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호하게 살기로 했다 - 일, 관계, 인생 앞에 당당해지는 심리 기술
옌스 바이드너 지음, 장혜경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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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자기계발 책을 즐겨 읽지 않는다. '자기계발'이라는 단어에 부담감을 느끼는 데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가 전달하는 내용과 그 뉘앙스에 거부감이 있다. 뻔하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해서 성공했으니, 당신도 이렇게 해봐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아니라고,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책임. 내가 좀 자격지심이 있나-하고 몇 권의 자기계발 책을 넘겨봤지만, 내가 심술딱지인 건지 빈정이 상할 때도 여러 번 있다. 하지만 가끔은 독서에도 별미가 필요한 때가 있는 법. 자기계발서이기는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살기로 했다]는 제목에 궁금증이 생겼다. 대체 어떤 책인가, 너는 나를 한 번 사로잡아볼래, 라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띠지에 적힌 문구가 마음에 든다. '더 이상 착한 사람을 자처하지 말라'. 나는 호불호가 명확하고 성격이 까칠한 편이라 착한 사람은 못된다. 그런데도 마음 속 한구석에는 어느 정도의' 착함'을 버리지 못하는 내가 여전히 존재한다. 하기 싫은데 웃으면서 오케이 하고, 기분 나쁜데 아니라고 하고, 이 말을 해야 내가 속이 편할 것 같은데 애써 입술을 깨물며 참을 때가 있다.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 못된 인간으로 폄하되는 우리 사회. 아니, 내가 나도 내 것 좀 챙기고 살겠다는데 그러면 안돼? 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상황이 아니어서 못하겠다는데! 우와악! 이런 생각을 100퍼센트 상대에게 드러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그래서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관계의 기술. 이런 것은 좀 알아둘만하다.

저자는 '눈치 보지 않고 할 말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인생 기술'을 전수한다. 곤란한 부탁은 단호하게 거절할 줄 알아야 내 능력을 인정받고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고. 그러면서 내면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공격성에 주목한다. 그것은 바로 단호함이라 일컬어지는 것. 자신의 감정을 똑똑하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단호한 태도가 일을 보다 신중하게 처리하도록 도와준다고 조언한다. 심지어 자신 안에 있는 깨알같은 투지와 공격성을 깨워보자고까지 이야기하니, 초반에는 이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저자가 제시하는 단호함의 심리학은 총 9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1단계-8단계, <알아두면 좋지만 써먹으면 안되는 게임의 법칙>은 0단계로 분류되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부분은 <단호한 태도를 갖추는 8가지 전략>이다. 뚜렷한 목표를 정하라, 불가능한 일에 함부로 뛰어들지 말라, 답이 정해져 있다는 듯 자신있게 말하라, 불평꾼, 실패자, 겁쟁이를 멀리하라, 불리한 상황에도 겁먹지 않는 패기를 지녀라, 당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언어순발력을 키워라, 나쁜 소문에는 즉각 대처하라, 정기적으로 경쟁자의 상태를 파악하라-라니! 말이 쉽지 언어순발력이 한순간에 키워지는 것이던가, 나쁜 소문에 즉각 대처할 정도면 애초에 착한 태도 유지는 어떻게 해왔겠나, 정기적으로 경쟁자의 상태를 파악하려면 부지런하기까지 해야하는데! 결국 이 책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에 공짜 있던가. 책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본인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일인 것이다. 8단계에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 기술>이 소개되어 있으니 이 부분을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초반부터 흥미를 자극한 0단계에서는 써먹어서는 안되는 기술까지 전수해주니 이 조합들을 적절히 사용해야 할 터다.

