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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평점 :
![](http://image.yes24.com/blogimage/blog/y/u/yuliannaaj/IMG_SE-0c0022d6-2729-44fc-8aa9-c797ce2d331f.jpg)
사랑하는 마여사님이지만 정작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것이 몇 년만인가 싶다. 지금은 <미친 아담 3부작> 시리즈로 개정되어 나온 듯 하지만 예전에는 [인간 종말 리포트] 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작품에 홀딱 반했던 것도, 생각해보니 10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이다. [시녀 이야기]를 비롯, 출간된 그녀의 책을 종종 구입하고는 있지만 이렇게 마음 먹고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한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라 어쩐지 처음 접하는 작가를 대하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의미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던 [도덕적 혼란]. 요즘들어 민음사의 책을 자주 읽게 되는데 그 때마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힘'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책 역시 문장 하나 읽고 그 의미에 대해 곱씹어보는 시간이 꽤 길었던 작품 중 하나.
1939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태어난 그녀의 가족은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매년 봄이면 북쪽 황야로 갔다가 가을에는 도시로 돌아오는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런 생활 속에서 친구가 별로 없었던 애트우드를 지탱해준 것은 독서였다. 권위적이고 지배적인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들을 통해 페미니즘 작가로도 평가받는 동시에, 외교 관계, 환경 문제, 인권 문제, 현대 예술, 과학 기술 등 다양한 주제를 폭넓게 다룬다. 2000년 [눈먼 암살자]로 첫 번째 부커상을, 2019년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인 [증언들]로 두 번째 부커상을 수상한 애트우드는, '문학이 인류를 발전시켰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작가다([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장영은] 에서 인용).
총 열한 편의 이야기가 실린 [도덕적 혼란]은 마여사님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자 연작 소설집이다. 첫 번째 이야기인 <나쁜 소식>에서는 주인공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넬'이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그녀의 연대기를 기술한다. '나쁜 소식'으로 시작했지만 어딘가 평온함마저 느껴지는 넬과 티그의 아침은, 아직은 도달하지 않은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시간 속에 있고, 그녀의 이야기는 여동생 리지가 태어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리와 접대의 기술>은 이 작품집에서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였는데, 열한 살 해의 여름 넬은 어머니의 출산예정일을 기다리며 배내옷 일습(새로 태어난 아기를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올 때 따뜻하게 입히는 옷가지 세트)을 뜨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아주 오랜만에 아기를 가진 어머니는 평소와는 다른 느슨한 모습으로 넬에게 불안감을 안겨주며, 아버지 또한 직간접적으로 넬에게 윗형제로서의 역할, 딸로서 취해야 할 행동들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기를 출산하고 난 뒤에도 넬은 어머니의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또래 소녀들과는 다른 생활패턴을 이어가지만, 결국에는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 어머니에게 얼굴을 얻어맞았다.
내가 왜 해야 해요? 내가 말했다. 내 아기가 아니잖아요. 내가 낳은 게 아니에요. 어머니가 낳으셨잖아요.
p49
울며 깨어난 아기를 재우는 것을 지시하고 자신은 빨래를 정리하는 것을 선택한 어머니 앞에서 '나'를 주장하는 넬의 모습은 앞으로의 그녀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기대하게 만든다. 그 후 학창시절을 보내는 넬은 <나의 전 공작 부인>에서-
우리는 왜 이런 불운하고 짜증스러운 멍텅구리 여자들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가? 나는 의문이 들었다. 교과 과정에 포함되는 책과 시는 누가 고르나? 그것이 앞으로의 우리의 삶에 무슨 소용이 있나?
p137
같은 생각을 하며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남편으로부터 살해당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를 공부하면서, 어째서 이런 여자들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지 의문을 표하는 것이야말로 '나는 절대 이렇게 살지 않겠다!'라는 의지를 표명한 것과 같지 않겠는가. 그런 그녀의 인생은 <다른 곳>에서 '분투의 시대에 성장했고, 휴식이 지루했으며, 어디에서든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p150)'라고한 부분에서 절정을 맞이한 것으로 보여진다. 비록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시간이었지만 무언가를 그릴 수 있었으므로. 이후 넬의 삶은 '사랑' 때문에 한동안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지므로로.
당찬 소녀시절의 넬, 성인 여성으로서 성장하기를 소망했던 넬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사랑'을 선택한 탓에, 현실의 자신과 마음 속 이상향으로 삼았던 자신 사이에서 '도덕적 혼란'을 느끼는 모습만이 남아있다. 아직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인 티그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 그녀. 다른 여성들은 선택하기 어려운 길이었기에 어쩌면 그 삶도 넬에게는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중 하나였던 것일까. 하지만 이후 보여지는 그녀의 모습-티그의 아들들과 모노폴리 게임을 하면서 억지로 져주는 모습, 전처인 오나의 지시를 따르는 모습 등-은 개인적으로 무척 실망스러웠다. 나에게 그것은 '도덕'은 차치하고라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 나라면 아무리 사랑해도 티그 따위.
티그와 농장에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넬 또한 평범한 생활을 이어간다. 아이를 갖기 원하지 않는 티그로 인해 양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조차 '애정'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지만 어느 덧 아이들은 자라나고, 오나와의 관계도 정리되면서 넬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다. 과거를 추억하며 부모님에게도 노쇠의 시간이 다가오고, 이제 애도의 기간이다.
사실 완전히 이해했다고 보기 힘든 이야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넬의 삶 전체가 스냅 사진처럼 선명하게 다가오면서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나는 원했던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가슴 벅참, 애잔함, 씁쓸함 등 이 작품 하나로 생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맛보았다. 이러니 빠져들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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