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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풍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
장 지오노 지음, 박인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평점 :
어딘지 서정적인 느낌이 드는 제목에 그와 어울리지 않는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표지 그림.
책의 내용은 제목의 느낌일까 그림의 느낌일까 궁금했다.
얼마 읽지 않아, 아니 책을 읽기도 전에 앞에 그려져 있는 가계도를 보고 후자일 것임을 짐작했다.
가계도부터 상당히 뜨악한 기분이었다.
가계도가 미리니름(스포일러)인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들었는데, 그러니까 5대에 걸쳐 한 일가가 어떻게 죽었는지가 설명되어 있는 가계도였다.
(지금 내가 설명하는 이들의 죽음은 미리니름이 아니다. 어차피 이 책을 펼치면 맨 첫 장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그림을 글로 바꿨을 뿐.)
1대인 코스트는 낚싯바늘에 찔려 죽고 그의 아내와 첫째 둘째 아들은 사고사를 당했으며, 큰딸과 그의 남편과 두 아들은 기차 사고로 일가족이 몰살 당하고, 둘째 딸은 아이를 낳다가 죽고 그녀의 남편은 정신병원에 갇히고, 그들의 첫째 아들은 실종되고 딸은 버찌 씨가 목에 걸려 죽었으며, 둘째 아들은 급사하고 그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 후 실성한 채로 두 달을 보내다 죽었으며, 그들의 아들은 권총 자살을 하고 딸 쥴리는 정신 착란을 일으켰으며, 쥴리와 조제프 사이에 난 아들은 아내가 반신불수가 되자 매춘부와 함께 달아난다.
한때는 위풍당당했던, '폴란드의 풍차'라 불리는 영지에 살았던 한 가족의 역사이다. 죽음의 역사이다.
소설은 처음에는 조제프의 등장으로 시작하여, 조제프가 어떻게 그 영지를 손에 넣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 일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일가의 이야기란 바로 저 죽음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한 가족의 역사가 어쩜 이리도 비극으로 비극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지, 읽는 내내 참 소름끼쳤다.
잘 죽는 것도 복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이 집안에 복 받은 인물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이 한 일가의 몰락을 통해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뭔가 궁금했지만, 내 깜냥으로는 그저 죽고 죽고 또 죽었다는 내용만 읽혔을 뿐, 어떤 깨달음은 오지 않았다. 책 뒤표지에 실린 문장을 보니 '한 가문의 숙명적 몰락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알리는 한편 야누스의 얼굴을 한 죽음, 생의 위협이자 따뜻한 위안인 죽음의 양면성을 그린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아아, 한 가문의 숙명적 몰락이라니. 정말 '운명'이라는 단어 앞에만 서면 인간은 얼마나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인지! 그 모든 걸 '운명'이라는 말로 덮어버리다니! 운명이든 숙명이든 두렵고 두렵게만 느껴졌다.
끔찍하고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나 또한 그 못지 않게 잔인한 인간인지,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운명이란 녀석은 어쩐지 좀 싫어진다.
"한결 같은 운명은 죽은 자의 것. 그러므로 운명은 절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말하는 순간 그 운명은 바뀔 테니까. 뿌넝숴, 뿌넝숴." (김연수, 「뿌넝숴」 중에서)
문득 떠오른 문장이다.
_ 우리는 칼이나 맹금보다도 우리가 삶에 대해서 품고 있는 관념과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13)
_ 중요한 것은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사는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90)
_ 하지만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