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풍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
장 지오노 지음, 박인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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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서정적인 느낌이 드는 제목에 그와 어울리지 않는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표지 그림.

책의 내용은 제목의 느낌일까 그림의 느낌일까 궁금했다.

얼마 읽지 않아, 아니 책을 읽기도 전에 앞에 그려져 있는 가계도를 보고 후자일 것임을 짐작했다.

 

가계도부터 상당히 뜨악한 기분이었다.

가계도가 미리니름(스포일러)인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는데, 그러니까 5대에 걸쳐 한 일가가 어떻게 죽었는지가 설명되어 있는 가계도였다.

(지금 내가 설명하는 이들의 죽음은 미리니름이 아니다. 어차피 이 책을 펼치면 맨 첫 장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그림을 글로 바꿨을 뿐.)

1대인 코스트는 낚싯바늘에 찔려 죽고 그의 아내와 첫째 둘째 아들은 사고사를 당했으며, 큰딸과 그의 남편과 두 아들은 기차 사고로 일가족이 몰살 당하고, 둘째 딸은 아이를 낳다가 죽고 그녀의 남편은 정신병원에 갇히고, 그들의 첫째 아들은 실종되고 딸은 버찌 씨가 목에 걸려 죽었으며, 둘째 아들은 급사하고 그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 후 실성한 채로 두 달을 보내다 죽었으며, 그들의 아들은 권총 자살을 하고 딸 쥴리는 정신 착란을 일으켰으며, 쥴리와 조제프 사이에 난 아들은 아내가 반신불수가 되자 매춘부와 함께 달아난다.

한때는 위풍당당했던, '폴란드의 풍차'라 불리는 영지에 살았던 한 가족의 역사이다. 죽음의 역사이다.

 

소설은 처음에는 조제프의 등장으로 시작하여, 조제프가 어떻게 그 영지를 손에 넣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 일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일가의 이야기란 바로 저 죽음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한 가족의 역사가 어쩜 이리도 비극으로 비극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지, 읽는 내내 참 소름끼쳤다.

잘 죽는 것도 복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이 집안에 복 받은 인물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이 한 일가의 몰락을 통해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뭔가 궁금했지만, 내 깜냥으로는 그저 죽고 죽고 또 죽었다는 내용만 읽혔을 뿐, 어떤 깨달음은 오지 않았다. 책 뒤표지에 실린 문장을 보니 '한 가문의 숙명적 몰락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알리는 한편 야누스의 얼굴을 한 죽음, 생의 위협이자 따뜻한 위안인 죽음의 양면성을 그린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아아, 한 가문의 숙명적 몰락이라니. 정말 '운명'이라는 단어 앞에만 서면 인간은 얼마나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인지! 그 모든 걸 '운명'이라는 말로 덮어버리다니! 운명이든 숙명이든 두렵고 두렵게만 느껴졌다.

 

끔찍하고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나 또한 그 못지 않게 잔인한 인간인지,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운명이란 녀석은 어쩐지 좀 싫어진다.

"한결 같은 운명은 죽은 자의 것. 그러므로 운명은 절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말하는 순간 그 운명은 바뀔 테니까. 뿌넝숴, 뿌넝숴." (김연수, 「뿌넝숴」 중에서)

문득 떠오른 문장이다.

 

 

_ 우리는 칼이나 맹금보다도 우리가 삶에 대해서 품고 있는 관념과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13)

 

_ 중요한 것은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사는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90)

 

_ 하지만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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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
김용택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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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려면, 얼마만큼 아이들을 사랑해야 할까?

얼마나 아이들을 사랑해야 그 아이들이 뛰노는 땅마저 사랑스럽고 성스럽게 느껴져 입을 맞출 수 있을까?

 

김용택 시인이라면, 과연 그럴테지, 하고 절로 수긍이 가며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는 김용택 시인의 글을 많이 접해보지도 않았고, 시인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하지만, '김용택' 하면 그런 이미지가 그려진다.

아이들을 무척이나 사랑하여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도 엎드려 입 맞출 수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말이다.

