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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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온 창비 세계문학, 무척 매력적이다.

창비 세계문학이 다른 세계문학전집과 가장 다른점은 9개 국가/지역 별로 단편들만을 모았다는 점이다.

단 9권만으로 평소에 접해보지 못한 국가/지역의 많은 작가와 작품 들을 만나볼 수 있어 읽기도 전부터 마음이 그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가장 관심가는 책은 중국 편이었는데, 평소에 거의 접해보지 못한 스페인·라틴아메리카 편도 무척 궁금해 이 책을 먼저 읽어보았다.

 

모두 열아홉 작가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아는 이름이라고는 마르께스뿐인데다(게다가 마르께스도 아직 그 작품은 만나보지 못했다)

평소에 거의 접해보지 못한 지역의 소설인 탓인지 그 느낌이 굉장히 낯설었다.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운 글도 많고 글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해 힘들게 읽은 글도 있었지만, 그래도 평소에 접하기 힘든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소설을 만났다는 데서는 여전히 행복한 책읽기였다.

 

열아홉 편의 글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삐오 바로하의 '마리 벨차',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 마리아 루이사 봄발의 '나무', 후안 호세 아레올라의 '전철수', 이사벨 아옌데의 '두 마디 말'이었다.

첫 문장부터 마음을 사로잡으며 큰 기대를 갖게 했던 '마리 벨차'는 안타깝게도 3쪽 짜리의 아주 짧은 소설이었다.(이렇게 아주 짧은 소설이 이 소설 말고도 몇 편 더 있다.) 이런 문장의, 이런 분위기의 글, 참 마음에 든다. 삐오 바로하라는 이름을 기억해뒀다가 그의 글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아야겠다.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떠올리게도 했는데,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한 사람 뿐만이 아니라, 한 세계 전체가 마치 영화 필름을 되감는 영상처럼 뒤로 돌려진다. 주인공은 다시 배 속 태아가 되고, 방의 양털 양탄자는 양으로 돌아가고, 나무로 만든 가구는 밀림으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엉터리 철도 체계로 인해 겪게 되는 일이 마치 아무 것도 정해진 것 없는 우리네 삶의 여정을 보여주는 듯한 소설 '전철수'는 많은 문장들에 밑줄을 긋게 만들었다. 정해진 노선 따위 상관하지 않고 아무 데로나 달려가며 제멋대로 승객들을 내려 놓기도 하고, 기차가 언제 올지는 알 수도 없고, 차창 밖으로는 환영을 만들어 승객들을 유혹하기도 하는 이상한 철도 이야기가, 어쩐지 우리의 인생처럼 여겨졌다. 작품 해설에는 '멕시코 정부의 관료주의와 철도체계의 비효율성에 대한 통렬한 풍자'나 '방향성을 상실한 국가현실의 끔찍하고 유쾌한 캐리커처'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뭐 어떻게 읽든 그건 '독자의 몫'이니까, 나는 이 소설에서 인생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 기차가 저를 T로 데려다줄까요?"

  "그런데 왜 당신은 꼭 T로 가야 한다고 고집하는 거요? 기차에 올라탈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말이오. 일단 기차에 오르고 나면, 실제로 당신 인생의 행로가 정해지지 않겠소. 그 방향이 T가 아닌들 그게 무슨 대수겠소?"

  "실은 T로 가는 정식 열차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로 가야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_ '전철수' 중에서



스페인·라틴아메리카 편으로 만나본 창비 세계문학, 기대했던 것만큼 매력적이었다. 표지도 무척 예쁘고 말이다.(그런데 종이가 좀 얇은 거 같다. 손 벨까봐 겁나던데, 벌써 한 번 베였다.)

다른 국가의 책들도 한 권 한 권 모두 만나봐야겠다. 다음으로는 중국 편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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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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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 제목으로만 알고 있었던 이 말이, 원래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이 책을 만나면서 알았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50대에 마약 혐의로 법정에 서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만 들었다면 그 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그 앞에 붙은 단서가 멋있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랍시고 실제로는 방종,을 일삼는 사람들이 한 번쯤 눈 여겨 봐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를 누린 사람, 인생을 충분히 즐겼으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

프랑수아즈 사강.

그리고 이 책은 그녀의 열정과 사랑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 그녀가 사랑한 책, 그녀가 사랑한 행위, 그녀가 사랑한 장소 등을 만나며

그녀가 이 삶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또 얼마나 뜨거운 열정으로 이 삶을 살았는지를 느낄 수 있는, 가슴 벅찬 느낌의 책이었다.

아직 그녀의 소설을 한 권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나는 자신의 삶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열정만으로도 이미 이 작가가 좋아졌다.