업무도 어렵지만, 그 업무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인간관계다.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일이 더 쉬워지기도 어려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을 더 쉽게 하기 위해 자신을 억지로 착한 사람으로 만들거나 상대보다 낮은 자세를 유지한다면 더 곤란한 상황에 빠지기 쉽다. 내면에 존재하는 순수하고 긍정적인 공격성을 자극해 상대에게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단호하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업무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이 책은 '나도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해'라는 어조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처세술을 가르쳐준다. 자신을 돌아보고 나의 말과 행동이 어떠했는지 곱씹어볼 수 있었던 시간. 아주 오랜만에 괜찮은 자기계발서를 만난 것 같다. 요즘 인간관계에 있어 허무함을 느끼는 신랑에게도 일독을 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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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직지 1~2 세트 - 전2권 - 아모르 마네트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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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에서 은퇴한 노교수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귀는 잘리고 가슴은 창 같은 것으로 관통당했다. 사회부 기자 기연은 중세풍의 기괴한 살해방식에 의문을 품고 사건을 알아보는데, 교수가 죽기 전 교황청의 비밀 수장고에서 발견된 편지를 해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편지가 과거 교황이 고려에 보내진 것이라 추측했지만 죽은 교수는 그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다는 것도. 결국 살해동기가 직지와 연관이 있음을 짐작한 기연은 교수의 서재에서 두 개의 이름을 찾아내고 그 이름들이 사건에서 크게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교수가 기록한 대로 길을 떠난 기연. 그 곳에서 밝혀진 직지와 관련된 엄청난 사실들.

 

김진명 작가의 작품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후로 항상 챙겨보고 있다. 때로는 이것이 소설이 아니라 진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생생함을 느낀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독자들의 역사적 열망에 불을 지피는 작가가 이번에는 금속활자 발명, 구텐베르크, 한글 그리고 지금의 반도체 발명으로 연결되는 작품을 발표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이름인 '직지심경'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이 본래 명칭이다. 백운화상이 편찬한 마음의 실체를 가리키는 선사들의 중요한 말씀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직지와 구텐베르크의 활자는 나타난 시기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거듭해왔는데 지금은 직지가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78년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고려 말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상, 하 두 권으로 인쇄되었지만 하권만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작품은 어느 정도의 사실에 입각해 작가 자신의 상상이 더해져 완성되었다. 실제로 교황 요한 22세가 고려 충숙왕에게 보내진 것으로 보여지는 편지가 발견되었고 연구를 통해 안타깝지만 이 편지와 고려왕은 연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소설 안에서는 이 편지를 통해 고려의 금속활자가 몽골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확증을 기대했지만 죽은 교수가 그럴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직지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를 살해했을 거라는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살해현장은 내국인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순. 결국 기연은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죽은 교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1권에서는 사건수사에 중점을 두었다면 2권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직지가 구텐베르크에게 전해진 경로가 드러난다.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그런 그의 뜻을 따르려던 은수. 세종대왕을 저지하려는 세력에 의해 그녀는 아버지를 잃고 갖은 고난 속에 로마에 다다른다. 그 곳에서 우리 활자의 우수성을 선보인 은수지만, 결국 그 곳도 조선과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집권층에 해당하는 로마 교황청이 활자를 이용하면 많은 책을 만들 수 있고 그 많은 책이 결국 사람들을 무지에서 깨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고문하고 죽이려 한 것이다. 결국 독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도움을 받아 활자의 원리를 구텐베르크에게 전수하게 되고, 그녀는 '카레나'라는 이름으로 수녀원에서 성모로 추앙받으며 생을 마감했다.

 

생각했던 내용과 약간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교수의 사망원인에 대한 해설이 조금 미흡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한글창제와 직지가 애민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감동적이었다. 지배세력이 백성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글자를 몰라서였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일찍이 그 점에 주목했고, 백성들이 글자를 알아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 글자가 활자를 통해 더 널리 알려진다면 더 이상 백성들을 무지몽매한 존재가 아니요, 때문에 예전처럼 그들을 장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조선에서 보여지는 집권층의 모습과 은수가 활자를 선보였을 때 드러난 로마 교황청의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로 동일했다.

