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순간 세트 - 전2권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ㅣ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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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배달과 신문 연재, 가슴 설레게 잘 봤는데 드디어 책으로!!! 아아, 행복한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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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근의 들꽃이야기
강우근 글.그림 / 메이데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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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추위가 예고된 초겨울의 한 날, 내 마음 속에 봄이 왔다. 보옴.

내 안에 봄을 틔워준 책은 바로 『강우근의 들꽃 이야기』.

강우근의 '봄꽃' 이야기도 아니고, '들꽃' 이야기인데, 굳이 한 계절, 봄을 그리워하는 건, 내가 사랑하고 기다리는 꽃 중에 봄꽃이 많기 때문일 거다.

꽃은 봄 뿐 아니고, 여름에도 피고, 가을에도 피고, 그리고 겨울에도 피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다리게 되는 건 아무래도 봄꽃.

기나긴 추위 내내 언제 봄이 오려나, 동구 밖에 님 마중 나가 있듯이 기다리게 되는 봄꽃. (봄꽃과 비교하자면 여름꽃, 가을꽃은 계절 따라 휘유휘유 흘러가다보면 절로 앞에 다가와 있는 느낌이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봄맞이꽃이며 꽃마리며 별꽃이며 현호색이며 양지꽃이며 자운영이며, 내가 사랑하는 꽃들과 눈을 마주치게 되는 그 봄이 내게는 천국.

화려하고 예쁜 꽃들보다는 들판 여기저기, 혹은 보도블럭 틈새에, 혹은 전봇대 밑에 아무데서나 옹기종기 혹은 외로이 자라는 작은 꽃들을 더 좋아한다. 길을 가다 작은 꽃 앞에 멈춰 있는 나를, 작은 꽃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있는 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거리기도 한다. 저기에 뭐 볼 게 있나 싶은 거다. 간혹 "뭐 찍으세요? 아무 것도 없구만."이라고 물어오는 이도 있다. 들꽃은, 아는 이에게만 보이지. 그들에게 관심없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는 이들에게는 그저 '이름 없는 풀' '잡초'에 지나지 않지만, 일단 그들과 마음이 통하고 나면 꽃가게를 장식한 그 어떤 꽃들 못지않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두 각자의 이름을 가진 꽃이고 풀이다. 남들은 눈길 주지 않는 그런 작은 들꽃들을 나 혼자 마음껏 누린다는 데서 오는 뿌듯함도 덤으로 맛보며, 이 작은 꽃들과 사랑을 나누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하다.

 
 

이 책에는 그 작은 꽃들,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과 나무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제목 하나하나에서 꽃이름을 보며 그동안 내 눈에 담았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언젠가 이름을 익혔던 건 분명하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아이들의 사진을 찾아보기도 하고, 그 식물의 이름이 등장하는 책 제목이며 시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책 한 권을 읽으며 참 많은 만남을 가졌다.

 