     
   스키를 타느라 두 다리와 팔, 등허리가 피곤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천천히 숨을 쉬었다. 태양이 내 머리칼과 피부를 말리는 것이 느껴졌다. 파랗고 눈부신, 그리고 놀랄 정도로 맑게 비어 있는 하늘 아래 아무도 없이 혼자 있으니, 내가 내 몸의 주인임을, 내 스키의 주인임을, 내 삶의 주인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세상의 주인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 존재, 그들의 정신, 그들의 모순, 그들의 온기, 그들의 마음, 그들의 신경, 그들의 고통, 그들의 욕망, 그들의 결점, 그들의 의지, 그들의 열정, 그 모든 것이 좀 더 먼 곳에서, 좀 더 낮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200)  
     



 

늘 자기 몸을 사랑하고 아끼라는 말을 가르침처럼 들어오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에 반감이 들기는 커녕 오히려 나도 그런 권리를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참 이상하다.

어쩌면 옮긴이의 말처럼 글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글의 힘이라는 것은 실로 대단하다. 도박과 스피드에 대한 사강의 글을 읽노라면,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참으로 위험한 취미임에도 불구하고(실제로 사강은 1957년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를 당하여 심각한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녀가 설파하는 그것들의 매력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니 말이다."

 

자, 이렇게 작가에게 홀딱 반해버렸으니, 이제는 이 작가의 소설들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그녀의 소설들도, 그녀만큼이나 열정적일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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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삶이 내게 왔다
정성일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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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충 성적에 맞춰 집 근처의 한 대학, 원서를 쓸 때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했다. 이제부터 나는 '프로그래머' 같은 게 될 것인가보다,라고 생각하고 3년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뜬금없이 중국어과로 편입했다. 애초에는 일본어과로 전과하려고 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편입 원서를 쓰며 1지망에 중국어과를 적어 넣었다. 중국에 어학 연수를 다녀오고 졸업을 했다. 한 회사에 상근 통역사로 출근하며, 나는 통역사로 살아가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계약직 일은 금방 끝이 났고, 어디에 취직하기는 싫고 고민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후 번역에 뜻을 두고, 나는 이제 중국어 번역가의 길을 걸어가겠노라고 다짐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지금은 한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교양 중국어 강의를 하고 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선택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온 길인 것 같다. 하고 싶지 않은 일, 견딜 수 없는 일로부터 도망친 결과 이르게 된 길. _ 강홍구

어느 것 하나, 내가 생각한 것과 맞게 돌아가는 일이 없이 30년 넘게 살아 왔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프로그래머도 되지 못 했고, 중국어 통역사도 되지 못 했고, 문학 번역가도 되지 못 한 채,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은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삶이 내게 왔기 때문에...?

 

이 책에는 물론 나와는 다르지만 이와 비슷하게 '내게 온'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들과 나의 아주 커다란 차이점은, 그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삶을 살고 있고, 나는 지금도 다른 삶이 내게 다가오길 꿈꾸며 호시탐탐 다른 길을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





   "그냥 어찌어찌 굴러오니 여기였어요."

  되는 대로 막 사는 사람의 말 같지만, 인생은 원래 그런 식인 것 같다. 내 삶이 내게로 온 것인지, 내가 그리로 간 것인지, 내가 구른 건지, 삶이 나를 굴린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매 순간 내 의지로 결정하고 움직인 것 같아도 전체적으로 미리 정해진 운행 노선을 따른 것 같고, 계기들의 연결고리가 필연적인 양 보이다가도 수많은 가능성들을 제치고 그 하나를 선택한 내 뜻이 언뜻 보이니 말이다.

  "에이, 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

  이제는 나이까지 드니 내 입에서 이런 말까지 튀어나온다. 누구와 각본을 짜고 시치미를 떼고 하는 게임이라는 걸까? _ 박승숙
이 책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 있는 열일곱 명의 명사를 만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아는 이름은 소설가 공선옥밖에 없었지만, 이 책을 통해 평소에 접해보지 않은 다양한 분야를 만나고, 지금의 삶을 만나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떤 이야기는 괜히 내가 다 가슴 벅찼고, 어떤 이야기는 저자 이름에 별표를 쳐두고 나중에 꼭 저서를 찾아보리라 생각하게 만들었으며(특히 기생충 교수님의 저서!), 어떤 이야기는 꼭 내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아 밑줄을 두 줄씩 그어 놓기도 했고, 어떤 이야기는 감동에 눈물이 글썽여지기도 했다. 열일곱 편의 이야기 중 일부는 조금 지루해서 페이지를 빨리 넘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가 잔잔한 감동과 재미를 전해주었다.

