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읽은 날 : 2008년 11월 2일
                                                   다시 읽은 날 : 2009년 4월 30일

 

 

사실 이 책을 처음 잡았던 건 2006년이었다. 『청춘의 문장들』로 김연수 작가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그의 책들을 탐독할 때였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여섯째로 만난 책이었을 것이다. '첫번째 이야기'를 다 읽었던가, 그마저도 다 읽지 못했던가, 아무튼 "아, 너무 어려워!"라고 좌절하며 그만 포기하고 도서관에 반납했던 기억이 난다.(『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도 완독했는데!) 그 후, 김연수 작가의 다른 책들은 모두 읽었지만 이 책만은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그저 책꽂이에 고이고이 모셔두기만 했다.

 

다시 이 책을 읽을 용기를 냈던 건, 한 책카페의 독서토론 도서로 이 책이 선정되면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꾿빠이, 이상』에 대해, 그리고 김연수 작가에 대해 어떤 감상을 들려줄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에, 독서토론에 참석하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다시 만난 『꾿빠이, 이상』은 첫 만남 때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고, 나는 밤을 꼬박 지새며 책 속에 빠져들었다.

 

내가 감히 그의 대표작을 운운할 수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나는 이 책을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에는 소설가로서 그가 불사를수 있는 모든 열정이 들어있다는 느낌이 그 이유 중 하나다. 물론, 다른 책들은 그럼 열정이 부족하다는 거냐,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김연수 작가의 입장이 어떤지야 내가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유난히 이 책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열정'이 곳곳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2009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문학적 자서전 「이 세상 그 누구도 대신 써주지 않는 15매」에도 이 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어쩌면 이건 내가 쓰는 마지막 소설이 될지도 모른다.' 2010년쯤에나, 나이가 들고 연륜이 생기면 그때쯤에나 써보겠다고 생각한 소설을 일찌감치(그것도 '마지막 소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쓰게 된 것은, 2010년에도 자신이 소설가일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준 소설 쓸 기회(물론 그건 '마지막 기회'가 아니었지만) 앞에서 그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떠올렸다. 그에게 문학을 가르쳐 준, 그의 최초의 문학 행위에 소재를 제공했던 '얼굴이 하얀 이상 김해경'에 관한 책은 그런 계기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문학적 자서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소설이 세상 빛을 보는 과정은 정말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신의 한계를 경험한다는 건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실감한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런 한계를 뛰어넘고, 하루에 15매를 쓰는 대단한 일을 해낸 끝에 『꾿빠이, 이상』이 탄생했다. 김연수 작가는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자신이 소설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때 그 '마지막 기회'는 사실상 그가 진정한 소설가로 태어나게 되는, 그의 '두 번째 생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김영수'가 아닌 '김연수'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해준 작가 이상에 관한 책, 진정한 '소설가 김연수'로 거듭나게 해준 책, 그런 의미에서 『꾿빠이, 이상』을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작년에 한 북콘서트에서 김연수 작가가 이상에 관해 한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한국 문학에서 굉장히 높은 위치에 있는 이상이라는 사람을 끌어내려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올라서겠다는 게 아니라, 몇 십 년 동안 너무 높은 자리에만 있어서, 이 사람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도쿄에서 맞이한 이상의 죽음은 그 죽음 자체가 환상적으로 전설에 가깝게 남아 있는데, 그 죽음이 천재의 죽음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살고자 하는 한 남자의 죽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직접 도쿄로 찾아갔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여행할 권리』의 마지막 챕터 「당신들은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는 그가 이상이 머물렀던 도쿄를 답사했던 이야기다.) 그런데 『꾿빠이, 이상』을 읽고 나면, 작가 이상에 관한 환상이 깨지는 게 아니라, 더 전설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가 강해진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이야기들. 그 앞에서 진실 혹은 거짓, 진짜 혹은 가짜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배운 건, "중요한 것은 가짜냐 진짜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말입니다. 진위와는 무관하게 모든 정황이 진짜라면 진짜인 것이고 모든 정황이 가짜라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입니다." 나는 그저 이런 소설을 써 낸 김연수 작가에게 탄복하고, 이런 소설을 만날 수 있었던 내 삶에 행복을 느낄 뿐.