식물을 좋아해 (많이는 못 읽어도) 일 년에 몇 권은 식물에 관한 책을 읽게 되는데, 그 동안 읽었던 책과 이 책의 가장 큰 차이점을 하나 느꼈다면, 그건 바로, "'쓸모없는 식물'이 어디 있겠는가. 그 쓰임을 모를 따름"이라는 것이다. (많은 책을 읽은 것을 아니지만) 다른 책들에서는 귀화 식물 중 많은 식물들을 생태계 교란이니 뭐니 해서 뽑아 없애야 할 식물로 지정하는 경우가 많고, 내가 한창 활동하던 들꽃 카페에서도 역시 모모 식물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식물이니 뽑아버리는 게 좋습니다, 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어 왔는데, 이 책에서는 그 모든 식물을 '두둔'하고 있다. 내게도 낯설지 않은 퇴치 명단에 오른 식물들이 이 책에 많이 등장하지만, 지은이는 그 어느 풀 하나도 "뽑아 없애야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내가 무시무시하게 생각하고 있는 환삼덩굴조차.(책을 읽으면서 계속 궁금했다. 이 책에 환삼덩굴도 나올까? 무시무시한 기세로 밭을 점령하고 살짝 스치기만 해도 살갗을 그어버리는 그 풀에게는 과연 어떤 쓸모가 있는 걸까? 하고 말이다. 과연 이 책에서는 환삼덩굴에 대해서 "가시덤불 같은 내 삶의 의미는 도대체 뭘까?"라는 심오한 질문과 함께 그 '쓸모'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이쯤 되어서는, 정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널찍하고 시원스럽게 생긴 잎과 곧 예쁜 열매가 익을 것 같은 동글동글 구슬이 달린 풀을 보고 사진을 찍어 활동 중이던 카페에 이름을 문의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미국자리공'이었다. 많은 분들이 댓글로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외래종이니 눈에 띄면 뽑아버리는 게 좋다고 했고, 그날 돌아가던 길에, 나는 그 아이를 뽑아 버렸다. 방금 낮에 예쁘다고 눈 마주치고 한참을 머물며 이리저리 사진도 찍었던 아이였는데 말이다. 새로 만난 예쁜 아이에 가슴이 설렜었는데 말이다. 그 후 내내 그 식물이 마음에 걸렸었다. 집에서는 화분에 난 '잡초' 하나도 웬만해서는 뽑아버리지 않고 공생을 주장하면서, 그 풀은 왜 그렇게 확 뽑아버렸는지. 이 책을 읽으며 그때 내가 뽑아버린 미국자리공이 생각나 다시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뽑아버리라고 하면 뽑아버리고 쓸모없는 식물 없으니 무작정 뽑아버릴 일은 아니라고 하면 또 금세 뽑으면 안되는가 싶고, 다 내가 식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일 같아, 이에 관련해서 조금 더 깊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책은 왜 여기저기서 철저히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그 풀들도 모두 감싸주는 건지, 정말 그렇게 무작정 뽑아버릴 일은 아닌 건지 궁금하다.

 

 

이 책의 리뷰를 쓰기 위해 블로그에 들어오니 마침 이지형의 '봄의 기적'이 흘러나온다. 안 그래도 마음속에 봄이 들끓고 있었는데, 아직 채 오지도 않은 겨울이 서운하게시리 봄이 더욱 기다려진다.

무작정 봄봄봄, 아직 때가 되지 않은 보옴만 기다릴 게 아니라 내일은 아직 길가에 피어 있는 개여뀌랑 인사라도 나누고, 꽃은 피어 있지 않아도 푸름을 간직하고 여기저기 옹송그리고 있는 작은 친구들을 만나봐야겠다. 이밤, 괜히 마음이 들썩들썩한다.

작고 여린, 하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강한 작은 식물들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과의 만남이 참으로 행복했다.

오래 잊고 지냈던, '나의 들꽃 이야기'도 다시 가슴속에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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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결혼식
한지수 지음 / 열림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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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는 세 권의 소설밖에 읽지 못 했다.

올 들어 가장 바쁜 한 달을 보내느라, 하루에 책 한 쪽도 읽지 못 하는 (정말 근 년 몇 동안 거의 없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잠자리에 들어 잠들기 전까지 조금씩 읽어나갔던 이 책.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싶어 새벽까지 해야 할 일을 조금 서둘러 끝내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흡인력 있는 책이었다.

2006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중단편소설 부문 당선작인 「천사와 미모사」는 물론이거니와, 수록작 일곱 편 모두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온두라스에 있는 한지수 님 덕분에 쉽게 기억할 수 있었던 '한지수'라는 이름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배꼽의 기원」이었다.

이틀 밤 동안 읽었는데(앞서 말했듯이, 일하다 지친 눈으로 읽었던지라, 매일 야곰야곰, 조금씩밖에 읽지 못했다)

읽을 때마다 아는 이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눌러야 했다. 문자를 보내기에는 너무 늦은 새벽 시간이었으니까.

그때 보내지 못한 문자, 지금 여기에서라도 보내보고 싶다.

"한지수소설집자정의결혼식수록작'배꼽의기원'정말강추예요.특히자궁을가진우리여자들에게!!"

자궁의 어원이 매트릭스인데, 어머니라는 뜻이죠. 신의 작은 피조물을 키우는 그릇이고, 그래서 무엇보다 소중한 곳이에요.

