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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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일본소설일 뿐 아니라 오랜만의 '책'입니다. 요즘 하루하루가 어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게 보내는 통에 책을 읽을 시간이 거의 없었거든요. 사실 예전에는 -아무리 바빠도 책은 읽는다-주의였는데, 이렇게까지 바쁘고보니 내가 책 없이도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에 놀라워하는 중입니다.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날들을 보내고 친구들과 짧게 여행도 다녀온 데다 시간이 남아 잠시 멀리했던 책을 펼쳐들었는데, 마치 오랫동안 못만난 친구를 본 기분이랄까요!! 마음으로부터도 친근한 일본소설이라 더 재미나게 읽혔는지도 모르지만 일본 서점대상에서 1위를 받은 작품인만큼 맛나게 읽었습니다. 

 

미우라 시온 작가의 작품을 챙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는 작가라는 생각은 줄곧 했었어요.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한 소년을 소재로 삼은 [검은 빛]부터 아기자기한 동화같은 작품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야시러운 소설을 쓰기도 하는 작가가, 이번에는 편집부에서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을 소재로 서점대상을 수상했습니다. 2006년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으로 나오키상을 수상했던만큼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은 작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요. 더구나 이번 작품은 제가 살짝 좋아라하는 배우인 오다기리 죠가 영화에 출연한다고 해서 과연 어떤 영상으로 태어날지 더 기대가 됩니다.

 

사전을 만드는 일인만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지메(성실하다) 미쓰야라는 어리숙한 남자가 일의 중심에 있습니다. 사람 사귀는 일을 어려워하고 좋아하는 여자(가구야)에게 15장이나 되는, 내용도 고루한 연애편지를 보내는 남자이지만, 언어에 대한 감각이 예리하고 사전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물론 이름이 나타내는 것처럼 굉장히 성실하고, 마음 속에 없는 말은 절대 하지 못하는 매사에 진심인 남자죠. 그런 그를 알아보고 마지메를 스카우트 한 것은 사전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친 아라키였습니다. 그리고 뺀질이같지만 누구보다 마지메를 인정하고 자신이 맡은 일만큼은 완벽하게 해내는 니시오카, 날카로운 듯 하지만 업무 면에서는 누구보다 정확한 사사키가, 사전 [대도해]를 통해 말이라는 망망대해를 함께 건너가는 동료입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유머, 어리숙한 주인공과 그를 받쳐주는 주변 사람들, <사전>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등장하는 말에 관한 향연이 책을 읽는 내내 저를 즐겁게 해주었어요. 한 단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오기도 하고 사전 종이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래도 역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열정.이랄까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마지메를 보면 제 마음 속에도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지-라는 감정이 불끈불끈 솟아올랐어요. 그리고 진심에는 진심으로 응답하게 된다는 것도. 사실 니시오카의 시점으로 쓰여진 에피소드 부분이 가장 좋았습니다.

 

번역하신 분도 상당히 고생하셨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읽는 것만으로도 눈이 뱅뱅 돌 때가 있었는데 번역은 얼마나 더 어려울까요. 하지만 일본어를 전공한 저에게 있어서는 여러 면에서 좋은 공부가 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책, 그 중에서도 <사전>을 소재로 한 데다 마음 뜨뜻한 감동까지 있는 작품이니 서점대상 1위를 차지한 것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사전을 만든다는 한 배를 타고, 말이라는 바다를 헤쳐나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새삼 뜨겁게 다가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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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것들의 나라
가쿠타 미츠요 지음, 임희선 옮김, 마츠오 다이코 그림 / 시드페이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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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유독 제가 쓰던 물건들에 집착하는 편입니다. 직장에서 사용하는 머그컵, 책 읽을 때 애용하는 색연필, 10년 전 일본에서 구입한 열쇠고리, 중학교 때부터 사용한 샤프. 손에 익었던 물건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책상이나 방안을 온통 뒤집어놓는 한이 있어도 꼭 찾아내곤 했어요. 그래서 작년에 샤프를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정말 컸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구입했던 붉은색 샤프였어요. 그 당시에 3천원 정도 했었는데 그 때의 저에게는 3천원도 매우 큰 돈이라 샤프를 구입하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 붉은색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 '에랏'하는 마음으로 사버렸고 어쩌다보니 10년을 넘게 사용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거에요. 아무리 책상과 서랍을 뒤져도 나오지 않았고, 민망함을 무릅쓰고 직장동료들에게까지 물어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샤프 하나 잃어버린 일일 수 있겠지만, 한동안 제가 느낀 헛헛함과 상실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상상하던 대로였다. 내가 알고 있던 마츠오씨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내가 티끌만큼도 알지 못했던 세상이 그려져 있었다. 춥고 따뜻하고, 냉혹하고 부드럽고, 사무치도록 고독하면서 졸릴 정도로 아련한 느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서로 상반되는 모든 것들이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나는 마츠오씨의 그림을 통해 깨달았다. 그것은 결국 잃어버리는 것과 생기는 것, 삶과 죽음의 상반이기도 했다.