 

이 책은 시인이 교사로 재직하던 기간 중 몇 년 동안 여기저기 적어두었던 생각들을 모은 것이라 한다.

아이들과, 특히 2학년 아이들과 보낸 신비로운 시간이 이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인은 아이들을 '신비롭다'고 표현했다. 특히 시인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2학년 아이들을.

운동장 구석에서 고개를 땅에 붙일 듯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개미였다. 신비롭지 않은가?

딸랑 둘 뿐인 2학년 학생 둘이 어디선가 정신없이 노느라 수업 시간에 들어오는 것도 잊어버렸다.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들. 신비롭지 않은가?

아이들이 선생님 앞으로 우루루 몰려와 재잘재잘 조잘조잘 열과 성을 다해 무언가를 일러바친다. 저렇게 열심히 이를 수 있다니. 신비롭지 않은가?

한 아이가 유리창을 깼다. 왜 그랬냐고 하니, 머리로 받으면 유리가 깨지는지 안 깨지는지 궁금해서 머리로 받았다고 한다. 신비롭지 않은가?

 

"신비롭지 않아요?"

시인의 질문에 객석이 조용하자, 시인이 다들 감정이 메말라서 뭐가 신비한 건지 모르고 산다고 했다. 이런 것이 바로 신비한 거라고.

아이들과 지내다 보면, 매 순간 순간이 신비로움의 연속이라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시인의 시선이, 시인의 마음이, 시인의 생각이 더 신비로웠다.

나라면 '아이들은 별걸 가지고 다 난리법석이구나'라며 시큰둥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들이 시인에게는 다 신비롭고 신기하다고 했다.

김용택 시인은 과연 남들과 다른 감성을 지닌 사람이로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게 바로 신비한 거라는 시인의 가르침이 내 안 깊숙이 들어왔는지,

갑자기 세상이 달라보였다.

알고 보니 이 세상은, 특히 이제 18개월 된 조카를 둘러싼 일상은 온통 신비로운 일 투성이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제대로 서지도 못 해 연신 넘어지며 뒤통수를 콰당콰당 해 울음 그칠 날이 없던 조카가 이제는 뛰어다니다니, 피리 소리에 왕왕 짖어대며 날뛰는 강아지를 보고 그렇게 재미있어 하며 꺄르르르 넘어가다니, 밖으로 나가고 싶으면 유모차 앞으로 이모를 끌고갈 줄도 알다니,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음악만 나오면 그렇게 흥겹게 몸을 흔들어댈 줄 알다니…… 새삼 조카의 행동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 옹알이 한 마디 한 마디가 무척이나 신비롭게 여겨졌다. 나도 조카가 뛰노는 땅에 기꺼이 엎드려 입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책이다.

읽고 나면 세상이 새삼스러워 보이는 책. 읽고 나면 세상이 신비로워 보이는 책. 읽고 나면 세상 모든 아이들이 예뻐 보이는 책.

내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 준 이 책에, 김용택 시인에 고마운 마음이 마구마구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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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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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에 앞서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글을 읽다가 놀랐다.

'생애 다섯 번째 자살 기도에서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하다니. 뒤의 작품 해설에는 그의 '자살 시도기'가 조금 더 세세하게 나와 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그는 정말 끊임없이 자살을 기도한다. 도대체 왜인지, 이 책을 읽으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익살로 자신을 무장하고 절대 가면을 벗지 않는 한 남자의 세 장의 사진과 세 편의 수기 이야기이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익살꾼의 가면을 벗지 않는 이 남자 요조의 내면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는 수기는 어딘가 섬뜩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고 힘겹기도 하고, 그리고 공감이 갔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뜻하지 않은 문장에서 문득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느낌이 묘하다. 반갑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복잡미묘한 느낌. 나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내 자신의 모습과 만나며 나에 대해 돌아볼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은 책 읽기가 주는 아주 귀중한 선물이다.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92)

 

내가 감췄기 때문에, 혹은 나는 보여줬지만 상대방이 그렇게 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는 듯이 이어져가는 인간 관계. 나의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을까. 나는 얼만큼 가면을 쓰고 사람들 앞에 있는 것일까. 내가 보여주는 진실을 혹은 거짓을 사람들은 정말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 그대로 보는 것일까? 또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굳이 정말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지금 아는 그만큼으로도 충분하겠지. 서로에게 보여지는 그 만큼으로, 익살꾼이면 익살꾼이게, 쓸쓸하면 쓸쓸하게.