 

아, 나는 언제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을지, 그래서 여유롭게 웃으며 "이 삶이 내게 왔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어쩐지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내 삶의 지도를 펼쳐놓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태어난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나는 세상에 빚진 게 많다. 아주 많은 힘들의 작용과 우연의 행동을 통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닌가. 웃기는 말이지만 열심히 그 빚을 갚지 않으면 언제 빚 독촉이 한꺼번에 들이닥칠지 모른다. 그럼에도 삶은 혼자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계속해서 또 빚을 지고 무언가를 받게 된다. 어쩌면 한평생 채무자로 있으면서 죽을 때까지 고마워하며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주려고 헉헉거릴지도 모르겠다. _ 박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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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ㅣ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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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한국문화'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 작업이다. 한국문화의 정수를 찾아 그 의미와 가치를 정리하는 일이다. 한 장의 그림 또는 하나의 역사적 장면을 키워드로 삼아,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한국을 찾자는 것이다. …… 우리의 것이니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같은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어 자연스레 책을 펼쳐볼 수 있게 했다. …… 한국문화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선입관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또 좀더 깊이 알고자 하지만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키워드 한국문화'는 좋은 안내자가 될 것이다. _ '키워드 한국문화를 펴내며' 중에서.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를 알게 된 건, <구운몽도>에 독자모니터로 참여하면서였다.

책이라곤 거의 소설밖에 읽지 않고, 옛것과 관련된 이야기는 지레 어렵다고 생각하며 거의 손에 잡아본 적이 없어서 교정지를 보는 마음이 좀 무거웠었다.

하지만 나는 밤을 새가며 교정지 읽는 데 푹 빠져 있었다. 내 우려와는 달리 무척 재미있고, 어렵지도 않았다.

'한국문화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좋은 안내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나보다.

그렇게 알게 된 '키워드 한국문화'는 요즘 내 책 읽기의 새로운 키워드가 되었다.

 

현재 출간 된 다섯 권 중에서 가장 먼저 만나본 책은 <세한도>이다.

하도 많이 밝혀서 새삼스럽지도 않은데(그래도 내 입으로 말할 때마다 부끄럽긴 부끄럽지만) 아는 거 쥐뿔 없이 '무식이 통통 튀는' 나인지라, 제목을 보고도 나는 추사 김정희를 떠올리지도 못했다.

그러니 이 책이 겨냥하는 독자층 중 '한국문화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은 소감을 말할 수 있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이런 책'이 어렵지 않을까 했던 우려와는 달리 소설책 읽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참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같은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는 덕분이다.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시절에 그린 한 장의 그림이다.

'붓을 쓱쓱 문질러 대충 그린 것 같은 나무 몇 그루와 이상하게 생긴 집만 덩그렇게 자리하고 있'는 '황량한 느낌'의 그림.

이 그림이 탄생하기까지 추사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모종의 일과 그의 제주도 유배 생활, 그리고 우선 이상적과의 감동적인 우정 등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던 건, 추사 김정희에게 보여준 우선 이상적의 우정이었다.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이 겨울을 지나 봄을 건너고 있는데도 아무런 소식도 없군요. 마치 고목나무 집에서 세상일을 전혀 모르고 단절된 채 지내고 있는 듯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두렵거나 정신이 몽롱해져 미쳐버릴 것 같은 이런저런 업보는 없지만, 옛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은 풀어버릴 수가 없어 때로는 산을 옆구리에 끼고 바다를 뛰어넘고 싶습니다.(81)

 

친구들이 그리워 산을 옆구리에 끼고 바다를 뛰어넘고 싶다는 추사에게 우선은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친구였다.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처럼, 추사의 인생에 겨울이 드리워서야 우선이 추사에게 보여준 우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청나라에서 구해온 귀한 서적을 권세나 이권을 생각하지 않고 유배 중인 추사에게 보내주는 그 마음씀씀이는 추사 뿐 아니라 나도 감동시켰다. '물처럼 담박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웠'던 그 우정.

나는 누구에게 추사의 우선 같은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을까...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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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톰스 캐빈 ㅣ 아셰트클래식 2
해리엣 비처 스토 지음, 크리스티앙 하인리히 그림, 마도경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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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셰트 클래식 시리즈로 <엉클 톰스 캐빈>을 만났다.

 

프랑스 출판그룹 아셰트(Hachette)의 '아셰트 클래식 시리즈'는 클래식 문학의 원전을 완역해 독창적 일러스트를 곁들여 보여주는 시리즈다.