[잃어버린 것들의 나라]는 2005년 [대안의 그녀]로 제132회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 [죽이러 갑니다] 등등의 작품으로 이미 국내 독자와 친숙한 가쿠타 미츠요의 글에 마츠오 다이코의 그림이 더해진 연작 단편집입니다. 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과 가쿠타 미츠요의 이색적인 글이 생각보다 잘 어울렸어요. 어렸을 때부터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아이로 등장한 기지타 나리코가 주인공으로 유년시절, 고등학생 시절, 열정적인 연애의 시기, 결혼 후 아이를 갖게 된 때,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이라 짐작되는 시기로 나뉘어져 각 시기에 그녀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잃어버린 것은 물건일 때도 있고 나리코가 가지고 있던 능력일 때도 있으며 그녀의 소중한 사람일 때도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 모든 이야기들이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이에요. 염소와 이야기를 나누는 어린 시절의 나리코도 '그럴 수 있지' 하며 받아들이게 되고, 현실의 부모라면 전혀 납득하지 못했을, 키우던 고양이가 인간으로 환생해서 딸의 친구가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을 나리코의 부모님은 한 치의 의심없이 인정하기도 해요. 절절한 사랑에 빠진 나리코가 생령이 되어 다른 생령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나 아이를 잃어버린 나리코가 그 아이를 분실물창고에서 찾는다(물론 여기에는 숨겨진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는 내용들도 어딘가 현실감각이 떨어지면서도 묘하게 현실적인 구석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은 어쩌면.

 

생각해보라고. 운명이라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맺어지지 않겠어? 그런데 그게 제대로 되지 않고, 그렇게 제대로 되지 않는 게 너무너무 괴로워서, 기어이 생령까지 되어버린 정도니까, 맺어지지 못할 상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와 같은 현실적인 문구들이 담겨있기 때문일 겁니다. 감성적인 부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봄날 햇빛을 받는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이면서도 우리들의 '잃어버린 것'에 대한 쓸쓸한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까요. 더불어 우리 자신이 잃어버린 것, 잊고 살았던 것들에 대한 추억과 알싸한 느낌은 계절이 바뀌려하는 이 때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쿠타 미츠요의 글. 한동안 뜸했었는데 어째서 제가 그녀의 작품들을 그렇게 사서 모았었는지, 기억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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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 시오리코 씨와 기묘한 손님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1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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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것이 무슨 라이트노벨인가 싶었습니다. 라이트노벨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정의가 있겠지만 주로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 많이 들어간 문고본이라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희 학교 학생들 중에도 이 라이트노벨을 읽는 아이들이 꽤 있는데요, 저는 왠지 라이트노벨의 표지가 쪼콤;; 거부감이 들어서 읽기가 그렇더라고요. 나이도 나이인만큼 라이트노벨을 읽을 때는 아니잖아욧!! 핫핫!! 그런 제가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같은 표지의 책은 정말 처음 읽어봤어요. 왕가슴언니 @.@;;(책 안에도 실제로 이런 표현이 등장해요)가 무려 눈을 감고 책장을 넘기는 신기를 보여주십니다!! 표지 컬러 일러스트에 -고시지마 하구-라는 이름이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 측 표지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따름입니다.

 

