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할 말이 없다. 정말 완벽하게 재미있고 훌륭하다는 말밖에는. 작가가 내 눈 앞에 있다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줘서 정말 고맙다고, 당신으로 인해 무척 즐거운 독서를 했다고 꼭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다. 마음 속에 흘러넘치는 찬탄과 감동이, 꾹꾹 눌러놓아도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듯 계속 흘러넘친다. 1월부터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읽어왔고 Best로 꼽을만한 작품들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톡톡 떠오르지만, 지금 상태로는 -늘 그렇듯-과연 이 작품을 뛰어넘는 작품이 또 있을까, 나는 혹시 2019년의 마지막 멋진 작품을 만난 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마저 느낀다. 어떤 작품에서 또 이렇게 100퍼센트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을 출간해 준 출판사와 번역가에게 절이라도 하겠다. 혹시 만나게 된다면. 이 작품은 꼭 소장해야 한다!

 

어느 날 새벽 여섯 시.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의 한 시골집에서 총격전이 벌어진다. 범인은 102세의 할머니 베르트 가비뇰. 피해자는 이웃인 드 고르. 심지어 그녀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을 향해서도 발포한다. 수사관 벤투라를 마주하고도 전혀 거리낌없이 자신의 말재주를 자랑하던 베르트는, 집 지하실에 일곱 구의 시체와 동물 뼈들을 숨겨놓고 있었다. 간직하고 있었다고 해야 옳을려나.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정의를 부르짖으며 지나온 자신의 삶의 궤적을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풀어놓는 베르트. 두 차례 전쟁을 겪고 여러 번 결혼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폭행하려는 나치와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거침없이 응징한 102세 할머니 베르트의 장대하고도 드라마틱한 자백이 시작되었다.

 

야생마같던 베르트의 매력에 이끌려 나이 차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애했으나 곧 그 야생미를 창녀의 자질이라 생각하고 폭력을 휘둘렀던 첫 남편. 전쟁 한복판에서 그녀의 집을 마치 제 집처럼 방문해 베르트를 성폭행하려던 독일 군인. 이 외에도 네 명의 전남편들과 또 한 명의 남자를 지하실에 묻었다. 그들을 살해한 이유를 여기서 밝히면 작품을 읽는 재미가 반감되니 나머지는 책을 통해 확인하시라.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남자들의 대부분은 어떤 일이 벌어지면 따귀를 때리기 위해 손이 먼저 올라가고, 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 우월감에 젖어 있었다는 것이다.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표면적으로는 한 여인이 살아온 역사를 드러내지만, 그 발자취는 20세기의 역사, 그리고 육체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이 걸어온 단계들,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베르트의 일생일대의 사랑이야기는, 성차별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인종차별을 고수해 온 이들에게 격정적인 한 방을 날린다.

"너, 얘기하고 살아."

"뭘?"

"더 이상......침묵하지 말라고."

"내 말 안 듣는 사람인 거 알잖아. 아무 소용 없어."

"그 인물 말고, 너 자신한테 얘기하라고! 네 얘길 들어......"

 

베르트가 마을에서 '갈보'로 불렸던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기 때문이다.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남자들만큼이나 자신도 만족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베르트가 살아온 시간 속 남자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남자들은 여자의 욕망과 여자의 만족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으니, 보통의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베르트를 그저 '갈보'라고 깎아내린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같이 일하면 생활비도 분담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오죽했으랴. 무슨 일만 벌어지면 때리기 위해 손이 먼저 올라가는 남자들에게 원한 것은 단 한 가지, 오직 자신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것을 베르트는 할머니 나나를 통해 배웠고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해냈다. 그런 그녀를 온전히 받아들여준 것은 미국인 루터. 깜둥이, 니그로, 이상한 열매로 온갖 차별과 박해를 받아온 그였기에 이 세상에서 베르트를 이해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애틋하고, 그만큼 더 마음이 아프고, 102세까지의 시간을 '살아낸' 베르트를 존경할 수밖에 없다. 이 멋진 이야기의 작가가 남성이라는 데 놀랐다. 그의 여성에 대한 이해와 가치관, 작품에서 보여지는 은유는 단연 멋지다.

 

탕!탕!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남자들을 향해 발포하는 그녀의 모습이 통쾌하다. 게다가 세월과 함께 다듬어진, 수사관마저 당황하게 만드는 그 노련한 입담이라니! 어찌 베르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존재함으로써 역사를 증명하는, 희대의 살인마이자 위대한 영웅. 여자라면, 아니 여자가 아니라도 어떤 차별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응원하지 않았을까. 유머와 재치, 웃음과 눈물을 오가며 진행되는 베르트의 고백 속에서 독자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마주하며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녀의 당당한 삶의 모습을 롤모델로 삼고 싶다. 살인은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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