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사람들 - 양해남 사진집
양해남 지음 / 연장통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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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 동네에는 경아 아지매가 있었고, 경아 삼촌과 경아네 소, 우물집 할아버지, 오실댁 할머니가 있었다. 탱자 나무가 무섭게 지키고 있는 오래된 집 한 채도 우리 동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었다. 겨울에 비닐 하우스에서 향긋한 딸기 향기가 풍겨져 나올 때면 인심 좋게 한 대야 수북히 딸기를 가져다 주던 '경아 아지매'를 나는 가장 좋아했다. 평생 논일 밭일 하느라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울퉁불퉁 못난 이가 유난히 눈에 띄었지만, 환하게 웃으며 딸기향과 함께 등장하던 아지매의 얼굴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오랜만에 경아 아지매를 떠올린 건 양해남 사진집 <우리 동네 사람들>을 만나서였다. 이 사진집에는 내 어린 시절 동네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그들의 미소가 가득 담겨있다. 사진집에서 뜨뜻한 온기가 배어 나올 것만 같다.

 

오전에 다리 수술 때문에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이른 시간부터 마음이 어찌나 초조한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다가 편안한 사진으로 마음을 좀 달래볼 요량으로 사진집을 펼쳐 들었다. 이미 한 번 넘겨보고 꽂아둔 책이었는데, 오늘은 사진집 속의 사진들이, 그 미소가 유난히 마음을 울리며 다가왔다. 마치 그들이 내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다 잘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힘내요, 다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니라니까..." 사진 한 장 한 장 속의 낯선, 그렇지만 낯설지 않은 듯한 이들이 내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주어 나는 불안으로 끓어오르던 가슴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참 정다운 존재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지금은 우리 동네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우리집으로 들어오는 짧은 골목에는 겨우 세 집 뿐이지만, 아주 가끔 골목에서 누군가를 맞닥뜨려도 나는 슬며시 땅만 쳐다보고 골목 제일 안쪽 우리집으로 잰걸음을 놀릴 뿐이다. 그들에게서는 딸기 향기가 나지도, 종일 온몸에 묻히고 다니는 흙냄새가 나지도 않아서일까, 나는 지금 마주치는 이곳의 사람들이 아닌 어린 시절의 우리 동네 사람들이 그립다. 우리 동네 사람이라면 으레 흙냄새 거름냄새가 나야 제맛이라는 듯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추억 속의 '우리 동네'가 아닌 지금 이 동네에는 어떤 이웃들이 살고 있는지...
 

 

이 책을 싸고 있는 겉표지를 벗기면 나오는 이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책 뒤에 보니 제본에 대해 짧은 설명이 나와 있다. "이 책의 장정은 책공방이 특허를 소유하고 있는 '누드양장제책'으로, 숨겨져왔던 책등의 신비감을 노출시켜 북아트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였습니다." 원래 책을 사면 책표지는 물론 띠지까지도 절대 벗겨내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는데, 이 사진집만은 자꾸 '알몸'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겉과 속이 모두 마음에 쏙 드는 아름다운 사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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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편지 - 유목여행자 박동식 산문집
박동식 글.사진 / 북하우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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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사막에 내리는 이슬처럼 축복 같은 것이지만 제 스스로 멀어지는 바람처럼 가벼운 것이기도 하다. 당신이 여행을 꿈꾼다면 이제 떠나라. 망설임은 그만하면 충분하다.'

 

서문을 읽으며 잠시 망설였다. 이 책, 여기서 덮어두고 나중에 볼까? 이제 개강이 코앞인데, '그래! 이제 망설임은 이만하면 충분해! 떠나자!'라는 굳은 결심을 하게될까봐 두려웠다. 하긴, 여행 에세이를 읽는 동안 마음속으로 그런 외침 외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이번에도 찐한 가슴앓이 한 번 하겠구나, 단단히 각오하고 낯선이가 여행지에서 보내온 편지를 읽기 위해 페이지를 넘겼다.