 

이 책을 읽다가 그만, 나도 나를 참 많이 감추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내가 익살꾼의 가면을 쓴 요조처럼 느껴져 내면이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나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니까. 일기장에도 내 마음을 숨기고 아닌 척, 안 그런 척 쓰는 인간이니까. 내가 아니라고 믿으면 진짜 아닌 줄 알고는, 바보처럼.

 

오전에 이 책을 읽고는 예상하지 못한 심란함에 빠져 있는 오후다.

무기력해졌다. 머릿속은 분주해졌지만, 복잡하고 싶지 않아 그만 둔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야 말로, 인간 실격,이라고 내 자신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아, 그래서 생애 다섯 번이나 자살을 기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느냐면,

글쎄, 이처럼 끊임없이 심오한 생각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긴 했다.

잘 모르겠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져버린 사람의 심정을 내가 어찌.

 

 

_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不信)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27)

 

_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133~134)

 

_  만화가. 아아. 그러나 나는 큰 기쁨도, 큰 슬픔도 못 느끼는 무명 만화가. 나중에 아무리 커다란 비애가 찾아올지라도 상관없다. 거칠고 큰 기쁨을 맛보고 싶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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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솔 벨로우 지음, 양현미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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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바로 지금'으로 데려와야 해. 현실 세계로. 현재 이 순간으로 말이야.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지.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거야. '바로 지금'. 오늘을 잡아야 해."(114)

 

컴퓨터 책상 바로 옆에 있는 책장에 메모지 두 장을 붙여 두었다. 몇 해 전에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김연수 작가의 글을 보고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글들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웃고 싶다면 지금 여기에서 웃어야만 한다.'

'행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없다. 우리는 인간이므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뿐이다.'

내 몸 어딘가에 내가 깨닫지 못 하는 어떤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절대로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과거.

내가 이렇게 그리고 저렇게 그려봐도, 아무리 행복을 꿈꾸고 달콤함을 기다려도 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보이는 미래.

내가 나 자신과 만나는 대부분의 시간은 바로 저 둘, 과거와 미래에 있다.

나는 바로 지금 여기, 현재에 있지만, 늘 마음속으로는 과거를 떠올려보며 지난 실수들에 아직도 손발을 오그라뜨리거나 이제는 잡을 수도 없는 그때의 행복에 아직도 미소를 짓거나, 혹은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은 자신감과 행복으로 충만한 미래를 그려보며, 나를 억지로 거기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현실은 시궁창' 같기만 한데 말이다.

그래서 현실의 나를 바라보라고 조언하는 문장들이 보이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지금 여기'.

내가 정말 살아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이자리 바로 여기인데...

나는 왜 이렇게 과거로만 미래로만 숨어들며 현실을 피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아내와 이혼하고 호텔에 머물며 아버지와 불편한 아침 식사를 하고 통장 잔고를 탈탈 털어 탬킨 박사가 추천하는 주식에 투자한 윌헬름.

그의 하루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는데, 내가 책을 제대로 읽지 못 한 것인지, 사실 그의 이 구구절절한 하루 중 어디를 꽉 잡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현실에 처해 비참하고 서글퍼지느니 차라리 나를 과거나 미래의 아름다웠던 혹은 아름다울 것 같은 시간으로 살짝 옮겨 놓으면 안 될까? 정신 건강을 위해서.

밑줄 그은 문장은 굉장히 많았지만, 책 내용 자체가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다.

윌헬름을 알거지로 만들지만 또 윌헬름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기도 하는 탬킨 박사는 약간 돌팔이이자 사기꾼 같은 사람으로 나오는데, 나는 탬킨 박사가 등장 인물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작품 해설에는 끝내 돌팔이 사기꾼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나는 지금도 그 박사는 결코 돌팔이도 사기꾼도 아니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책 속 그의 대사는 가슴 속에 새기고 싶은 문장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의 환자들도 그런 말을 들으며 치유 받지 않았을까?

