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마녀 또는 아그네스
해나 켄트 지음, 고정아 옮김 / 엘릭시르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그네스 마그누스도티르는 살인자였다. 프리드리크와 시가와 공모하여 농부이자 약사인 나탄과 도축업자인 피에튀르를 살해한 후 집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 그녀의 죄목. 이미 유죄판결을 받고 참수형을 선고받은 그녀는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지방 관원인 욘 욘손의 집, 코르든사우 농장에서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소프바르뒤르 욘손(이하 토티)이 아그네스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녀를 교화의 길로 인도할 인물로 지목되었다. 바로 그녀, 아그네스에 의해.

 

고요하다-고 생각했다. 시린 눈의 계절. 모든 것이 침묵 속에 잠겨있는 듯한 이 시간에 아그네스조차 침묵한다. 홀로 그녀를 낳은 어머니, 이름 그대로 마그누스의 딸 마그누스도티르라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그녀는 부정한 관계의 산물이었고, 여느 여성들에 비해 똑똑했으며 깨어있었다. 그런 아그네스가 토티를 지목한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부목사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때, 그가 아그네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것. 아직 경험히 일천한 부목사는 그녀를 신앙의 길로 인도해 죄를 회개하게 하는 것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선택한다.

 

어머니에게마저 버림받은 아그네스는 이곳 저곳을 떠돌며 하녀로 생활하다 나탄의 눈에 띤다. 그에게 그녀는 '읽히지 않는 책'과 같았고, 그것은 당연했다. 아그네스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글을 읽을 줄 알고 이야기의 재미를 알며 명석했으므로.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 아그네스는 나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그의 가정부가 되고, 그와 함께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지만 현실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는 매우 달랐다. 나탄에게는 시가가, 로사가 있었으니까. 아그네스의 입에서 풀어내지는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잔혹한 살인자라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제가 젊고 단순하다면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을까요? 아뇨. 모든 비난은 프리드리크에게 돌아갔을 거예요. 그 애가 우리를 휘둘렀다고요. 그 아이가 돈이 탐나서 우리에게 나탄을 죽이게 했다고요......하지만 사람들은 제게 머리가 있다는 걸 알고, 또 생각하는 여자는 믿을 수 없다고 여기죠. 절대 결백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목사님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게 진실이에요.

 

p206

 

기독교의 시대에 종교를 믿지 않는 이를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선과 여자가 너무 영리하면 마녀 취급을 받아야 했던 시기는, 진실마저 외면하고 한 인간의 생명을 결정지어버린다. 돋보이는 것은 아그네스가 머무는 코르든사우 농장의 안주인인 마르그리에트의 행보다. 처음에는 아그네스를 살인자로만 여기고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던 마르그리에트. 그녀는 이후 아그네스가 보이는 행동과 말을 유심히 관찰하며 어느새 자신의 눈에 덮여 있던 편견의 장막을 걷어내고 아그네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쩌면 남성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여성들의 연대. 잔혹한 점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뒤에도 마르그리에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결합된 이 작품은, 읽는 내내 한겨울 추위를 온몸으로 맞아들이는 듯 내 가슴마저 시리게 만들었다. 아그네스의 기록을 발견한 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작가는, 과연 바람결에 어떤 소리를 들었을까. 여성에 대한 비하와 뛰어난 능력에 대한 두려움과 멸시는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왔고 지금도 어떤 장소에서는 현재진행형이다. 죽음 앞에서 공포에 질려있었으면서도 '내면의 자신'에게 매달려 소중한 무엇을 놓지 않으려 애썼던 아그네스에게서, 또 다른 형태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모습을 본다.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고요한, 비통에 젖은 목소리에 가슴이 종잡을 수 없이 펄떡거린다.

#  

 그들은 나를 모른다.

 

나는 조용히 지낸다. 세상에 나를 닫고, 마음을 다잡고, 아직 빼앗기지 않은 것들에 결연히 매달리자고 마음먹는다. 나마저 나를 흘려보낼 수는 없다. 내면의 나 자신에게 매달리고,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손이 틀 때까지 빨래하고 낫질하고 부엌일을 하며 쓴 시들, 내가 기억하는 사가들, 내게 남은 모든 것을 가라앉히고 물속으로 침잠한다.

 

 p055

 

 **<엘릭시르>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