 

 

- 주석으로 이상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 하지만 양파를 까듯이 아무리 파헤쳐봐도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적빈한 가정의 얼굴 하얀 아이 김해경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상이란 데드마스크는 도대체 무엇이던가?(40)

 

- 운명의 글월은 물에 쓰는 것이 아니라 대리석에 새겨지는 것이다. 유예될 수는 있으나 결코 지워지지는 않는다.(70)

 

- 한 작가는 문학을 위해, 독자를 위해 삶의 다양한 광경을 재구성한다. 천재로 태어나는 주인공을 탄생시켜 그 주인공으로 하여금 열정에 사로잡혀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다니게 만들고 사랑에 빠지게 한다. 적당한 쓴맛과 단맛을 동시에 내기 위해 막 딴 치커리와 꽃상치를 잘 포개 만든, 여름 점심의 쌈밥을 만들기도 하고 연인 앞에서 처음으로 벗은 몸처럼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교차하는 하얀 살을 그리기도 하는 것. 그게 바로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일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동시에 던져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78)

 

- 그러나 과연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맞선다고 할 때, 맞서는 그 대상을 일러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번이라도 전기를 써본 사람이라면 우리의 의지가 맞서는 그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의지 자체가 운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끊임없이 남빛의 바다를 하얀 물보라로 바꾸는 뱃길 주변에서는 아무리 해도 당장 대양의 권태로운 푸른빛이 보이지 않듯이 인간의 의지 역시 삶의 여러 굴곡 중 하나일지 모른다. 때로 파도가 치고 남빛 대양의 한켠이 하얀 물보라로 부서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사소한 부분일 뿐이다. 운명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줄 뿐이다. 운명은 논리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맞서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한순간에 모든 것을 보여준다. 씨앗이며 고목을, 꽃이며 과일을, 새순이며 낙엽을, 탄생이며 죽음을. 그 속에 인간의 보잘것없는 의지까지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12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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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시의 외계인 ㅣ Nobless Club 10
김이환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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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의 외계인 / 김이환 / 2008 / 로크미디어

 

 

 

아래 분실물을 찾아주세요!

 

함부로 앉으면 위험한 의자, 그대로 비춰 주지 않는 거울, 땅 위에서 달리기 아까운 자전거, 바닥을 보면 깨닫게 되는 컵, 맑은 날에 더 재밌는 우산, 건망증에 좋은 펜, 불면증에 잘 듣는 스탠드…….

 

책의 뒷표지에 실린 분실물 목록에 귀가 솔깃해졌다. 오호, 저런 신기한 물건들이 나오는 책이라니 흥미롭구나! 나에게 오후 다섯 시에 얽힌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오후 다섯 시의 외계인'이라는 제목도 어딘가 감성을 자극하고 말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에는 외계인(지구 이름 '전용관')이 나온다. 영화를 보다가 그만 외계로 돌아가는 시간을 놓쳐버리고, 홀로 지구에 남겨져 엉엉 울던 외계인은 우리의 주인공(이름 '임성우', 하지만 곧 '직원'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게 됨)을 만나게 된다.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고, 미국의 엄청난 기관에 취직을 한 주인공과 깜짝 놀라게 잘 생긴 이 외계인과의 만남이 어찌나 즐겁던지,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단숨에 읽었다.

 

위에서 말한 분실물은 바로 이 외계인 용관이가 잃어버린 생일 선물들이다. 열일곱째라서 해마다 열일곱 개의 생일 선물을 받는 용관이가 어쩌다 스위치를 잘못 눌러 그만 선물을 다 잃어버렸다. 고향별로 돌아가기 전에 잃어버린 선물들을 다 찾아야 하는데…….