 

가슴에 와 닿는 문장들이 많은 책이라, 나중에 다시 만나보고 싶다.

그때의 나는 오늘을 잡으며 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_ 시간을 낭비했다. 그 시간들은 이제 단념해야 한다. 그밖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134)

 

_도대체 위아래 어느 쪽으로 봐도 거꾸로 보이는, 트럼프 카드에 그려진 얼굴처럼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109)

 

_ 여기, 내 가슴, 자네 가슴, 모든 사람들의 가슴 할 것 없이 사람의 가슴속에는 영혼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야. 수많은 영혼이 있지. 그렇지만 그중에서 중요한 영혼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진짜 영혼과 가짜 영혼이야.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그러곤 반드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느끼지. '만약 자네가 사랑할 수 없다면 도대체 자네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 말 알아듣겠는가?(120)

 

_ 사람의 가치는 그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21)

 

_ 잘 가거라, 청춘이여! 오, 잘 가거라, 경이로웠지만 어리석게 허송세월한 나날들이여! 나는 그때 얼마나 철없는 멍텅구리였던가. 지금도 그렇지만.(52)

 

_ 그 사람은 미쳤지만 동시에 제정신일 수도 있어요. 요즘 세상에서는 뭐가 미쳤고 뭐가 제정신인지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니까요.(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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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도감 - 꽃과 채소로 가득 찬 뜰 만들기 ㅣ 체험 도감 시리즈 5
사토우치 아이 지음, 김창원 옮김, 사노 히로히코 외 그림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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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마당 한구석에 내버려두었던 화분에 웬 싹이 올라와 있는 것을 며칠 전에야 발견했다.

진한 자줏빛 싹들이 제법 예쁜 모습으로 실하게 올라왔다.

싹의 모양만으로도 작년에 그 화분에 자라던 아이가 누구인지 알겠다.

작년 봄, 하동 쌍계사에 벚꽃놀이 갔다가 데려온 금낭화이다. 금낭화가 다년생이라는 걸 몰랐기에 그 '빈 화분'에서 이렇게 반가운 새생명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게다가, 내 기억에 의하면 작년에 심은 건 두 포기였는데, 올해는 화분 여기저기에 퍼져서 네다섯 포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반가움이 배가 된다.

 

아, 이제 봄이 온다.

2주 전쯤에는 '봄이 왔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으나, 올 겨울은 봄을 지나치게 샘내며 쉬이 그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이제나저제나 어두컴컴한 집 안 구석에 움츠리고 있는 화분들을 다시 마당에 내놓아 줄까 눈치만 보는 마음에 조바심이 인다. 마당에 내놓고 시원하게 물줄기 뿌려주려고 기다리다가 지쳐 옹색하게 컵에다 물을 받아 조심조심 뿌려주고 만다.

봄을 향한 기다림은 정말 길고도 길다. 그 긴긴 기다림의 끝자락에서 이 책을 읽었다. '꽃과 채소로 가득 찬 뜰 만들기'를 알려주는 책, 『원예도감』.

 

나처럼 마당 가득 초록이들을 해방시켜주기 위한 긴 기다림에 애태우는 사람들, 나처럼 늘 무언가를 기르지만 아직 어설프기한 한 사람들, 나처럼 '그린 핑거(식물을 잘 키우는 도사라는 뜻)'를 꿈꾸는 사람들, 나처럼 늘 가슴 한 구석에 꽃과 채소로 가득한 뜰을 그리며 사는 사람들, 나처럼…… 그러니까, 무언가를 가꾸기 좋아하거나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내가 활동하는 야생화 카페에 극찬을 하며 추천했던 책 『초록숲 정원에서 온 편지』(이 책에는 『원예가의 열두 달』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와 함께 내가 가장 아끼는 '초록 책'이 될 것이다.

