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 수첩(브뤼노 몽생종, 이세욱 역. 정원출판사. 2005. 606쪽)
2. 목숨전문점(강윤화. 실천문학사. 2015. 216쪽)
: 단편집. 첫 작품을 읽고 판타지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여기, 지상에 발 딛고 서 있지만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 회피가 아니다. 어떻게든 남은 삶을 이어가 보려고 치는 발버둥. 하지만 해피엔딩은 없다. 그래서, 마음이 쉽지 않았다.
3. 강하고 아름다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김슬기. 클레이하우스. 2025. 368쪽)
: 강하고는 드디어 죽음을 결심한다. 배달 노동으로 가까스로 이어오던 삶. 가장 친한 친구라 믿었던 애는 강하고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남자를 낚아채고서도 둘이 계속 하고를 등쳐먹고, 알면서도 호구 노릇을 하던 하고는 이제는 지쳤다.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내고 철거를 앞둔 옥탑방 구석에 누워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죽음을 기다리는데, 세 명의 저승사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모습이 조금 이상하다. 저 근육들은 뭐지? 저승사자들에게 운반된 하고는 얼마 후 눈을 뜨는데, 정갈하게 정리된 집안이다. 여기가 사후세계인가?
강하고의 성장담. 로맨스도 살짝 있다. 꿈같은 이야기이고, 강하고가 너무나 부러웠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강하고의 의지. 되고자 하는 모든 걸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근처에만 가도 성공 아닌가. 이 빡빡한 자본주의 사회에선 말이다. 물론 옆에서 도와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하지만 뭐, 없을 수도 있는 거고. 기존에 읽었던 소위 '힐링 소설'과는 결이 좀 다르지만 진짜 힐링을 주는 동화같은 이야기.
4. 바다의 긴 꽃잎(이사벨 아옌데, 권미선 역. 민음사. 2022. 476쪽)
5. 위대한 피아니스트 1.2.(해럴드 C. 숀버그, 박유진 역. 조은아 (감수). 클. 2021. 444쪽, 452쪽)
6. 페드르와 이폴리트(장 라신, 신정아 역. 열린책들. 2013. 200쪽)
: 그리스 신화의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 이야기를 각색한 희곡. 내용은 알려진대로, 의붓아들을 사랑한 페드르와 의붓아들인 (죄없는) 이폴리트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신화에서와는 달리 이 희곡에서 초점을 맞춘 건 인간의 정념. 결국 인간은 애욕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구렁텅이로 이끄는 어리석은 존재일 뿐이다. 그가 전쟁 영웅이든, 고귀한 혈통이든 상관없이(사실 저자는 페드르의 정념에 휘둘리는 혈통을 강조하기는 한다) . 그리고 이 정념은 부수적인 피해마저 낳는다. 사실 이폴리트는 죄가 없다. 그리고 그를 사랑한 적국의 공주 아리시도 죄가 없다. 어쩌면 이 정념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라 할 수 있는 테제는 오히려 이들의 죽음으로 이득을 얻는다. 왕국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 결국 기득권자의 권위와 권리를 강화하기만 한 결말인 것이다. 비록 그게 정의 실현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을지언정.
당대에 이 이야기가 얼마나 인기를 얻었는지와는 별개로, 읽으면서는 그리스 신화를 읽을 때와는 또다른 삐딱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7. 운명의 꼭두각시(윌리엄 트레버, 김연 역. 한겨레출판. 2023. 344쪽)
: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 페르모이. 이곳에는 퀸턴 가가 있다. 킬네이에 자리잡고 있는 이 가문은 대기근 때 토지의 대부분을 마을 주민들에게 나눠준, 영국 출신의 여인 애나 우드컴을 증조 할머니로 두고 있다. 그녀의 증손자인 윌리의 엄마 에비도 영국인이다. 아일랜드는 1차 대전 후 영국에게서 독립할 수 있으리라 희망했지만 오히려 영국은 아일랜드에 군사를 파견했고, 이들은 결국 킬네이의 퀸턴 가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킬네이 저택이 이들에 의해 불타고 아버지 윌리엄과 윌리의 두 여동생이 사망한 것. 윌리는 엄마와 하녀와 함께 시내로 이사하는데, 엄마는 계속 우울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위스키에 점점 더 의존하고 멀리 있는 부모에게서 온 편지를 읽지도 않는다. 이에 윌리의 외조부는 에비의 언니에게 이야기를 해서 윌리의 이모와 사촌 메리언이 방문을 한다. 윌리는 메리언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게 되지만, 운명은 그들을 함께 두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그리고 책을 덮은 후 운명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했다.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이끌어가는 운명. 책 제목은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해질 걸 알면서도 운명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인간의 하찮음을 뜻하지만 인간은 그래서,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할 수 있다. 윌리로 하여금 킬네이를 떠날 수 밖에 없게 한 운명, 메리언을 등질 수 밖에 없게 한 운명. 분명 윌리는 그러지 않음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러지 않음을 선택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니까. 그러나 윌리는 그럴 수 밖에 없음을 받아들인다. 바로 그 지점이 위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 윌리의 방법이 옳았다는 게 아니라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그것을 받아들였음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작은 존재인 인간이 운명을 감내하는 방식인 것.