여자의 본질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목소리에 이상한 적의가 묻어 있었다. (139)

'신의 작은 피조물을 키우는 그릇'인 자궁이 바로 이 소설의 화자이다.

아아, 나도 내 안에 품고 있지만, 다달이 그것의 존재를 느끼지만(그러면서 무척 귀찮아 하지만) 한번도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바로 그 자궁 말이다.

사실, 나는 '자궁'하면 내 안의 그것보다도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에서 만난 한 표현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우리를 세상으로 불러준 당신의 아기집'이라는 그 표현.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지만, 그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한번도 내 어머니 안의 그것에 대해 '우리를 세상으로 불러준' 귀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자궁'은 이 두 작품을 통해 내 안에 어떤 문학적인 신체 기관으로 감각되는 존재가 되었다.

'신의 작은 피조물을 키우는 그릇', '우리를 세상으로 불러준 당신의 아기집', 그 귀한 자궁이 '당신'의 몸 안에서 한 번도 '아기집'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당신'의 몸에서 분리되는 그 사건 속에서, 자궁이 들려주는 이야기.

어쩌면 신비롭고, 어쩌면 애틋하고, 어쩌면 서글프기도 한 자궁의 그 이야기, 정말 내 곁의 모두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배꼽의 기원」 뿐만 아니라 첫 수록작으로 단번에 나의 마음을 사로 잡은 「미란다 원칙」, 한 모텔방을 낮과 밤으로 나누어 공유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 「이불 개는 남자」, '국내산' 소는 될 수 있어도 '한우'는 될 수 없는 사이란 이야기를 통해 우리 주변의 수많은 국제 가정을 떠올려 보게 되는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 등 수록작 한 편 한 편을 만나는 시간이 참 행복했다.

비록 많은 책을 읽지는 못한 11월이지만,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읽은 까닭인지, 생각보다 섭섭지 않은 느낌이다.

그러니, 책 읽을 시간은 부족하고, 신중하게 한 권 골라 읽어야 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 이 책을 집어든다면, 꽤 괜찮은 선택이다.

오랜만에 나의 '선택'을 칭찬해주고 싶다. 쓰담쓰담.

 

 

"아, 왜 자꾸 존대를 하고 그러십니까 형님? 말을 그냥 턱, 내려노십쇼. 근데요 형님? 지금 쟤하고 똑같은 얼굴이 왜 이리 많습니까?"

"21번 염색체가 우리보다 한 개 많아서요. 그래서 모두들 웃고 있잖아요."

"모자라는 게 아니라 형님, 많아서 저리된 겁니까?"

"가끔씩 우리보다 진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화구 뭐구 잘 모르겠지만요 형님? 쟤네들 얼굴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고 있더라니까요." _ 「미란다 원칙」

 

언젠가 아내의 사전에서 불법의 뜻을 찾아보았다. '법에 어긋남'이라고 씌어 있었다. 내친김에 범법을 찾아보니, '법을 어김'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니까 범법은 고의적인 것이고 불법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인데,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 다 자기들이 정한 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_ 「천사와 미모사」

 

인간의 모든 장기들이 그것을 담고 있는 사람을 닮았다고 하면 당신들은 아마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장기관들은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자세와 거의 맞먹는 기질을 지녔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나도 당신만큼 비밀스러운 기관이다. _ 「배꼽의 기원」

 

"그래? 상처를, 수학처럼 논리적으로 보여줄까? 그래야 직성이 풀려?" _ 「이불 개는 남자」

 

누군가의 비밀을 안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이해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그때의 당신은 몰랐다. 또한 그 비밀의 무게만큼 책임을 짊어지는 일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_ 「자정의 결혼식」

 

그때의 그녀에게 중요한 건, 어딘가에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아내는 일이었다. 논리는 체험 밖의 일이다. 삶은 체험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살아갈 만하다. 언제 어디에서든. _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

 

 삶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을 때와 같다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항상 정말로 아픈 건 지금부터라고 생각하지만 그땐 이미 끝난 뒤라는 것이다. _ 「페르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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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실험실 ㅣ 랜덤소설선 21
장은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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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진 작가의 책을 출간 역순으로 읽어왔다.