이 책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책이에요. 오래된 책들의 책취가 품기는 고서당 비블리아를 운영하는 아리따운 아가씨 카오루코와 고서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대체구 고우라 다이스케가 책에 얽힌 미스터리, 의문들을 풀고 소소한 사건들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거대체구 고우라 다이스케는 어렸을 때는 꽤 책읽는 것을 좋아했던 모양이지만, 할머니로부터 손대지 말라는 경고를 들은 책에 손을 대고 크게 혼난 후 글자를 잘 못읽게 되었다고 하네요.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 부끄러워하지 않는 카오루코와 책을 읽지는 못하지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다이스케가 만났으니, 이것도 천생연분이랄까요. 고서당 비블리아를 드나드는 책등치기들과 고서들로 인해 인연을 맺게 된 개성적인 캐릭터들로 인해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시리즈의 제1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총 네 권의 책에 얽힌 사건을 풀어나갑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세키전집>, 고야마 기요시의 <이삭줍기>, 비노그라도프, 쿠즈민의 <논리학 입문>,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과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이름 정도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다른 두 작품은 처음 듣는 작품입니다. 카오루코의 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대단해서 어떤 배경에서 책이 쓰여졌고, 초판은 언제 나왔으며, 복각판은 언제 나왔는가 등등 모든 것을 줄줄 꿰고 있어요. 진정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래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머리가 멍~해지면서도 그녀의 직업은 고서당의 서점 주인이니까! 하며 납득하고 넘어갔습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그보다 동네에 이런 장소가 있다면 정말 날마다라도 찾아갈텐데요. 어쩌면 저를 아르바이트생으로라도 써주세요-라며 넙죽 엎드릴지도요. 

 

카오루코는, 아직은, 사람보다는 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제 생각은 약간 달라요. 책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닐까요. 물론 저도 책을 옆에 두고 있거나 읽고 있으면 행복하지만 역시 책과 사람 중에 선택하라면 사람을 선택하고 싶네요.  카오루코가 다이스케에 의해 조금씩 사람에 대한 마음을 열어가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합니다. 

 

책에 대한 책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표지를 한 책 치고는 꽤 재미있었어요. 책의 무게도 가볍고 크기도 작고 이야기들도 그리 무거운 편은 아니어서 이것도 결국 라이트노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요. 뭐,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났으니 상관없다는 생각입니다. 핫핫!! 하지만 왕가슴언니가 눈을 감고 책장을 넘기는 신기는 부디 이번 편에서 끝내주세요 @.@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낡은 책에는 내용뿐 아니라 책 자체에도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문구는 참 멋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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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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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내게 신경숙 작가의 책은 굉장히 처연하게 느껴진다. 마치 가을날 물에 젖은 나뭇잎을 바라볼 때의 기분이랄까. 지금까지 내가 읽은 작가의 책으로 미루어볼 때 '즐거운 내용은 아니다'라는 이미지가 머리에 박혀 있어 읽기 전에 그 내용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심호흡이 필요하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소화시키기 위해 여러 번의 문장의 곱씹음은 필수. 때문에 신경숙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읽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마음이 좋지 않을 때 읽으면 작품 속 등장인물의 감정에 금새 이입해버려 돌덩이를 매달아놓은 것처럼 축축 처지기도 한다.

 

총 여섯 편의 이야기가 실린 단편집이다. 연작 단편집은 아닌 것 같은데도 읽다보면 어쩐지 연결되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문장은 대부분 편지글이거나 대화체라서 읽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역시 느껴지는 감정의 무게는 남다르다.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특별히 나쁜(-ㄴ 경우도 있지만) 것만은 아니었지만 문체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삶의 빛깔은 밝은 색이 아니라 회색으로 다가온다. 쓸쓸함.일까. 17년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이직한 남편이 물 한모금 넘기지 못하고 바짝 야위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여자, 이사가기 전날 앞으로 그 집에 들어와 살게 될 타인에게 편지를 남기는 여자, 피부관리실에서 만나 함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악어를 키우던 다방여자와 피부관리사, 시골집에 내려가 지나간 날들을 추억하는 여자, 캐나다로 이민간 친구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작가 S에 대한 추억을 꺼내놓는 여자, 서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부석사를 찾아가는 한 쌍의 남녀. 그러고보니 글의 주인공은 여자이거나 여자가 빠지지 않는다.

 

조용하고 침착한 분위기는 같지만 <우물을 들여다보다>는 여기에 조금 호러적인 분위기가 가미되어 있다. 이사가기 전날 우연히 독경 테이프를 발견한 여자. 언니가 조카를 낳다 죽음을 맞은 후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한 그녀. 어느 날 달리기 코스 안에서 우물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닫혀져 있던 우물을 열어본다. 그 날 집안에서 느껴지는 한 여인의 기척. 분명 공포스럽고 두려울만한 상황인데도 그녀, 밥을 짓기 시작한다. 미역국을 끓이고 나물을 무쳐 상을 차리면서 자신의 반대편에 수저와 젓가락, 밥그릇과 국그릇을 하나씩 더 놓으며 독경 테이프를 튼다. 자신의 언니도 어디선가 그렇게 떠돌고 있다면 누군가 자신처럼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내가 이사갈 집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모골이 송연해질만한 일인데, 주인공인 그녀 입장에서 읽으니 -그래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이 되어 오히려 마음이 경건해진다.