8. 복수의 여신(마거릿 애트우드,산디 토츠비그,시엔 레스터,카밀라 샴지,엠마 도노휴,커스티 로건,캐럴라인 오도노휴,헬렌 오이예미,린다 그랜트,키분두 오누조,엘리너 크루스,수지 보이트,앨리 스미스,레이철 시퍼트,클레어 코다,스텔라 더피, 이수영 역. 현대문학. 2024. 368쪽)
: 주로 멸칭으로 쓰이는 'Virago'를 주제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행태에 경종을 울리고 진짜 영웅적이고 불의에 맞서는 여성상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된 앤솔러지이다. 사실 기대만큼 세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온화한 거 아닌가? 엄청 부드럽게, 많이 봐주는구만. 그래도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다 인상깊었지다. 가장 좋았던 건 「보리수나무의 처녀귀신」. 「진짜 사나이」와 「가사 고용인 노동조합」도 좋았다.
9. 느릅나무 밑의 욕망(유진 오닐, 신정옥 역. 범우사. 2004. 178쪽)
: 작가의 초창기 희곡. 뉴잉글랜드의 척박한 농장. 농장주인 캐봇의 세 아들 중 첫째 시미언과 둘째 피터는 반복되는 노동에 지쳐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안일을 도맡아 온 셋째이자 배다른 동생 에벤이 현금을 줄 테니 농장의 형들 몫을 자신에게 팔고 골드 러쉬가 한창인 캘리포니아로 떠나라고 하자 둘은 흔쾌히 떠난다. 둘이 떠나던 날 여행을 갔던 아버지 캐봇이 세번째 부인은 에비와 함께 돌아온다. 에벤은 농장의 소유권을 당당히 얘기하는 에비가 싫지만 곧 욕정에 굴복하여 에비와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되고, 에비는 곧 임신을 한다. 캐봇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해서 아들이 태어나자 아이에게 농장을 물려줄 거라고, 에벤의 몫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는데 이 농장이 돌아가신 엄마의 농장이라고 생각하는 에벤은 이 얘기를 듣고 격분한다.
처음부터 대사들이 꽤 거칠어서 살짝 놀람과 흥미가 동하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 이 작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시작했다 - 교정교열이 너무 엉망이어서 짜게 식었다. '숨겨 논(35쪽)', '일부로(36쪽)' 같은 게 너무 많다. 이걸 제대로 교정해서 이후에 신판이 출간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하필이면 이 판본을 사서... 사실 제목만 봤을 때는 그래도 낭만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을 줄 알았다. '나무 밑'이라잖아. 하지만 처음 무대 배경 설명에서부터 내 짐작은 틀렸음이 드러났고 - 농장 집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느릅나무를 상상하니 미리부터 이들의 욕망이 어디로 흐를 지 걱정스러웠다. 당대에 뿐 아니라 현대에도 충분히 문제적일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보여주고자 하는 파멸에는 충분히 타당했다.
10. 닥터 지바고 상. 하(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박형규 역. 열린책들. 2001. 416쪽, 520쪽)
11. 한 사람에게(김멜라,김보영,김숨,박솔뫼,정영선. 곳간. 2026. 228쪽)
: '한 사람에게 띄우는 편지'로, 환경 문제를 주제로 한 앤솔러지. 대체로 다 마음이 아팠다. 그 중 가장 날 힘들게 한 이야기는 김보영, 「축제」.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그래서 너무나 미안했다. 내가 흘린 눈물이 책 속으로 흘러들어가 리로의 길을 열어줄 수만 있다면 몇날 며칠이고 울 수 있는데...
