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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운명의 장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을 되뇌이게 하는 무수한 사건들. 사람들의 인생에서 단 한번 잘못 들게 되는 길목. 그 곳은 어디일까. 한번이 다른 한번으로 연결되고, 또다른 한번으로 이어지는 삶의 고비고비. 그 어딘가에 단 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그 사람이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었더라면 누군가의 삶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나카 유키노의 삶 속에서 그런 따뜻한 손의 간절함을 느꼈다. 잠시나마 호스티스로 일했고 험한 남자를 만나 유키노를 갖게 됐지만, 결국 엄마로서의 각오를 다지고 유키노를 낳아 소중히 길러주었던 그녀의 엄마 히카루. 신경계에 지병이 있어 흥분하면 의식을 잃었던 엄마의 병을 그대로 이어받은 유키노였지만 유년시절은 행복했다. 유키노를 낳기 전 히카루는 좋은 남자를 만나 재혼했고, 남자의 딸인 요코까지 네 식구가 편안하고 온화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히카루의 엄마 미치코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동네에 히카루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결국 사고로 히카루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키노는 미치코에게 맡겨져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 유키노는 과거 연인이었던 남자의 일가족을 방화로 몰살시킨 죄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동안 유키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그녀를 거친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는 유키노의 이야기. 반성하지도 변명하지도 않는 유키노와 달리 변호사는 재심 청구에 앞장선다. 그런 유키노의 주변을 알게 모르게 맴도는 어린 시절 친구 사토시와 쇼. 억울한 희생양인가, 희대의 악녀인가. 미디어는 그녀를 잔인하게 매도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유키노는, 그저 작은 행복을 바란 한 인간이었을 뿐, 오히려 운명의 장난에 놀아났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읽고 있고, 흥미를 느끼면서도, 읽기 싫다고 생각하게 되는 작품들이 더러 있다. 읽어내려가기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현실에는 이런 인생이 부디 존재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읽게 되는 이야기들. 때로는 현실의 어느 부분은 소설보다 더 잔혹하고 두려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런 일들에 직접적으로 고통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래서 면역 없이 접하게 되는 비극적인 이야기에, 이렇게 가슴이 도려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아무리 의문을 제기해봐도 떠오르는 것은 그저 '운명'이라는 단어 뿐. 그리고 유키노에게 간절했을 한조각 따스함. 주변에 유키노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과연 그이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을까.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오히려 사형에 처해진 자신의 삶에 편안함마저 느끼는 듯 보이는 유키노다.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인생. 너무나 쉬운 자신의 목숨에 대한 포기와 처절한 그 체념에 공감되어서 눈물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 눈물은 주변 사람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울어야 할 사람은 유키노였으니까. 가슴에 지나가는 이 서늘한 바람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입양한 아이를 끝내 죽게 만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하루종일 뒤숭숭한 마음에, 그 아이에게도, 유키노에게도 내밀어지지 못했던 따스한 손, 마지막까지 갈구했을 온기만을 헛되게 그려본다.
제6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 제28회 야마모토슈고로상 노미네이트에 빛나는 작품.
** 출판사 <비채>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