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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실험실 ㅣ 랜덤소설선 21
장은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장은진 작가의 책을 출간 역순으로 읽어왔다.
작가의 첫 책이자, 내가 읽은 세 번째 책.
그리고 가장 놀랍고 감탄스러웠던 책.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는 잔잔하고 반가운 손편지 같은 글로 나를 감동시켰고(이 소설로 나는 장은진 작가의 열혈 독자가 되어버렸지!)
『앨리스의 생활방식』은 조금쯤 기괴하고 괴팍한 은둔형 주인공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던 당시의 나와 하나처럼 느껴져 무척 뭉클하게 읽었고,
그리고 이 책, 『키친 실험실』은 앞의 두 권과 달리 섬찟하고 잔인한 묘사들이 곳곳에 등장하고 단편마다 독특한 스토리에 감탄을 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이라 했더니 잔인한 거 싫어할 것 같은 원주 님 취향은 아닐 것 같다고 하셨더랬다.
사실, 잔인한 거 싫어한다. 싫어한다기보다, 후환이 두려워(?) 못 보는 편이다.
잔인한 묘사들은 어쩜 그렇게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지는지, 그러지 마, 하지마, 라고 외쳐도 머리가 끊임없이 그려내는 잔인한 영상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 내 안에서 공포가 뻥튀기 되어 몸서리가 쳐지기 때문인데...
이 책을 읽는 중에도 그런 위기의 순간들이 다가오긴 했으나, 감수하고 읽어야 한다. 읽게 만든다.
엄청난 흡인력, 이어질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지는 전개. 그러니, 잔인함 쯤은 참고 읽어야지. 아니, 잔인해서 더 재밌나...?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8편의 소설에는 이런 인물, 이런 이야기가 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남자는 매일 아내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다. 문제는, 요리의 재료가 고양이, 개구리 같은 것들이라는 것.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는다는 것.('키친 실험실')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 끝에 이웃의 전속 '요리사'가 된 여자. 자신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 고스란히 음식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을 알고 분노하여 바퀴벌레로 요리를 하고 다 썩어가는 음식을 이웃에게 먹이고 자기도 꾸역꾸역 먹는 여자.('달을 위한 음식')
아파트에 은둔하며 함께 다이어트를 하는 두 여자. 다이어트가 실패할 위기가 다가오면서 피 뿌리는 전쟁을 하는 두 여자.('동굴 속의 두 여자')
뼈 수집가 혹은 뼈 예술가인 남자. 흙속에 묻히면 그만일 혹은 쓰레기통에 버려지면 그만일 온갖 종류의 뼈들이 남자의 손에서 예술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뼈')
마트 배달일을 하며 남의 집 냉장고 엿보는 게 취미인 여자. 그리고 아파트에 출몰하는 냉장고 음식 도둑.('냉장고를 열어보세요')
거울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공장이 부도나며 체불 임금 대신 거울을 가져와 거울 위에서 잠을 자는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에게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하는 이웃 604호 남자.('거울의 잠')
공터의 버려진 차 안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가는 여자. 어느날 그녀의 공간에 찾아와 은근히 주인 행세를 하며 기묘한 동거를 하게 된 남자. 그리고 일대에는 쫘악 퍼진 몇 년 전의 살인사건.('날짜 없음')
사람의 나체에 글을 쓰는 예술가이자 작가인 남자. 남자의 이웃에 사는 그림자와 그의 아내. 남자의 모델이 되겠다고 찾아온 전직 건설노무자. 그리고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인연.('몸')
제목처럼 '키친'에서 만들어지는 음식들이 여러 글들에서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며, '실험'적인 이야기들이 단박에 마음을 사로잡는다.
독특한 이야기가 재미있을 뿐 아니라, 이야기가 끝난 뒤 그 여운을 곰곰 곱씹어 보는 맛도 뛰어나다.
아마 이 책을 첫 만남으로 가졌더라도 나는 장은진이라는 작가에게 매료되었을 게 틀림없다.
한 권 한 권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저마다의 매력을 보여주는 작가의 책들을 모두 읽고 나니, 작가에게 더욱 푹 빠져든 기분.
앞으로 오래오래 좋은 글 많이 내주었으면 좋겠다.
그 앞길에 나도 늘 함께 하고 싶다.
(……)
나는 생각해본다.
어쩌면 내일은 그럴듯한 실험을 할 수도 있겠지, 라고.
그래서 어쩌면 그럴듯한 인간이 될 수도 있겠다, 라고.
그런데 이를 어쩐다.
인간은 결국 다 똑같네, 라는 결론에 또 이르고 만다.
인간은 누구나 실험실에서 태어나, 실험실에서 살다, 실험실에서 죽는다.
지구라는 혹은 우주라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죽기 살기로 자기 삶을 실험해보다, 죽는다.
_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