 

하나하나 찾을 때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 선물들의 목록이 꽤나 재미있었다. 개중에는 나도 무척 탐나는 물건들이 꽤 있었다. 위에 앉으면(혹은 올려 놓으면) 속마음을 말해 주는 의자, 착한 사람은 초록색, 나쁜 사람은 까만색으로 보여주는 뿔테 안경, 내뱉은 말을 주워담아 주는 피리, 원하는 꿈을 꾸게 해주는 스탠드, 날씨를 말해 주는 곰인형(믿을 수 없는 기상청 일기예보보다 나을 듯!), 깜빡 하고 있는 일들을 기억나게 해주는 볼펜, 가지고 다니는 별장인 스노 글로브……. 아아, 정말 탐나는 물건 많다!

 

속마음을 말해 주는 의자가 있으면, 우리 강아지하고 의사소통도 하고 얼마나 좋을까. 밤마다 내가 꾸고 싶은 꿈을 꿀 수 있는 스탠드를 켜 놓고 자면 그건 또 얼마나 좋을까. 잠자는 시간만이라도 내가 바라는 삶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행복해진다. 늘 무언가 말해 놓고 후회하는 나에게는 내뱉은 말을 주워담아 주는 피리도 아주 유용한 물건이 될 터!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용관이가 부럽다!

 

우리의 주인공과 '완소 외계인' 용관이가 이 선물들을 찾는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심심하고 따분한 밤에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겠다고, 추천해주고 싶다. 외계인을 찾아 없애기 위해 이 동네로 스며들어온 FBI를 용관이는 잘 피할 수 있을까?(난 처음에 이 설정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결국 외계인을 잡아 죽이겠다는 거면,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ㅡ 난 주인공이 죽는 이야기를 무척 싫어한다. 오죽하면 <삼국지>도 8권까지 읽다가 장비가 죽을 것 같길래 덮어버렸을까! 하지만, 이 책은 어쩐지 해피엔딩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걱정을 누르고 끝까지 읽었다.)

 

모처럼 참 발랄하고 깜찍하고 가벼운 소설을 읽었다. 나의 오후 다섯 시에는 이런 외계인이 나타나주지 않으려나? 나도 가만히 오후 하늘을 올려다보며 용관이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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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건방진 우리말 달인 - 달인편 ㅣ 건방진 우리말 달인 시리즈 2
엄민용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KBS1TV <우리말 겨루기>(월요일 저녁 7시 25분)의 열혈 시청자다. 지금은 사정상 월요일에 텔레비전을 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전에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 챙겨 봤다.
 

작년에 13대, 14대 우리말 달인이 탄생한 이후 오랫동안 15대 달인이 나오지 않아 '달인 탄생'을 몹시 기다리고 있다.(그 주인공이 내가 된다면 더욱 좋겠고 말이다!)

 

"흥! 나도 우리말 달인이 될 수 있다고!"라고 말하는 건방진 폼의 강아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이 책 읽으면 나도 우리말 달인이 될 수 있을까?' 부푼 기대로 책을 펼쳐들었다.

 

이 책은 <우리말 겨루기>의 달인 도전 둘째 문제 준비용으로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프로그램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달인에 도전하는 마지막 한 명이 푸는 문제 중에는 헷갈리는 표현 두 개를 함께 제시하고 맞는 것을 고르도록 하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사십구제/사십구재를 지냈다'

'정화수/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했다'

'걸판지게/거방지게 잘 놀았다'

이런 식인데, 달인 도전자도, 텔레비전 앞에서 함께 푸는 나도 틀리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헷갈리기 쉬운, 혹은 우리가 몰라서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 표현들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있다. 무조건 이건 맞고 저건 틀리다가 아니고, 이 말은 이러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혹은 이러이러한 어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쓰면 안 되고 이렇게 써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몇 년 전에 '태껸'과 '택견'의 표기를 놓고 어느 게 맞는 건지 무척 궁금해 한 적이 있다. 사전에는 '태껸'으로 나와있지만, 인터넷 검색을 거듭 할수록 점점 아리송해졌다. 네이버 지식인에는 '예전에 태껸이라 표기 했는데 88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택견이라 등록되어 택견이 맞는 말입니다.'라는 글도 있고, 위키백과에도 '택견 또는 태껸은 한국의 무술, 민속놀이이다.'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태껸'과 '택견' 둘 다 맞는 말인가 보구나, 혼자 결론을 내리면서도 내심 찜찜함을 떨치지 못했는데, 이 책을 통해 그 정답을 알 수 있었다. 속이 다 시원하다!(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지만 '거짓 정보의 바다'이기도 하다는 점을 꼭 염두해 둘 것!)