12. 하드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마크 트웨인, 전봉룡 역. 신원문화사. 2005. 303쪽)
: 표제작인 단편 한 편과 중편 「고난의 길」이 실려 있다. 표제작은 전국에서 가장 정직한 마을이라는 하드리버그에 원한을 가진 한 남자가 마을 전체를 타락하고 그걸 폭로하기 위해 일을 꾸미는 내용이다. 인간이 가진 욕심을 이용하는데 한편으로는 어리석고 한편으로는 그저 인간적일 뿐인 주민들이 벌이는 소동이 가벼운 문체로 보여진다. 사실 정말 재밌었던 건 「고난의 길」 . 골드 러쉬 시대 은과 금을 찾아나선 주인공의 좌충우돌인데, 한숨이 나오면서도 저자의 블랙 유머에 계속 피식거리게 되는 유쾌한 이야기였다. 주인공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겪는 모험 뿐 아니라 희한한 자연 현상들에 더해 심지어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까지 이야기되면서 저자 특유의 신랄한 사회 풍자와 유머가 독자를 즐겁게 한다. 딱 트웨인다운 소설.
13. 불가능한 파랑의 궤도(네이선 밸링루드, 심연희 역. 문학수첩. 2026. 416쪽)
: 1930년대 화성 주거지구. 아버지와 주방엔진 왓슨과 함께 식당을 꾸려가고 있는 열네 살 애너벨은 마을의 영화 상영을 앞두고 식당 문을 일찍 닫으려하는데, 수상한 남자가 와서 커피를 청하며 시비를 걸고 결국 그는 애너벨과 아버지를 위협하여 가게의 먹을 것과 물, 연료를 몽땅 털어간다. 그의 이름은 사일러스. 애너벨은 그들이 가져간 것들 중에 1년 전 지구로 떠난 엄마의 목소리가 담긴 실린더가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무기력하고 유약한 아버지가 가게에 침입한 다른 건달들과 시비가 붙어 사고로 사람을 죽이고 유치장에 갇힌 틈을 타 직접 그 실린더를 찾으러 가기로 한다. 1년 전 지구에서 도착해서 멈춰 있을 뿐인 우주선 조종사 조가 사일러스 일당 중 일부와 접촉하는 걸 본 애너벨은 그에게 앞장을 서도록 협박하고, 왓슨의 다리를 무한궤도로 개조한 뒤 조가 소개한 사막 배달부 샐리와 함께 붉은 사막으로 향한다.
스페이스 웨스턴이라기에 읽을까말까 망설였다. 난 웨스턴은 별로고 스페이스도 딱히... 그런데 이건 정말 재밌었다. 사실 배경이나 설정 등은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다. 지구를 배경으로 한 환상 문학이라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나는 화성을 모르니. 중요한 건 애너벨의 성장 서사였다. 어떤 어른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아이라는 이유로 정보조차 주지 않고 제대로 된 설명도 해주지 않으며 설명을, 정의구현을 요구하는 아이의 눈도 바로보지 못하면서 묵살하기만 하는 상황에서 애너벨은 움츠러들고 때론 눈물까지 흘리면서도 기를 쓰고 자신의 길을 간다. 울고 싶지 않고 당당하게 처신하고 싶지만 자기도 모르게 울먹이고 자기도 모르게 숨기도 하면서도 목적을 잃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잊지 않는 애너벨. 그리고 이 대견한 소녀의 마지막 선택까지. 심드렁하게 시작했다가 뭉클하게 끝냈다. 부디 애너벨이 끝까지 평안하길.
14. 도깨비불 게스트하우스(범유진. 모모. 2026. 316쪽)
: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헤어진 언니가 '먼 곳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변호사에게 전해 들은 모미. 180일 동안 언니가 운영하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조카를 돌보면 돈을 준다는 말에 어차피 대학 기숙사에서 쫓겨날 상황이던 모미는 산 속 게스트하우스로 향한다. 그런데 열네 살 조카는 눈도 잘 안 마주치고, 게스트하우스 건물도 좀 이상해서 갑자기 벽에서 알 수 없는 존재들이 튀어나온다. 사실 이곳은 사연있는 요괴들이 머무는 곳. 가끔 이곳을 발견하는 인간들도 묵어가는데, 아무나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심연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요괴들은 이렇게 방문하는 인간들의 어둠을 흡수한다.