 

이 책은 여행가이자 사진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저자 박동식이 베트남, 라오스, 태국,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보내온 '편지'이다.(특히 라오스에서 쓴 글이 많아 무척 반가웠다. 내가 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 목적지 일순위로 꼽고 있는 곳이기에.) 이 책 속의 글들은 나라별로 구분지어져 있거나, 여행 정보를 알려주거나 하지는 않는다. 만남, 그리움, 인생, 희망, 행복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에 맞추어 이곳저곳에서 쓴 글들이 자유롭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넘어갔다가, 거기에서 잠시 서울에 들렀다가 다시 라오스에 가 있는다. 저자의 글을 따라 끊임없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다보면, 마치 내가 자유의 영혼이 되어 이리저리 떠도는 듯한 대리만족에 흡족해지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머리를 바쁘게 굴리기를 여러 번. 나도 모르게 책 속에 나온 나라들로 여행을 가는 상상의 날개를 마구 펼치고 있었다.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머릿속으로는 거의 구체적인 계획을 짜는 수준으로 말이다. 개강해도 어차피 강의는 하루밖에 하지 않을텐데, 한 5일 정도만 눈 딱 감고 다녀올까?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이건 뭐 당장이라도 여행가방 싸고 싶어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내가 서문을 읽으며 두려움에 떨었던 거다. '당신이 여행을 꿈꾼다면 이제 떠나라. 망설임은 그만하면 충분하다'라는 말이 무슨 마법의 주문처럼 들려와서. 자꾸 귓가를 울리는 "떠나라, 떠나라"라는 속삭임을 잠시 잠재우며, 가까운 시일 내에 진지하게 여행 계획 한번 짜봐야겠다.

 

책 속의 많은 이야기 중에, 싱가포르에서 친구를 떠올리는 모습이 무척 가슴 뭉클했다. 뜨거운 여름날의 크리스마스를 맛보고 싶어 싱가포르에 가보고 싶다던 친구. 암투병 중이던 어느날, 종로 어느 떡집의 떡이 먹고 싶으니 사다달라는 말을 하고 사흘 뒤, 친구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저자는 친구에게 떡을 사다주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었는데, 그게 그만 한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싱가포르에 들러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곳엔 그 친구가 오고 싶어 했었지, 하고. 여행을 꿈꾼다면 그만 망설이고 당장 떠나야 하듯이, 우리는 '나중'이 아닌 '지금' 해야 할 일들이 참 많은데, 그것들을 늘 "나중에"라는 말에게 맡겨버린다. 그 뒤에 얼마나 큰 회한이 찾아올지 짐작도 못한 채 말이다. 어제 <사미인곡>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스물아홉 살 사진작가 이석주 씨가 전해준 교훈도 그러했다. 3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은 그가 그 순간에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우리에게 나중은 없다는 것. 나중에 해야지, 나중에 말해야지 했던 것 들에게 '나중'이란 있지 않다는 것. 지금 하고, 지금 말하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나중'이라는 단어로 포장해 버려버린 내 삶의 많은 부분들에 미안해 하며 아쉬워하며 많은 눈물을 쏟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이틀 전에 읽은 이 책의 내용을 떠올려 보는데, 어제 방송을 본 영향인지, 싱가포르에서 떠올린 친구 이야기에 다시금 가슴이 아려온다.

 

'삶은 일회성이다. 우리 모두의 길은 각기 다른 길이다. 갔던 길을 되돌아와 새로운 길을 간다고 해서 그 길이 어제의 길은 아니다. 때문에 남과 내가 비교될 수 없으며 나 자신도 동시에 두 개의 길을 갈 수 없으니 그 어떤 삶도 저울질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사소한 것까지 비교되며 살았다. 이제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할 때다.'

 

어떤 말을 들어도 이제는 다 '떠나라'는 말로 들린다. 망설임은 이제 그만. 올해 나의 목표에도 있지 않은가. '비행기 타기~!'라고. 그토록 갈망하면서 왜 자꾸 망설이고 두려워하는지. 올해에는 꼭 가고 말리라. 누군가는 '욕망이 멈추는 곳'이라 표현했던 그곳, 라오스로. 더 이상 '나중'이라는 말에게 내 인생을 맡기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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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
이지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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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김연수의 문장배달'을 통해 알게 된 책이다.

그때 플래시에서 보여지는 그림과 글과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 그리고 제목까지 모두가 아름다워 읽지도 않은 이 책에 반하고 말았는데, 반 년도 더 지나서야 읽어보게 되었다.

 

영화 '모던보이'의 원작 소설 <모던보이(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로 제5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지민의 소설집이다.

 

표제작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는 먼저 플래시로 살짝 맛보았기에 그 내용이 더욱 궁금했다.

