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주를 듣는 소년
루스 오제키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4월
평점 :

[살고, 사랑하고, 귀를 기울여라!!]
저희 가족이 자주 찾는 식당이 있습니다. 집 근처에 있는 닭요리 전문점으로, 식구가 외식하는 유일한 곳이에요. 음식 맛은 말할 것도 없고 방문할 때마다 항상 따뜻하게 맞이해주시며, 저희 아이들을 정말 예뻐해주시는 곳이라 찬바람이 불어 따끈한 국물이 생각나는 겨울에는 일주일에 두 번도 찾았던 맛집입니다. 그런데 3월 말에 갑자기 사장님이 돌아가셨어요. 그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자기 찾아든 죽음에, 가족 분들보다는 못하겠지만 저와 옆지기는 상실의 아픔을 깊게 겪어야 했습니다.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요. 아이들에게 간식 챙겨주시던 손길, 다정한 말씀들에 마음이 활짝 열렸었나 봐요. 너무 신경을 썼는지 가게가 다시 영업하기 전 꿈 속에 사장님이 나오셔서 언제쯤 다시 문을 열 것인지 알려주시기도 했거든요.
가까운 지인의 죽음에도 이렇게 세상에 바뀌는 듯한 기분인데 갑자기 겪게 된 남편의 죽음에 애너벨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이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고, 어떻게든 아들을 잘 키워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안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들 베니가 이상 증세를 보입니다.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도 해요. 시든 상추의 한숨, 유리창의 비명, 가위의 빈정거림. 온갖 사물의 목소리를 듣게 된 베니의 세상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차고, 소년은 도서관에서만은 이 소음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도서관에 파묻힙니다.
베니의 아버지 케니 오는 혼혈이었는데요, 작가인 루스 오제키 또한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혼혈아로서 어린 시절 괴롭힘을 당했고, 당시의 특수한 문화와 맞물려 정신적인 문제를 겪었다고 해요. 어린 나이에 노출된 흡연과 음주, 안정되지 못한 거친 시기를 보냈던 한 때,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던 경험은 모두 책 속에 녹아들어 묘한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작가 자신이 바로 베니이자 알레프이자 케니 오로서 현신한 느낌이랄까요.
아마 다들 책의 소개 내용과 제목만으로 '이것은 아버지를 잃은 소년의 성장소설이다!'라고 짐작하셨을 거예요. 맞습니다. 베니의 성장소설 맞아요. 하지만 여기에 [우주를 듣는 소년]은 기후변화와 자본주의, 인종차별과 같은 현실에 만연한 문제들과 선불교 철학까지 담긴 굉장히 심오한 작품입니다. 게다가 주변 사물들이 말을 걸어온다는 설정은 '귀 기울여보라'는 작품의 첫문장과 어울리며 깊은 울림을 선사해요. 결국에는 '책'의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는 베니의 모습이 그려져 있죠.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한 사람들이 어떻게 아픔을 감내하며 생을 이어나가는지 무겁지 않게 반짝이는 문장들로 살아낸다는 것의 위대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베니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저는 특히 베니의 엄마인 애너벨을 응원하는 마음이 컸어요. 아무래도 저는 엄마이자 아내의 입장이니까요. 부부싸움 후 갑자기 죽어버린 남편을 원망하거나 마음껏 슬퍼할 겨를도 없이 생의 무게를 짊어진 그녀는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게다가 아이에게 이상증세까지 나타난다면요. 일은 계속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암울한 그녀가 저장강박증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랬던 애너벨이 스스로를 치유해나가는 모습 또한 코를 시큰하게 합니다.
책의 목소리와 베니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독특하고 감동적인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아마 한동안 주변 사물들이 범상치 않게 보이실 겁니다. 혹시 모르죠.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무언가의 목소리가 당신을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할지도요!!
** 출판사 <인플루엔셜>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