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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평점 :
나 가장 찬란하지 못 한 이 때에, 제목부터 찬란한 시집을 한 권 만났다.
혹시나 이 시집에 기대어, 내 마음도 찬란해지려나, 단 한 줄기 빛이어도 좋았다.
모기장 구멍만한 빛줄기라도 내 마음 비춰주어, 나도 다시 찬란한 마음일 수 있기를 바랐다.
가끔은 생각이 나서
가끔 그 말이 듣고도 싶다
어려서 아프거나
어려서 담장 바깥의 일들로 데이기라도 한 날이면
들었던 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이거나 누이들이기도 했다
누운 채로 생각이 스며 자꾸 허리가 휜다는 사실을 들킨 밤에도
얼른 자, 얼른 자
그 바람에 더 잠 못 이루는 밤에도
좁은 별들이 내 눈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얼른 자, 얼른 자('새날' 부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얼른 자, 얼른 자.
이 한 마디 붙잡고 운다.
나도 지금은 그 말이 듣고 싶다.
자고 일어나면 내 마음도 찬란해져 있을 테니, 얼른 자라고, 얼른 자라고,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진다고...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괜찮아지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나는 조금 더 덜 찬란해져 있는 듯 했고, 자고 일어나면 나는 조금 더 바닥에 붙어 있었다.
마음이 지옥이니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시인이 말했다.
'마음에 휘몰아치는 눈발을 만나지 않는다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라고.
나 그렇다면 지금 완전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마음에 미친 듯 불어닥치는 눈발을 안고?
이 말이 그 말로 들릴 때 있지요 그 말도 이 말로 들리지요 그게 마음이지요 왜 아니겠어요 몸피는 하나인데 결이 여럿인 것처럼 이 사람을 귀신이라 믿어 세월을 이겨야 할 때도 있는 거지요 사람 참 마음대로지요 사람 맘 참 쉽지요 궤짝 속 없어지지 않는 비린내여서 가늠이 불가하지요 두 개의 달걀을 섞어놓고 섞어놓고 이게 내 맘이요 저것이 내 맘이요 두 세계가 구르며 다투는 형국이지요 길이가 맞지 않는 두개의 자(杍)이기도, 새벽 두 시와 네 시 사이이기도 하지요 써먹을 데 없어 심연에도 못 데리고 가지요 가두고 단속해봤자 팽팽히 와글대는 흉부의 소란들이어서 마음은 그 무엇하고도 무촌(無寸)이지요('마음의 내과' 전문)
'팽팽히 와글대는 흉부의 소란들' 때문에, 이 찬란한 시집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시집이여, 지금 내 마음이 너무나 누추하다.
하지만 곧 따뜻한 계절은 오겠지.
그리고 나는 또 화분을 만들어 씨를 뿌리거나 작은 식물들을 옮겨 심을테고, 그들의 초록빛에서 생명의 신비 느끼고 조금쯤은 찬란해질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 조금 펴진 뒤에 이 시집 다시 만나 조금 더 제대로 마음을 나누고 싶다.
봄이, 여름이 미칠 듯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