 

이뿐만 아니라 사이시옷 규칙이라던가, 외래어 표기법, 띄어쓰기 원칙 등을 알기 쉽게 전해주고 있어서 무척 감탄했다. 전에는 아무리 해도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던 내용들이 어쩐 일인지 깔끔하게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물론 돌아서면 까먹으니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이 책에 앞서 <건방진 우리말 달인>이 나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책도 무척 기대가 되고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 책의 맨 마지막에 나와 있는 한 문장이 무척 눈에 거슬려 아쉬웠다.

"자, 파이팅!"

저자 '우달(우리말 달인)'이 지금까지 실컷 바른 우리말을 전수해주고는, '파이팅'이라는 말로 마무리 하다니, 경악!

책에 보면 언어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서, 오늘 살아 있는 말이 내일은 죽을 수도 있고, 오늘 없던 말이 내일 탄생할 수도 있고, 지금은 표준어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고, 표준어로 허용해야 할 타당성이 있다면 표준어로 채택하는 게 마땅하다는 주장이 여러 번 나온다. 혹 이 책의 저자가 '파이팅' 역시 그런 말로 생각하고 거리낌없이 사용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파이팅'을 반드시 순화해야 할 말 중 하나로 보고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파이팅'을 '힘내자'로 순화한다고 적고 있다. '힘내자'나 '아자' 또는 '아자아자' 같은 좋은 우리말이 있는데 굳이 '파이팅'처럼 의미도 맞지 않는 '가짜 외래어'를 쓸 필요가 있는가 씁쓸한 마음이다.

 

흥분해서 말이 좀 길어졌는데(앞서 말했지만 '파이팅'은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말이기 때문에!), 마무리가 좀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우리말이나 글 잘 쓰는 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특히 나처럼 '우리말 달인'을 은근슬쩍 노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흥! 나도 우리말 달인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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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밝혀졌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엮음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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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데뷔작이 번역되어 나왔다. <엄청나게……>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지라 '조너선 사프란 포어'라는 이름만으로도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다.
 

이 책은 대학생이던 작가가 2차 세계대전 당시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해 준 한 여인을 찾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떠났던 모험을 바탕으로 씌어진 소설이다. 결국 그 여인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두툼한 한 권의 소설로 재탄생 되었으니 결코 헛된 여행은 아니었으리라.

 

이 책은 주인공 조너선의 우크라이나 여행, 우크라이나에서 조너선에게 통역을 해주었던 알렉산더의 편지, 조너선 가문(?)의 과거 이야기 등이 계속 번갈아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책을 괴로워하는 나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워낙 그 넘나듬의 경계가 뚜렷한지라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오타가 아무리 많아도, 문장이 아무리 이상해도 전혀 거리낌없이 읽을 수 있었던 책은 최근 몇 년 들어 처음이었다.(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이 책을 계기로 앞으로도 까칠하지 않게 책을 읽을 수 있을지. 후자이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 모든 게 작가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엄청나게……>에서 보여준 '문학적 실험'들이 이 책에서도 (많지는 않지만) 보여진다. 역시 조너선답다. 그 엉터리 문장들이 이 책의 묘미라면 묘미다. 알렉산더가 조너선에게 통역을 해주던 장면에서는 그 엉터리 통역과 엉터리 문장이 어찌나 웃기던지 그만 지하철에서 정신줄 놓은 여인네처럼 웃어버리고 말았다나 뭐라나.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알렉산더, '맹인견'을 데리고 다니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맹인견', 그리고 그들에게 모든 여정을 맡겨야 하는 조너선의 기묘한 '여행'이 계속되면서 점차 이야기는 베일을 벗어가고, 모든 것이 밝혀지는 그때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 앞에 등장한다. 아무튼 조너선 사프란 포어,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다 엄청나게 뛰어나고 믿을 수 없게 흡인력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작가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에 한 표.

