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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내게 신경숙 작가의 책은 굉장히 처연하게 느껴진다. 마치 가을날 물에 젖은 나뭇잎을 바라볼 때의 기분이랄까. 지금까지 내가 읽은 작가의 책으로 미루어볼 때 '즐거운 내용은 아니다'라는 이미지가 머리에 박혀 있어 읽기 전에 그 내용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심호흡이 필요하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소화시키기 위해 여러 번의 문장의 곱씹음은 필수. 때문에 신경숙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읽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마음이 좋지 않을 때 읽으면 작품 속 등장인물의 감정에 금새 이입해버려 돌덩이를 매달아놓은 것처럼 축축 처지기도 한다.
총 여섯 편의 이야기가 실린 단편집이다. 연작 단편집은 아닌 것 같은데도 읽다보면 어쩐지 연결되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문장은 대부분 편지글이거나 대화체라서 읽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역시 느껴지는 감정의 무게는 남다르다.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특별히 나쁜(-ㄴ 경우도 있지만) 것만은 아니었지만 문체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삶의 빛깔은 밝은 색이 아니라 회색으로 다가온다. 쓸쓸함.일까. 17년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이직한 남편이 물 한모금 넘기지 못하고 바짝 야위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여자, 이사가기 전날 앞으로 그 집에 들어와 살게 될 타인에게 편지를 남기는 여자, 피부관리실에서 만나 함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악어를 키우던 다방여자와 피부관리사, 시골집에 내려가 지나간 날들을 추억하는 여자, 캐나다로 이민간 친구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작가 S에 대한 추억을 꺼내놓는 여자, 서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부석사를 찾아가는 한 쌍의 남녀. 그러고보니 글의 주인공은 여자이거나 여자가 빠지지 않는다.
조용하고 침착한 분위기는 같지만 <우물을 들여다보다>는 여기에 조금 호러적인 분위기가 가미되어 있다. 이사가기 전날 우연히 독경 테이프를 발견한 여자. 언니가 조카를 낳다 죽음을 맞은 후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한 그녀. 어느 날 달리기 코스 안에서 우물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닫혀져 있던 우물을 열어본다. 그 날 집안에서 느껴지는 한 여인의 기척. 분명 공포스럽고 두려울만한 상황인데도 그녀, 밥을 짓기 시작한다. 미역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쳐 상을 차리면서 자신의 반대편에 수저와 젓가락, 밥그릇과 국그릇을 하나씩 더 놓으며 독경 테이프를 튼다. 자신의 언니도 어디선가 그렇게 떠돌고 있다면 누군가 자신처럼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내가 이사갈 집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모골이 송연해질만한 일인데, 주인공인 그녀 입장에서 읽으니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이 되어 오히려 마음이 경건해진다.
새로 약국을 차리기 위한 자금을 부탁할 겸, 병환 중이었던 아버지가 자꾸 술을 드신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아버지의 상태도 보러갈 겸 시골에 간 그녀가 등장하는 <달의 물>. 누구보다 모범생이었던 오빠의 이혼과 그 이혼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조카 동이는 자꾸만 물을 찾는다. 모든 세월을 견뎌낸 후 갖게 된 순한 눈망울을 빛내며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아버지와 그 옛날 아버지의 외도로 상처받고 모진 삶을 살았음에도 여전히 아버지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쩐지 [엄마를 부탁해]의 그 부모님들 같아서 마음 한 켠이 시큰해졌다. 누가봐도 도시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개발되면서 막혀버린 우물에 숨막혀하며 그 마음을 아버지에게 토로하고, 오직 동이를 내어줄 수 없다는 마음에 무작정 시골집에 동이를 맡긴 오빠는 아이의 마음을 먼저 생각해야겠다며 동이를 데려간다. 왠지 막혔던 우물은 다시 복구될 것 같고, 동이도 더 이상은 과하게 물을 찾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희망적인 분위기로 마무리되지만, 작품집 전체에 맴도는 쓸쓸함은 여전하다. 그것은 자신조차 몰랐던 감정을 S의 죽음으로 인해 깨닫고 조심스레 꺼내놓는 <혼자 간 사람>도 마찬가지.
문체가 대화체 혹은 서간체여서 그런지 남의 넋두리를 계속 듣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어 연달아 작품들을 읽다보니 살짝 지겨워지기도 하다. 보기에는 일관성 없는 내용들이 이어지기도 하고, 이런 내용이 굳이 필요한가 싶기도 한, 군더더기가 약간 느껴지는 작품집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냥 휘릭휘릭 넘길 수가 없었다. 해설을 읽어보니 이 작품집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어머니 되기-라는데, 읽고보니 그런 듯도 하다. 여자, 어머니 되기. 그랬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