 

보통 실용서를 볼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보다 내가 원하는 부분만을 골라 읽으며 내게 필요한 지식만 습득하는 책 읽기를 하게 되는데,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부분도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여느 소설책 못지 않게 재미있기까지 해, 밤이 늦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못 했다.

책은 모두 8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첫장에서는 문학 속의 정원 이야기를 들려주며 바로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1년에 적지 않은 책을 읽는 편이지만, 내가 만난 책 중에서는 정원 이야기가 인상 깊게 남은 책이 별로 없다. 가장 최근의 기억으로는, 아직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올 겨울에 모 인터넷 사이트 연재로 읽은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나무수국이나 백일홍이나 테이블야자 등과 같은 식물들이 자주 등장해 반갑고 향긋한 마음으로 읽었던 게 전부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해주는, 정원 이야기가 등장하는 책들이 무척 반가웠다. 스잔 힐의 『정원의 작은 길』, 필리퍼 피어스의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프랜시스 버넷의 『비밀의 화원』, 크리스티나 비외르크의 『모네의 정원에서』,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 이야기』, 장 앙리 파브르의 『파브르 곤충기』, 어니스트 에반톰슨 시튼의 『시튼 동물기』, 엘리스 피터스의 『수도사의 두건』, 카렐 차페크의 『초록숲 정원에서 온 편지』 등이 이에 소개된 책들인데 이 목록을 잘 옮겨두었다가 '정원'을 주제로 한 책 읽기를 한번 해야겠다고 마음 먹어본다. 생각만해도 몸과 마음이 다 상쾌해지는 듯하다.

 

이렇게 문학적으로 처음을 열어 준 뒤, 이제 우리가 뜰을 가꾸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내용들을 친절히 알려준다. 여러 정원의 형식, 원예에 필요한 도구, 정원 흙과 거름 만드는 방법, 씨나 알뿌리를 심는 시기와 방법, 식물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식물 늘리기, 그렇게 가꾼 뜰에서 얻은 것들로 만들수 있는 것들 등을 마치 아이에게 알려주듯이 친절하고 조곤조곤하게 전해준다. 아마도 실제로 어린 독자들도 염두에 두고 쓴 책인 듯, 책 내용 곳곳에 마당 한 켠을 쓰기 위해 부모님께 허락을 받으라던가 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물론 전적으로 어린이 독자들을 위해 쓴 책은 전혀 아니다. 그만큼 쉽고 친절하게 알려준다는 이야기다.)

그 동안 내가 식물을 가꾸며 늘 어려워했던 부분인, 흙 만드는 법, 씨 뿌리는 시기, 해충 없애는 법, 각 식물의 특성 등에 대해서 이 책에서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올 듯 올 듯 오지 않는 봄을 향한 긴긴 기다림을 달래기 위해 집어든 책인데,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 세게 불타오르고, 계속되는 강추위와 황사 소식이 야속하기만 하다. 언제쯤에나 나의 화분들을 마당으로 해방시켜줄 수 있을까, 올해는 또 어떤 꽃들을 심어 내 마당과 마음을 향긋하게 가꿔볼까, 겨울 동안 잊고 있던 화분들에서 금낭화처럼 깜짝 선물을 만날 수 있으려나, 아아,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 마음에 온통 봄, 봄, 봄, 봄, 봄을 향한 외침뿐이다.

 

 

_ "옛부터 '반나절은 일하고, 반나절은 바라본다.'는 말이 있는데 원예 일은 바라보는 일이 아주 중요하지. 보고 있으면 식물이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되거든. 요즘 사람들은 정원사가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게으름 피운다고 못마땅해 하겠지만."(210)

 

_ 실패를 하면 그 원인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실패를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실패는 우리가 식물을 이해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262)

 

_ 뜰을 만들고 꾸미는 것은 우리들이지만 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꽃과 채소들입니다. 씨를 뿌리는 일은 우리가 하지만 그 뒤 식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랍니다. 마치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부모 없이 아이는 생기지 않지만 일단 태어난 아이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개척해야 하고 부모는 옆에서 그들이 자라는 것을 돌볼 뿐이듯 말이죠.(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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