 

직지와 한글에 담긴 정신이 동일함을 보여주고,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큰 뜻을 전달하는 소설 [직지]. '템푸스 푸지트 아모르 마네트'. 세월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 시간이 흘러도 백성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남아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우리문화의 우수성과 자부심을 가슴에 담고 이제는 우리가 전달해나가야 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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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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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자신의 원룸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유일한 혈육인 오빠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여동생 이즈미 소노코. 그녀의 시체를 먼저 발견한 사람도 소노코의 오빠였다. 자살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한 그, 이즈미 야스마사는 사건 담당 경찰들에게 여동생이 자살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증거를 은닉하고 독자적인 수사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용의자로 떠오른 전 애인 쓰쿠다 준이치와 소노코의 절친이었던 유바 가요코. 둘 중 누군가 여동생을 죽인 건 확실한데 확증을 잡을 수 없다. 그런 야스마사를 바짝 뒤쫓는 형사 가가 교이치로. 야스마사의 복수를 저지하기 위한 가가 형사의 필사적인 노력은 과연 효과가 있을 것인가. 준이치와 가요코 중 누가 소노코를 죽인 것인가.

 

개정된 <가가 형사 시리즈> 중 두 번째로 접하게 된 작품. 소설 안에서 드러난 정황 상 소노코의 죽음의 원인이 준이치와 가요코인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원래 소노코의 연인이었던 준이치가 절친이었던 가요코와 바람을 피웠던 것이다. 어떤 편지를 남기면서 두 사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소노코의 모습은 나에게 예전의 기억을 불러일으켜 지켜보기가 매우 힘들었다. 쓰쿠다도 쓰쿠다지만 친구라는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후 야스마사의 독자적인 수사에서도 보여지는 그들의 뻔뻔함이란. 최소한의 예의와 도덕심도 갖추지 못한 모습을 보자니, 소노코가 부디 자살한 것만은 아니기를 바라게 되었다. 법에 어긋난다는 것은 아니지만 야스마사가 범인을 응징해주기를!

 

그런 야스마사를 저지하려하는 것은 예의 그 가가 교이치로다. 사건에 대해 날카롭고 냉철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잊지 않는 남자. 그의 배려는 이번에도 빛을 발해 야스마사가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자신의 미래를 망치지 않기를 바라는 모습이 담겨 있다. 야스마사와 그를 응원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다소 답답했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복수를 완성하고 난 뒤 맞게 될 야스마사의 어두운 미래와 결코 전과는 같을 수 없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결국 가가의 선택이 옳았음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이 매우 독특한 것은 야스마사가 찾아낸 사건의 단서를 모두 제공하면서 범인찾기는 독자에게 맡겼다는 데 있다. 뒤에는 범인의 정체에 대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내용이 봉인되어 독자가 직접 해제하게 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은 달갑지 않다! 정신없이 따라왔는데 목표를 놓친 듯한 느낌. 나는 뒷통수를 맞더라도 작가가 친절하게 범인을 알려주는 쪽이 훨씬 속이 후련하다. 게다가 더 어이없는 것은 봉인을 해제했음에도 범인이 누군지 모르겠어. 이게 뭐야. 나는 어디. 여긴 누구. 결국 인터넷으로 검색해 납득할만한 해설을 올린 포스트를 본 후에야 이해. 작가에게는 실험적인 작품이었을지라도 이런 것을 싫어하는 독자도 있다는 것을 부디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한권 한권 <가가 형사 시리즈>를 읽어나가는 재미가 크다. 다음에는 어떤 사건을 마주한 가가를 만나게 될까. 이미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할 작품이 출간된 지금이지만, 그래도 이 시리즈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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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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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없다. 정말 완벽하게 재미있고 훌륭하다는 말밖에는. 작가가 내 눈 앞에 있다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줘서 정말 고맙다고, 당신으로 인해 무척 즐거운 독서를 했다고 꼭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다. 마음 속에 흘러넘치는 찬탄과 감동이, 꾹꾹 눌러놓아도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듯 계속 흘러넘친다. 1월부터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읽어왔고 Best로 꼽을만한 작품들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톡톡 떠오르지만, 지금 상태로는 -늘 그렇듯-과연 이 작품을 뛰어넘는 작품이 또 있을까, 나는 혹시 2019년의 마지막 멋진 작품을 만난 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마저 느낀다. 어떤 작품에서 또 이렇게 100퍼센트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을 출간해 준 출판사와 번역가에게 절이라도 하겠다. 혹시 만나게 된다면. 이 작품은 꼭 소장해야 한다!