 

 

폭포 옆에 사는 사람은 물소리를 듣지 못한다고들 하지.

그런 얘기가 있어요?

……

폭포 옆에서 산다는 건 이런 것이란다, 사프란. 수년간 순수하고 확고한 비탄에 잠겨 나날을 보내던 과부들도 어느 날 아침 문득 깨어나 밤새 편안히 잤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침밥을 넘길 수 있게 되고, 남편의 유령이 항상 내는 소리도 가끔씩밖에는 못 듣게 되는 거지. 과부의 슬픔은 실용적인 슬픔으로 대체된단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도 어떻게든 다시 웃을 수 있게 되는 법이지. 목재도 빛이 바래기 시작한단다. 모서리도 무뎌지는 법이고. 상처도 사라지지. 어떤 사랑이든 상실로부터 깎여 나오는 거야. 내 사랑도 그랬고. 네 사랑도 그렇지. 네 5대 후손도 그럴 거다. 하지만 그런 사랑 속에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392~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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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의 거짓말
제수알도 부팔리노 지음, 이승수 옮김 / 이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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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감방에서 진행된다.
 

사람들이 '불멸의 신'이라 부르는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사령관은 사형수 네 명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의 내용은 이렇다.

다음날 아침까지, 준비 된 종이에 누구든 한 명이라도 '불멸의 신'의 이름을 적기만 하면 네 명 모두 살려준다, 이름을 적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염려할 것 없다, 하지만 누구도 이름을 밝히지 않을 경우에는 아침에 바로 사형이 집행된다.

'죽음과 치욕 사이에서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두 종류의 치욕, 즉 치욕을 안고 사느냐와 치욕을 안고 죽느냐'(38)하는 선택을 던져준 것이다.

사령관이 떠난 뒤, 죄수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위안실'로 보내진 네 명은 마지막 순간 눈안에 품을 행복을 이야기하기로 하고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자신의 목이 둥근 구멍으로 들어가고 차가운 칼날이 내려와 목을 베이게 될 순간, 하고 많은 지난 세월들 중 어떤 모습을 눈앞에 떠올릴지'(60~61)에 대해서.

그리하여 나르시스의 사랑 이야기, 인가푸의 동생을 기리는 이야기, 아제실라오의 단검에 피를 묻힌 이야기, 살림베니의 진실과 거짓을 오가는 이야기 들이 그들의 마지막 밤을 장식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시나브로 날은 밝아오고, 그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쳐다보는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다.

과연 그들은 치욕을 안고 죽을 것인가, 치욕을 안고 살 것인가.

 

그리고 나라면, 내가 생의 마지막 밤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면 과연 어떤 추억을 끄집어낼 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만히 잠겨보기도 했다.

 

한 번 잡으니 손에서 놓기 쉽지 않은 책, 멋진 책이었다. ★★★★★

 

 

"사랑은 부싯돌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불꽃이 아니라, 영혼의 자연스런 연소입니다. 날름거리던 영혼의 불꽃이 확 타올라 자신 밖에 있는 존재를 찾아서 불을 붙이는 것이죠. 사랑은 잡히지 않는 모호한 감정이고, 서로 모순된 성격이 들어 있어서 이름은 하나지만 증상과 결과가 아주 다양한 병과 비슷합니다. 사랑이 저를 어떤 지경으로 이끌어 갔는지 지금 여러분 모두가 보실 수 있습니다. 저를 파멸로 이끌었죠. 하지만 전 사랑을 저주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이 어떻게 이해될지 모르지만, 사랑 때문에 행복했으니까요."('강에서 구출된 나르시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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