 

새로 약국을 차리기 위한 자금을 부탁할 겸, 병환 중이었던 아버지가 자꾸 술을 드신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아버지의 상태도 보러갈 겸 시골에 간 그녀가 등장하는 <달의 물>. 누구보다 모범생이었던 오빠의 이혼과 그 이혼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조카 동이는 자꾸만 물을 찾는다. 모든 세월을 견뎌낸 후 갖게 된 순한 눈망울을 빛내며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아버지와 그 옛날 아버지의 외도로 상처받고 모진 삶을 살았음에도 여전히 아버지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쩐지 [엄마를 부탁해]의 그 부모님들 같아서 마음 한 켠이 시큰해졌다. 누가봐도 도시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개발되면서 막혀버린 우물에 숨막혀하며 그 마음을 아버지에게 토로하고, 오직 동이를 내어줄 수 없다는 마음에 무작정 시골집에 동이를 맡긴 오빠는 아이의 마음을 먼저 생각해야겠다며 동이를 데려간다. 왠지 막혔던 우물은 다시 복구될 것 같고, 동이도 더 이상은 과하게 물을 찾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희망적인 분위기로 마무리되지만, 작품집 전체에 맴도는 쓸쓸함은 여전하다. 그것은 자신조차 몰랐던 감정을 S의 죽음으로 인해 깨닫고 조심스레 꺼내놓는 <혼자 간 사람>도 마찬가지.

 

문체가 대화체 혹은 서간체여서 그런지 남의 넋두리를 계속 듣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어 연달아 작품들을 읽다보니 살짝 지겨워지기도 하다. 보기에는 일관성 없는 내용들이 이어지기도 하고, 이런 내용이 굳이 필요한가 싶기도 한, 군더더기가 약간 느껴지는 작품집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냥 휘릭휘릭 넘길 수가 없었다. 해설을 읽어보니 이 작품집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어머니 되기-라는데, 읽고보니 그런 듯도 하다. 여자, 어머니 되기. 그랬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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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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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처음 읽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저는 이 작품을 두 번 읽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는 중세를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이라는 것만 깨달았을 뿐 완독하기도 힘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꽤 어렸을 때 읽었으니 그럴만 하다 싶지만 [프라하의 묘지]를 읽고나니 그것 또한 움베르토 에코 작품의 특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처음 [장미의 이름]을 읽었을 때의 느낌 그대로, [프라하의 묘지] 또한 저를 굉장한 지적 혼란 속으로 몰고 가네요.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려지면 다시 몇 페이지를 읽게 되는 터라 엄청 끙끙대면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내용을 제대로 다 이해한 것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아요. 두 번째로 [장미의 이름]을 읽었을 때 감탄과 경의를 느꼈으니 [프라하의 묘지]도 두 번 읽으면 그렇게 될까요. 움베르토 에코, 독자들의 이런 고충을 알고나 있을런지요.

 

위조 문서 전문가이자 실력있는 책략가이기도 한 시모니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느 날 아침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형태의 옷차림으로 일어난 시모니니. 그는 자신의 정체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또 다른 인물을 캐내기 위해 자신의 일대기를 서술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때는 시모니니의 시각에서, 어떤 때는 달라 피콜라라는 사람의 시각에서, 어떤 때는 '화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글씨체를 따로 하여 차이를 두었다고는 하나 저에게는 참 혼란스러운 작품이 아닐 수 없었어요. 시모니니의 일대기 또한 파란만장하기 그지 없습니다. 자신의 안위와 책략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것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전쟁을 겪었다고는 하지만요) 이 일이 끝났다 싶으면 저 일에 끼여들어 위기를 맞기도 하니 대체 이 남자의 정체와 결말은 어찌될 지 궁금증을 자아내죠.

 

종국에는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허구인지조차도 헷갈리게 만들어버립니다. 유령의 목소리를 내는 시모니니, 숨겨진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둘째치고 작가의 상상력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장미의 이름]에 이어 [프라하의 묘지]를 읽고보니 '대작가'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나처럼 창의력과 상상력에 한계가 있는 사람들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있구나, 글은 역시 아무나 쓰는 게 아니야-와 같은 감정의 파도가 밀려온다고 할까요. 명심하세요. 이 작품을 읽을 때는 결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돌려서도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언제 어떻게 이 작품이 선사하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릴지 모르게 될테니까요. 으아. 저는 그저 지금부터 다시, 이 작품을 처음부터 읽어봐야겠습니다. 아, 이번에는 메모도 함께 하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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