죄를 늘 의식하면서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한 삶을 이어나가는 것. 그 문은 결코 그냥 통과할 수도 사라져 버리게 할 수도 없이 오롯이 그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삶의 표식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마음]에서도 친구의 신의를 배신한 주인공을 내세워 그것을 인간의 존재와 결부시켜 표현했었는데 [문]을 읽고보니 작가는 그런 인간의 비겁한 마음들을 소재로 한 번의 잘못된 선택들이 그 후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박하게 시작된 작품은 소박하게 끝이 난다. 오요네가 봄의 기운을 느끼고 기뻐하자 소스케는 금방 또 겨울이 올 거라며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예전 배신했던 야스이와의 예기치 않은 만남을 한 번은 피할 수 있었지만 다시 그런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염려하는 목소리같기도 하다. 결국 자신과 오요네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들은, 지금까지 어떤 모습으로든 보여져왔으며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또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들의 인생의 굴곡에 걸맞지 않게 단조롭게 쓰여진 작품이라 -재미있다-고 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여운이 느껴지고, 그 여운에 자꾸만 빠져들게 되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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