 

어느 날 새벽 여섯 시.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의 한 시골집에서 총격전이 벌어진다. 범인은 102세의 할머니 베르트 가비뇰. 피해자는 이웃인 드 고르. 심지어 그녀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을 향해서도 발포한다. 수사관 벤투라를 마주하고도 전혀 거리낌없이 자신의 말재주를 자랑하던 베르트는, 집 지하실에 일곱 구의 시체와 동물 뼈들을 숨겨놓고 있었다. 간직하고 있었다고 해야 옳을려나.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정의를 부르짖으며 지나온 자신의 삶의 궤적을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풀어놓는 베르트. 두 차례 전쟁을 겪고 여러 번 결혼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폭행하려는 나치와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거침없이 응징한 102세 할머니 베르트의 장대하고도 드라마틱한 자백이 시작되었다.

 

야생마같던 베르트의 매력에 이끌려 나이 차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애했으나 곧 그 야생미를 창녀의 자질이라 생각하고 폭력을 휘둘렀던 첫 남편. 전쟁 한복판에서 그녀의 집을 마치 제 집처럼 방문해 베르트를 성폭행하려던 독일 군인. 이 외에도 네 명의 전남편들과 또 한 명의 남자를 지하실에 묻었다. 그들을 살해한 이유를 여기서 밝히면 작품을 읽는 재미가 반감되니 나머지는 책을 통해 확인하시라.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남자들의 대부분은 어떤 일이 벌어지면 따귀를 때리기 위해 손이 먼저 올라가고, 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 우월감에 젖어 있었다는 것이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표면적으로는 한 여인이 살아온 역사를 드러내지만, 그 발자취는 20세기의 역사, 그리고 육체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이 걸어온 단계들,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베르트의 일생일대의 사랑이야기는, 성차별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인종차별을 고수해 온 이들에게 격정적인 한 방을 날린다.

"너, 얘기하고 살아."

"뭘?"

"더 이상......침묵하지 말라고."

"내 말 안 듣는 사람인 거 알잖아. 아무 소용 없어."

"그 인물 말고, 너 자신한테 얘기하라고! 네 얘길 들어......"

 

베르트가 마을에서 '갈보'로 불렸던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기 때문이다.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남자들만큼이나 자신도 만족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베르트가 살아온 시간 속 남자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남자들은 여자의 욕망과 여자의 만족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으니, 보통의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베르트를 그저 '갈보'라고 깎아내린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같이 일하면 생활비도 분담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오죽했으랴. 무슨 일만 벌어지면 때리기 위해 손이 먼저 올라가는 남자들에게 원한 것은 단 한 가지, 오직 자신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것을 베르트는 할머니 나나를 통해 배웠고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해냈다. 그런 그녀를 온전히 받아들여준 것은 미국인 루터. 깜둥이, 니그로, 이상한 열매로 온갖 차별과 박해를 받아온 그였기에 이 세상에서 베르트를 이해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애틋하고, 그만큼 더 마음이 아프고, 102세까지의 시간을 '살아낸' 베르트를 존경할 수밖에 없다. 이 멋진 이야기의 작가가 남성이라는 데 놀랐다. 그의 여성에 대한 이해와 가치관, 작품에서 보여지는 은유는 단연 멋지다.

 