<해저 2만리>에 이어 두 번째로 출간 된 이 책을 통해 '아셰트 클래식 시리즈'를 알게 되었는데, 아, 소장가치가 대단하다.

 

'원전을 완역하고, 작품의 배경이 된 19세기의 노예무역과 노예들의 생활상, 노예제도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까지 묘사한 일러스트를 더한 프랑스 최고 출판그룹 아셰트의 역작!'

완역된 원전을 읽는 맛 뿐 아니라,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모습을 생생한 일러스트를 통해 만날 수 있으니,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어렸을 때 어린이 문고로 <엉클톰스캐빈>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생각한 내용이 아니었다.

아마 읽고 헷갈리거나, 읽지 않았는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읽었다고 착각했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누가 그자를 내 주인으로 만들었지? 난 그게 알고 싶어!"

 



생각해보니 노예 제도에 관한 책을 읽은 건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노예 제도의 실상을 이 책을 통해 들여다보면서, 나도 내내 그들과 같은 의문을 품었다.

누가 그들에게 그들 삶의 주인을 만들어 준 거지?

 

늘 들어왔지.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니었다. 그들 삶의 주인은, 말 그대로 그들의 소유권을 지닌 '주인'이었다. 그들은 결혼도 할 수 없고, 밤낮으로 주인을 위해 일해야 했으며, 주인에 의해 피붙이와 떨어져 여기저기로 팔려 나갔으며, 자유를 찾아 나섰다가 '인간 사냥꾼'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누가, 왜, 그들을 '사람'이 아닌 '검둥이 노예'로 만든 거지?

누가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백인이 흘리는 눈물과 다르다고 말하는 거지?

 

이 책에서도 그 질문에 대한 그들(주인들)의 답변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납득할 수 없는.

그들이 노예 제도의 근거로 들고 있는 건, 세상에나, 성경이었다.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성경에 정말 흑인들은 백인들의 종이 되어 고생을 하라는 문장이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 책에 인용된 몇 구절에서는 '검은 땅'이니 '저주'니 '종'이니 하는 단어들이 정말 나왔다.(특히 아이티는 구제할 수 없는 저주 받은 땅,이라는 식으로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최근 벌어진 아이티 참사 때문에, 아이티라는 단어는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도, 그 옛날 유대인이 예수를 부정해서라고 했던가?

그럼 흑인이 백인의 노예가 되어 그런 참혹함을 겪어야 했던 것도, 예수에게 선을 베풀지 않아서란 말인가?

기독교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쥐뿔도 모르는 내가 경솔하게 뭐라 말할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성경이 몹시 읽고 싶어졌다. 성경에는 도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지.

 

"바람은 눈썹이 검은지 갈색인지 묻지 않고 불어준다."

 

아아, 톰 아저씨.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과 일화가 다 실제 이야기에 근거한 거라는데, 그렇다면 그 '톰 아저씨'야 말로 '예수'같은 사람이 아닐까.

자기가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어야 하는 근거가 되어주고 있는 성경을 오히려 보물처럼 아끼면서 늘 하늘의 말을 듣기 위해 마음과 귀를 열어 두고, 자신의 믿음대로 실천하는 사람.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선이 아니면 행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오히려 신의 나라로 간다는 생각에 평온하고 평화스러워진 사람.

톰 아저씨의 신앙은, 내 마음도 살짝 움직일 뻔했다.

종교를 가진,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더욱 감동적인 소설일 거 같다.

(그런데 희한하다. 누군가는 성경을 근거로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누군가는 기독교인으로서 노예제도를 반대하니. 설마 그들의 성경은 서로 같지 않단 말인가?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해 이런 의문이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속의 수수께끼다.)

 

 

어찌 되었든, 이 책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질문을 던져 준 책이었다.

톰과 에반젤린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모습에는 정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냥 '그 이야기 알아' '그 책 어렸을 때 읽어본 거 같애' 하고 지나치지 않고 이 책을 만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무척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제 밤이 거의 다 지나고 자유의 새벽별이 그들 앞에 밝게 떠올랐다. 자유! 얼마나 감격적인 말인가! 자유는 무엇인가? ……

조지에게 자유는 인간이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서 존재할 권리였다. 품속의 아내를 아내라고 부를 권리였다. 그리고 아내를 무법적인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권리였다. 자식을 보호하고 교육할 권리였다. 자기 가정과 종교를 지키고 개성을 지니는 한편, 타인의 뜻에 굴복하지 않을 권리였다.(593)

 

(나는 미처 '권리'라고 생각해보지도 않은 지극히 당연한 그 '권리'를 갖기 위해, 자유를 찾아 나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나의 이 '권리'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고, 이런 권리를 당연히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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