작가의 첫 책이자, 내가 읽은 세 번째 책.

그리고 가장 놀랍고 감탄스러웠던 책.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잔잔하고 반가운 손편지 같은 글로 나를 감동시켰고(이 소설로 나는 장은진 작가의 열혈 독자가 되어버렸지!)

『앨리스의 생활방식』은 조금쯤 기괴하고 괴팍한 은둔형 주인공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던 당시의 나와 하나처럼 느껴져 무척 뭉클하게 읽었고,

그리고 이 책, 『키친 실험실』은 앞의 두 권과 달리 섬찟하고 잔인한 묘사들이 곳곳에 등장하고 단편마다 독특한 스토리에 감탄을 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이라 했더니 잔인한 거 싫어할 것 같은 원주 님 취향은 아닐 것 같다고 하셨더랬다.

사실, 잔인한 거 싫어한다. 싫어한다기보다, 후환이 두려워(?) 못 보는 편이다.

잔인한 묘사들은 어쩜 그렇게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지는지, 그러지 마, 하지마, 라고 외쳐도 머리가 끊임없이 그려내는 잔인한 영상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 내 안에서 공포가 뻥튀기 되어 몸서리가 쳐지기 때문인데...

이 책을 읽는 중에도 그런 위기의 순간들이 다가오긴 했으나, 감수하고 읽어야 한다. 읽게 만든다.

엄청난 흡인력, 이어질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지는 전개. 그러니, 잔인함 쯤은 참고 읽어야지. 아니, 잔인해서 더 재밌나...?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8편의 소설에는 이런 인물, 이런 이야기가 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남자는 매일 아내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다. 문제는, 요리의 재료가 고양이, 개구리 같은 것들이라는 것.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는다는 것.('키친 실험실')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 끝에 이웃의 전속 '요리사'가 된 여자. 자신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 고스란히 음식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을 알고 분노하여 바퀴벌레로 요리를 하고 다 썩어가는 음식을 이웃에게 먹이고 자기도 꾸역꾸역 먹는 여자.('달을 위한 음식')

아파트에 은둔하며 함께 다이어트를 하는 두 여자. 다이어트가 실패할 위기가 다가오면서 피 뿌리는 전쟁을 하는 두 여자.('동굴 속의 두 여자')

뼈 수집가 혹은 뼈 예술가인 남자. 흙속에 묻히면 그만일 혹은 쓰레기통에 버려지면 그만일 온갖 종류의 뼈들이 남자의 손에서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뼈')

마트 배달일을 하며 남의 집 냉장고 엿보는 게 취미인 여자. 그리고 아파트에 출몰하는 냉장고 음식 도둑.('냉장고를 열어보세요')

거울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공장이 부도나며 체불 임금 대신 거울을 가져와 거울 위에서 잠을 자는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에게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하는 이웃 604호 남자.('거울의 잠')

공터의 버려진 차 안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가는 여자. 어느날 그녀의 공간에 찾아와 은근히 주인 행세를 하며 기묘한 동거를 하게 된 남자. 그리고 일대에는 쫘악 퍼진 몇 년 전의 살인사건.('날짜 없음')

사람의 나체에 글을 쓰는 예술가이자 작가인 남자. 남자의 이웃에 사는 그림자와 그의 아내. 남자의 모델이 되겠다고 찾아온 전직 건설노무자. 그리고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인연.('몸')

 

제목처럼 '키친'에서 만들어지는 음식들이 여러 글들에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며, '실험'적인 이야기들이 단박에 마음을 사로잡는다.

독특한 이야기가 재미있을 뿐 아니라, 이야기가 끝난 뒤 그 여운을 곰곰 곱씹어 보는 맛도 뛰어나다.

아마 이 책을 첫 만남으로 가졌더라도 나는 장은진이라는 작가에게 매료되었을 게 틀림없다.

한 권 한 권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저마다의 매력을 보여주는 작가의 책들을 모두 읽고 나니, 작가에게 더욱 푹 빠져든 기분.

앞으로 오래오래 좋은 글 많이 내주었으면 좋겠다.

그 앞길에 나도 늘 함께 하고 싶다.