탕!탕!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남자들을 향해 발포하는 그녀의 모습이 통쾌하다. 게다가 세월과 함께 다듬어진, 수사관마저 당황하게 만드는 그 노련한 입담이라니! 어찌 베르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존재함으로써 역사를 증명하는, 희대의 살인마이자 위대한 영웅. 여자라면, 아니 여자가 아니라도 어떤 차별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응원하지 않았을까. 유머와 재치, 웃음과 눈물을 오가며 진행되는 베르트의 고백 속에서 독자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마주하며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녀의 당당한 삶의 모습을 롤모델로 삼고 싶다. 살인은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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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씽 인 더 워터 아르테 오리지널 23
캐서린 스테드먼 지음, 전행선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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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중 깊은 숲속에서 무덤을 파고 있는 한 여성. 그녀의 이름은 에린이고, 그녀가 묻을 사람은 남편인 마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행복한 신혼부부였는데 이제 한쪽은 무덤을 파고, 또 다른 한쪽은 무덤에 묻히는 신세가 됐다.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다큐멘터리 감독인 에린과 은행에서 일하는 마크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으로 두 달 전 결혼식을 올리고 보라보라 섬으로 환상적인 신혼여행을 떠났다. 바다 한 가운데서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고 돌아오던 중 셀 수 없이 많은 지폐와 다이아몬드, 권총이 들어있는 가방을 발견한다. 그 가방의 주인으로 보이는 인물은, 이미 저 바다 아래 추락한 비행기 속에 갇혀 잠들어 있다. 마크의 갑작스러운 실직으로 미래 설계에 차질을 빚고 있던 그들은 가방을 차지하기로 결정하고, 황급히 신혼여행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귀국한 이후 돈과 다이아몬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시선, 연달아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에 에린은 불안감을 느끼고 혹시 자신이 망상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한밤 중 숲속에서 무덤을 파는 에린의 모습은 섬뜩하면서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필사적으로 무덤을 파는 모습은 누구라도 그녀가 남편을 살해했음을 짐작하게 하고, 그 와중에도 어느 정도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그녀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출소를 앞둔 세 명의 죄수와 사전 인터뷰를 마친 상태로 떠나온 신혼여행. 세 명의 죄수 중에서 유독 신경쓰이게 하는 에디 비숍으로부터 미리 준비된 선물까지 받자, 나는 분명히 이 에디가 그들 앞에 놓인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혹시 에디가 에린을 시험하는 것인가. 그녀가 보라보라 섬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미리 계획한 범죄인가. 그녀처럼 촉망받는 미래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지켜보고 싶었나.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만약 마크가 그 시점에 실직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그들은 그 돈과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기로 결정했을지 궁금했다. 그저 그 가방을 다시 바다 밑으로 보내버렸더라면. 바다 밑에 비행기와 숨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신고했더라면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 누가 이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인가. 이 돈과 다이아몬드만 있다면 마크는 새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고, 에린도 여유로운 생활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이미 에린에게는.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사건을 주도하는 결정적인 역할은 에린이 맡았다. 가방을 열어보지 말자고 마크가 만류했음에도 술에 취해 가방을 열어본 사람도 에린, 가방 안에 있던 휴대폰을 켜고 그들의 위치를 노출시킨 것도 에린, 다이아몬드를 처분하기 위해 비합법적인 방법을 알아본 것도 에린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공포영화에서 '혼자서는 절대 돌아다니지 마'라는 말을 들었을 때 혼자서 돌아다니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그런 캐릭터인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한 것은 에린이 아니라 마크가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이 바보야!'를 외치게 되는 에린의 모습에 보는 내가 답답하고 마크에게 심한 소리를 들어도 전혀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결말의 반전을 맞이한 순간-그러나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던 반전-그녀는 그저 사랑에 빠진 순수한, 그러나 가여운 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꿈의 휴양지로 불리는 보라보라 섬. 나도 신혼여행지로 염두에 두었던 곳이다. 결국 다른 곳으로 다녀왔지만, 설사 보라보라 섬으로 신혼여행을 앞두고 있다고 해도 내 앞에 이런 상황이 놓여있다는 걸 안다면 결코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것을 탐하는 순간, 현실적인 상황이 어떻든 마음 속에서는 이미 지옥이 시작된다. 결코 두 발 뻗고 잘 수 없는 시간이 열린다. 어떻게 평생, 누군가 이 많은 돈과 다이아몬드를 찾아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아우.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보라. 에린과 마크도 결국 그런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리즈 위더스푼이 영화화를 확정했다고 하는데, 보라보라 섬의 환상적인 전경과 작품의 전반적인 심리적인 압박감을 어떻게 스크린으로 옮겼을 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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