그저그런 힐링 소설이면 어쩌나, 나 이 작가 좋아하는데 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인간 군상들도, 요괴들도 또 그들 각각의 사연도 어느 하나 전형적이거나 짐작 가능하지 않았고 캐릭터들이 모두 생생했다. 못된 인간이라고 모두 개과천선하지도 않았고 엄청나게 사이다가 폭발하듯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입체성, 누구도 완벽하게 착하지 않고 누구도 완전히 악하지 않은 모습들을, 약하디 약하지만 힘을 내어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들을 잘 스케치했다. 모미와 언니의 사연도 현실적이면서 환상적이었고. 즐겁게 읽었다. 뒤의 작가의 말에 그려진 귀여운 캐릭터들을 먼저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책 읽기 전에 조금이라도 스포 당하는 게 싫어서 알라딘도 안 보고 읽었더니 작가가 상상했던 요괴들과 내가 상상한 요괴가 엄청 차이가 컸다. 이 책의 후속작이나 프리퀄이 나왔으면 좋겠다.
15. 첫 여름, 완주(김금희. 무제. 2025. 224쪽)
: 성우 일을 하는 열매. 친하게 지내던 언니 고수미가 돈을 빌린 후 잠적하고, 집 보증금까지 날린 열매는 고수미의 고향 마을에 가보기로 한다. 수미가 늘 얘기했던 완주. 그곳으로 향하던 시골 버스에서 어딘가 이상한 동네 청년 어저귀를 만나고, 매점과 장의사를 같이 하는 수미 엄마 집에 살면서 매점을 돌보고 동네 사람들과 조금씩 안면을 튼다. 옆집 중학생 한양미, 완주로 내려와 틀어박힌 중견 배우 정애라, 완주 개발에 적극적인 수상쩍은 흰옷 신사 등.
(스포)
어저귀와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걸. 좀 담백한 사람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굳이 설탕 안 뿌려도 맛있을 거 같았다구요. 그치만 위로가 되는 따뜻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역시나 결말 부분도 어저귀... 뭐 그래도 이 정도면 해피엔딩이지. 완주라는 마을에서 아직도 열매가 그렇게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16. 하우스메이드 3(프리다 맥파든, 정미정 역. 북플라자. 2025. 488쪽)
: 밀리는 엔조와 결혼해 벌써 첫 아이가 12살이다. 둘째는 7살. 뉴욕의 작은 집에서 비좁게 살던 가족은 무리를 해서 롱아일랜드의 낡고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오는데, 이사 첫날부터 옆집 여자는 엔조에게 추파를 던진다. 엔조 앞에서 밀리를 깔아 뭉개는 것도 서슴치 않고. 게다가 둘째 스쿨버스 배웅을 나간 아침, 둘째와 동갑인 아들이 있는 또다른 동네 엄마는 음모론과 편집증을 숨기려 하지 않으며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옆집 여자네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 간 밀리네는 억지로 그 집 가정부를 자기 집에 일주일에 한 번 들이게 되는데, 이 여자가 좀 이상하다. 밀리의 물건을 뒤지는 것 같고, 밀리를 빤히 쳐다보기도 한다. 게다가 밤에는 집에서 이상한 삐걱 소리도 난다.
초반부터 엔조 때문에 짜증나서 혼났다. 정말 전형적으로 눈치없고 속 터지게 하는 스타일. 예전 시리즈에서 읽었던 단호하고 결단력있는 모습은 어디갔지? 밀리가 느끼는 감정들도 주위에서, 인터넷에서 흔히 듣고 볼 수 있는 이야기들과 다르지 않다. 대체 이 이야기가 이전 시리즈와 연속성이 있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사건의 해결도 뭐... 마지막에 작은 반전(?) 때문에 그나마 '하우스메이드'라는 제목을 쓸 만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읽으면서 그 부분을 짐작 못 한 것도 아니다. 추리 실력이라고는 바닥인 내가 알았으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알겠지. 이 시리즈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였다.
17. 고양이가 정답이다(장우석. 나비클럽. 2026. 240쪽)
: 연작 소설집. 고등학교 수학교사 주관식이 여러 사건에 휘말리며 겪는 이야기들이다. 사건 해결에 수학이 중요한 키가 된다. 현실에 있을법한 이야기들이지만 또 현실에선 그렇게 확실하게 해결되지 못할 거 같기도 하다. 대체로 대부분은 해피엔딩이라 잘 읽었지만 개중에는 새드 엔딩도 있다. 그게 현실이니까. 아니, 현실에는 새드 엔딩이 더 많긴 하지만. 주관을 가진 고등학교 교사이자 고양이 탐정으로도 활약하는 주관식의 다른 이야기도 궁금해졌다.