긴 생머리 소녀를 닮은 집과, 그 집 앞에서 어린 소년이 되어 추억의 길을 걷는 남자, 그 집을 질투하다가 그의 가슴 속에서 그녀와의 추억을 담은 작은 길을 발견하는 여자. 내 마음속에 수갈래로 나 있을 추억의 길들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많은 고통을 겪은, 성형수술 중독에 걸린 '대천사', 나이 서른 일곱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예쁜 커피숍을 차렸지만 정작 그 카페가 온전해 질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카페를 포기하고 나서인 '오늘의 커피', 청첩장까지 찍어놓고 약혹자가 여고생과 원조교제로 감옥에 들어가버린 '서른 살이 된 롤리타',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아기 방 가득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모아온 키티 인형으로 장식을 해 놓고 잠시 집을 나가버린 '키티 부인', 남편의 불륜을 눈치채고 자신도 맞짱 불륜으로 맞서는 '불륜 세일즈', 하얀 옷을 입고 등장한 미모의 여인에게 동전 몇 개로 영혼을 팔아버린 '영혼 세일즈', 고급 밀폐용기 타파웨어 안에 숨겨진 보물, 그리고 그 안에 타임머신처럼 숨겨진 과거의 기억들 '타파웨어에 대한 명상', 아름다운 신혼여행지에서 만난 신혼부부가 알고보니 불륜 커플? '허니문'.

 

원조교제니 불륜이니 성형중독이니 하는 다소 눈쌀을 찌푸리게 할 수 있는 소재들이 등장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일들에 목소리를 높이거나 자극적인 묘사 같은 것은 일절 없다. 모든 이야기가 조곤조곤 아름다운 목소리로 흘러나와 참 예쁘게 읽은 책이다. 이 책의 아름다운 제목과 표지가 한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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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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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은 날 : 2006년 8월 22일

다시 읽은 날 : 2009년 2월 22일

 

'2009년 독서 계획 - 김연수 작가 책 다시 읽기' 2호

 

이 책은 작가가 말하는 '특별판 소설' 중 한 권이다.

'내가 생각하는 특별판 소설은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짧은 소설이다. 지난 특별판 소설은 1997년 '7번 국도'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다'라고 <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의 말에 나와 있다.(<사랑이라니, 선영아>는 두 번째 특별판 소설. 그리고 다음 특별판 소설은 2009년에 출간될 예정이라고 나와 있는데, 작가님이 안 잊으셨다면, 올해 그 세 번째 이야기를 만날 수 있겠다!)

 

7번 국도는 두 남자 '나'와 재현, 그리고 한 여자 세희가 나오는 짧은 소설이다.(여기에 재현이 사랑했던 여자 서연도 함께.)

'7번 국도'는 내가 재현에게서 구입한(재현이 서연에게서 받은 추억이 담긴 선물이기도 한)  낡은 비틀즈 음반의 제목이고, 내가 지하철 역에서 사들고 왔으나 얼마 못가 죽어버린 식물 '뒈져버린 7번 국도'이기도 하고, 내가 자주가던, 그래서 비틀즈의 '7번 국도' 음반을 맡긴 '카페 7번 국도'이고, 동해지방에 발생한 수인성 전염병 '7번 국도'이기도 하고, 아내와 딸을 사고로 잃고 정신이 나가버린 '7번 국도씨'이기도 하고, 나와 재현이 자전거로 여행한 '7번 국도'이기도 하다.

 

수많은 '7번 국도'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이 책. 음악평론가로도 활동한 김연수 작가의 면모가 눈에 띄는 책이기도 하다. 어딘가에 OST가 있을 것만 같은 소설이다. 책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비틀즈 싱글 <Route 7>을 들어보고 싶었던 건, 내가 음악에는 무지렁이기 때문에 그런 음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라서였겠다. 하지만 나같은 사람이 많을 것을 우려해서 소설 말미의 '덧붙이는 글'에 작가가 친절히 일러준다. '여기에 나오는 비틀스의 싱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혹시 구해보려고 하지 마시기를.' 덕분에 있지도 않은 앨범 찾아 눈이 빠져라 웹사이트를 뒤지고 다니는 수고를 덜었다.