 

 

 

(……)

나는 생각해본다.

어쩌면 내일은 그럴듯한 실험을 할 수도 있겠지, 라고.

그래서 어쩌면 그럴듯한 인간이 될 수도 있겠다, 라고.

그런데 이를 어쩐다.

인간은 결국 다 똑같네, 라는 결론에 또 이르고 만다.

인간은 누구나 실험실에서 태어나, 실험실에서 살다, 실험실에서 죽는다.

지구라는 혹은 우주라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죽기 살기로 자기 삶을 실험해보다, 죽는다.

_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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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라, 사랑할 시간이 없다 - 외롭고 서툰 이들을 위한 치유성장 에세이
신현림 지음 / 예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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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의 여행에서 돌아온 길이었다.

김포공항 서점 소설 코너를 한참 둘러보다가 그냥 돌아나오는데 눈에 띈 이 책.

(소설 코너에도 읽고 싶은 책은 무지 많았으나 여행으로 피곤했으므로 글자가 빼곡히 박힌 소설은 읽기 힘들 것 같았다.)

벚꽃 사진 표지가 잔잔하고 예뻤고, 제목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으며, 살짝 들춰본 페이지마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문구들이 미소 짓고 있었다.

봄날 벚꽃길 걷는 듯 분홍빛 수줍어지는 마음으로 이 책을 사들고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 안에서 열심히 읽었다.

 

'외롭고 서툰 이들을 위한 치유 성장 에세이'

사랑에 서툴고 삶에 서툴고 관계에 서툰 이들. 모든 게 서툴어서 자꾸 넘어지고 무릎이 까이는 이들에게 신현림 시인이 들려주는 고운 언어들.

신현림 시인의 글은 간간이 만나본 기억이 있으나, 책은 처음인 것 같다.

이 책 속에 실린 많은 문장들이 시인이 쓴 시에서 나온 것임은 나중에 알았다. 내가 밑줄 그은 그 수많은 문장들.

당장 시인의 시집을 몇 권 주문했다.(요즘 같은 총알 배송 시대에, 이게 웬 선사시대 배송인지, 일주일 전쯤 주문한 시집은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

시인의 시가 궁금해지게 만드는 그런 글들이었다.

위로도 받았다. 위안도 느꼈다. 마음이, 포근해졌다.

 

마음이 마음에게 전하는,

영혼이 영혼에게 전하는,

따뜻한 배려의 말로 힘겨운 나날을 견디는 인생.

함께 있는 장소를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만들고,

함께 있어 가장 평온한 들판이 되어주어라.

이 세상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고,

같은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단다.

다시 못 만날 때를 생각하며 사랑해라.

영영 다시 못 만날 때가 오니 깊이 사랑해라.

누구든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사랑을 누려라.

일만 하지 말고, 열애의 심장을 가져라.

누구나 마음 속엔 심리치료사가 있단다.

심리 치료사가 바로 사랑이다.

많은 것을 낫게 하고 견디게 한다...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책을 사랑하고 풍경을 사랑하고 계절을 사랑하고 여행을 사랑하고 바람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무엇을 향한 것이든, 사랑이 나를 낫게 하고 견디게 함을, 내 마음 속에는 외부의 그 누구도 해주지 못할 강력한 치유제가 들어있음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내 안의 강력한 힘을...

 

신현림 시인의 사진과 함께 만난 글들이 여행길 피로를 싸악 날려주었음은 물론,

차가워지는 날씨따라 점점 서늘해져가던 마음에도 군불을 지펴주었다.

시인의 시집이 얼른 도착하면 좋겠다.

이 책에서 조금씩 맛본 시들, 온 가슴을 열고 맞아들일 테다.

읽어라, 헤어질 시간이 없다...

 

우리는 서로 노력하고, 의지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진다.

서로에게 기댐으로써 세월이 흘러도 쉽게 깨지지 않는 튼튼한 애정을 키울 수 있다.

사람은 기꺼이 주는 마음이다.

두려움 없이 상대의 약점까지 모두 품는 것이다.

인생은 길지 않다.

다투거나 쉽게 헤어지기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누군가의 꽃이 될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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