18. 도깨비 사냥(임이정. 안전가옥. 2024. 288쪽)
: 어린 시절, 집에 불이 났다. 수오는 형을 따라 숲에 가기 위해 집을 나왔는데 부모님은 숲에 도깨비가 있다고 가지 말라고 했지만 형은 괜찮다고 했다. 결국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둘만 남은 형제는 삼촌 집에서 학대를 견디며 힘겹게 살아오지만 쫓겨나 쉼터를 전전하고, 어느 순간 형 태오는 사라져 수오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형을 찾아 나선 수오는 마지막으로 형과의 접점이 있던 조아랑을 찾아서 그녀를 미행한다.
읽으면서 인생의 순간마다 해야만 하는 선택에 대해 생각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또다른 잘못된 선택을 부르고야마는 연쇄성에 대해. 처음 한 번, 그 결정적인 순간에 태오가 솔직했더라면 형제는 과연 어떤 생을 살았을까? 태오는 왜 그렇게 착하면서도 악한 걸까? 동생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동생이 뭘 원하는지는 왜 생각 안 하는 거지? 그냥, 인생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는, 젊을 때의 착각 때문인가? 어쩌면 이런 얘긴 현실에서 흔할 지도 모른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이걸 그냥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라고만 안타까워 하고 말 건가?
19. 옛날에 대하여(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10. 384쪽)
: 저자의 '마지막 왕국' 시리즈 중 두번째. 난 첫번째는 안 읽었다. 소설로 분류되어 있지만 에세이 같기도 하다. 중간중간 작은 에피소드들이 나오긴 하지만 대체로 저자가 고찰하는 '옛날' - 과거나 추억과는 구분되는 - 이야기들이다. 저자는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옛날을 소환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저자가 다룰 수 있는 모든 언어 - 그리스어, 라틴어 뿐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히브리어에 더해 저자 자신이 만들어낸 신조어(프랑스어) 까지 - 를 동원해 옛날을 이야기하는데, 각 챕터는 짧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문장들이 너무나 아름다워 이 책을 읽는 자체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위의 책을 읽고 머리와 가슴이 쓰려서 집어들었는데 충분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이 책에 집중하면서 오히려 약간의 답을 얻은 느낌. 특히 "물고기는 고체 상태의 물이다. 새들은 고체 상태의 바람이다. 책은 고체 상태의 침묵이다.(48쪽)"는 문장은 오랫동안 입 안에서 굴렸다.
20. 라비우와 링과(김서해. 위즈덤하우스. 2024. 128쪽)
: 대학생인 주영은 알바로 정신없는 와중에 전공과목에서 D를 받는다. 기숙사에서 쫓겨날까봐 걱정이 된 주영은 담당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고, 성적을 정정해 줄 순 없지만 자신이 하는 국제 교류 프로그램에 지원하면 다음 학기에 유리할 것이라고 권하고, 주영은 어쩔 수 없이 합류하는데 그곳에서 방학 동안 기숙사 룸메이트인 이네스와 마주친다. 사실 방학 동안 있을 기숙사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짐을 한가득 쌓아놓은 채 메모만 한 장 남기고 일본 여행에 가버린 이네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지만, 이 프로그램에서 마주친 이네스는 상냥하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독자들이 제목을 읽고 '라비우는 누구고 링과는 누구야?'라고 생각하길 바랐다는데 정확하게 내가 그랬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독자도 많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평범할 수도 있었을 이야기를 아름답게, 단어 뜻 그대로 상냥하게 풀어낸 작가의 필력이 좋았다. 일상 속의 특별한 순간. 숨가쁜 삶에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주영에게 이런 순간들이 찾아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21. 작은 종말(정보라. 퍼플레인. 2024. 372쪽)
: 단편집. 출간된 지 좀 된 작품집이라 상당수의 작품들은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던 것들이었지만 다 다시 읽었고, 다 좋았다. 최근 작품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비판을 하는 것도 좋았고. 가장 좋았던 건 「은둔자의 영혼」.
22. 마음만 먹으면(장진영. 자음과모음. 2021. 128쪽)
: 세 편의 단편. 첫번째 작품 「곤희」가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나머지 두 작품들도 각자의 느낌으로 다르게 인상적이었다. 각각의 소재로 더 긴 이야기를 읽고 싶을 만큼. 그리고 각 작품 등장인물들의 미래를 알고 싶을 만큼.