 

7번 국도를 다녀온 후 그들의 앞에는 과연 새로운 미래가 펼쳐졌을까? 꽃을 넣으면 비둘기가 나오는 마술사의 모자 같은 역할을 7번 국도가 해주었을까? 7번 국도를 빠져나오는 길에 환한 서광이 비치거나, 유토피아 같은 세계가 펼쳐지지야 않았겠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으리라 믿는다. 7번 국도에 들어서기 전과, 7번 국도를 달려온 후의 그들은 같을 수 없으니까. 이미 그들 안에 집어넣은 꽃은 비둘기든 다른 무엇으로든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변화를 했을테니까.

 

 

("아빠, 이번 여름에 엄마 휴가 맞춰서 열흘 쯤 7번 국도 타고 여행해볼까?"

라고 어디 다녀오던 길에 아빠에게 여쭤봤더니, 역시나 울 아버지. 조금은 기대했던 대답을 들려주신다.

"7번 국도? 아빤 이미 쫘악 타고 돌았지!"

도대체 아빠가 안 가본 곳은 어디인가! 하지만 나는 못가봤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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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1반 34번 - 종잡을 수 없는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을 잡아주는 이야기
언줘 지음, 김하나 옮김 / 명진출판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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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줘의 책을 처음 만난 건 내가 자주 들르던 헌책방에서였다.

저자 이름이 중국인이길래 빼내들어 넘겨봤는데 지미(幾米)의 책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과 글들이 금세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지미와 같은 대만 작가이고, 역시 글과 그림 모두 직접 쓰고 그렸다.

 

그 책의 제목은 <불면증>이었는데, 그 여름에 바닷가에 다녀오는 길에 막힌 도로위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원래는 바닷가에서 분위기 잡고 읽으려고 가져갔는데, 바닷가에서는 뛰노느라 바빠서 까암빡하고 돌아오는 길의 꽉꽉 막힌 도로 위에서 서서히 스러지는 햇빛에 의지해 읽었다.)

 

그 책 한 권으로 내 마음에 담았던 작가 언줘를 <1학년 1반 34번>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작가는 아침식사를 하며 읽고 있던 신문에서 연이은 무단결석을 하고 있는 아이에 관한 글을 보게 된다.(대만의 신문에는 무단결석 하는 아이까지도 기사로 실리는구나,하고 잠깐 놀람) 그리고 기사에 실린 그 아이의 글 중 이런 대목을 보고 그 아이에게 그림으로 말을 걸어보기 위해 이 책을 펴냈다고 한다. "떠돌이 개가 되고 싶다. 떠돌이 개는 자유로우니까……."

 

'자유'……. 떠돌이 개가 부러울 정도로 그 아이가 바라던 그 '자유'라는 놈은 어디에 꽁꽁 숨어 그 여린 가슴에 깊디깊은 생채기를 냈을까? 부모의 손에 숨었을까? 선생님들의 회초리에 숨었을까? 아이들에게서 숨쉴 자유마저 빼앗아버린 교육제도의 뒤에 숨었을까? '자유'라는 낱말의 뜻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그리고 그 낱말을 너무 일찍 빼앗겨버린 이 땅의 아이들이 가여워 답답하고 한숨이 났다.

 

이 책의 주인공 '34번'도 그토록 사랑하는 늦잠을 '34번'이라는 '이름'과 맞바꾸고 자유를 박탈당했다. 이제는 늦잠을 잘 수도 없고 마음대로 산으로 들로 뛰어다닐 수도 없다. 하고 싶지 않지만 상을 받기 위해 어른들이 강요하는 그림 그리기를 거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34번'에게 이 세상은 자유를 빼앗긴 감옥처럼 변해버렸다. 친구도, 올챙이도, 늦잠도, 모두 다 빼앗아 가버린 '34번'이란 이름에서 벗어나고 싶다.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난 원래 자유로웠어.

새벽의 이슬, 오후의 태양 모두 내 것이었지.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은 모두 내 것이 아니야.

이제 내 것은 네모난 시간표와 교과서, 참고서뿐이야.

또 있구나. 어른들의 잔소리."

 

하지만 이렇게 투덜거리고 세상을 원망하는 동안에도 '34번'은 매일매일 자라고 성장한다. 올챙이 샤오헤이가 뒷다리가 나오고 앞다리가 나오고 어느날 훌쩍 그의 곁을 떠나버린 것처럼.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이런 변명대신에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34번'이 자신의 몸을 감싸주던 따뜻한 저녁노을 아래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고, 이제 더 이상 무단결석하는 일이 없기를. 아, 정말이지, 아이들이 그놈의 '자유' 때문에 떠돌이 개를 부러워하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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