23. 안나 O(매슈 블레이크, 유소영 역. 문학수첩. 2025. 504쪽)
: 법 심리학자이자 수면 연구가인 벤. 4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안나 O'사건의 의뢰를 받는다. 안나는 상류층 출신 여성으로, 가족과 놀러 갔던 농장 오두막에서 함께 동업하던 친구 둘을 죽이고 부모에게 '미안, 내가 죽인 거 같아'라는 메시지를 남긴 후 잠에 빠져들어 4년 동안 깨어나지 않고 있다. 대중들은 그녀가 살인을 저질렀을 당시 의식이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 그렇다면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두고 의견이 갈리며 아직도 격렬히 토론 중이다. 정부에서는 국제인권위원회에서 안나의 석방을 촉구함에 따라 서둘러 안나를 깨워 재판을 받게 해야 한다. 그래서 벤이 투입되는 것이다. 안나는 벤이 일하고 있는 런던 한복판의 수면 클리닉으로 이송된다.
'체념증후군'이라는 게 정말 있는지 궁금해서 검색해 봤는데, 의학적으로 인정된 용어는 아닌 것도 같다. 다만 이 책 본문에서 벤이 언급하는 스웨덴에 들어온 난민 아동 이야기는 진짜인 듯 하다. 이 사례는 마음 아프지만 안나의 사례는 좀 이상하긴 하다. 오랫동안 몽유병에 시달린 안나는 자신이 자는 도중 폭력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사건 직후 부모에게 문자까지 보냈다. 그럼 그녀는 의식이 있는 상태였을까 아니면 몽유병 증상인걸까? 사실 벤이 안나를 깨우기까지 긴 얘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안나는 꽤 적절한 시점에 깨어나고 그 뒤의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이론 부분이 지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부차적인 여러 사건들과 과거 얘기 때문에 지루하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스릴러들처럼 속도감이 있지는 않다. 게다가 부수적인 피해들이 좀... 뭐랄까, 억울하지 않나 싶다. 그래도 재밌게 읽었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된다면 읽어볼 것 같다.
24. 카카듀(박서련. 안온북스. 2024. 360쪽)
: 1920년. 화자 이경손은 사촌 누이가 남편이 있는 상해로 아이 여덟을 데리고 가는 길을 도운다. 이때 경손은 신학교를 나와 영화학교에 들어가려던 참. 한때 존경하고 따랐던 매형은 3.1에 연루되어 옥살이 끝에 상해로 피신했고 누이 또한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나왔다. 그나마 신문을 통한 모금 운동으로 상해로 갈 여비를 마련하여 이주하는 참에, 경손보다 한 살이 많은 첫째 조카 미옥은 경손에게 "에수보다 예술"이라는 말을 던진다. 6년 후, 이제 영화감독이 된 경손은 부산에 내려와 관부연락선을 찍으려 하는데 마침 터미널에 고운 여성이 지나간다. 이는 이름을 '앨리스'로 바꾼 미옥이었다. 사실 미옥은 포와(하와이) 생으로 미국 여권을 갖고 있는 미국인. 결혼하고 이혼 해 아이를 품은 채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미옥 아니 앨리스. 그리고 1년 후, 경손의 새 영화 오디션장에 앨리스가 나타난다. 앨리스는 경손에게 끽다점을 차릴 거라면서 동업을 제안하는데...
경손의 마음을 따라가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내가 그 시절 그곳에 살았다면 그러했을 듯. 물론 딱 경손과 같은 집안과 성장 배경을 가졌다면 말이다. 아마 난 그 시대에 태어났어도 그렇게 돈 많이 쓰는 예술가 노릇은 못 했겠지... 화자가 경손이기에 그의 눈으로 본 앨리스는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시절에 아무리 미국 국적을 가졌을지언정 여성으로서 그만큼의 활동을 한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래서 이들이 다 실존 인물이라는 데에 놀랐다. 다 읽고 나서야 알았지뭐야. 나운규외 심훈, 박헌영, 이애리수 등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그냥 시대상과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하 가져다 쓴 건 줄 알았는데 꽤 근거 있는 언급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특히 앨리스가 실존 인물이어서 좋았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앨리스와 같은 인물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PS.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희곡은 읽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책에 몰입할 수 있었지 싶다. 하지만 희곡의 내용을 알았더라도 이 책이 재미 없었을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