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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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이다.

 

노시인과 서지우, 그리고 그 사이를 엮어주기도 뒤흔들어놓기도 하는 은교의 관계가.

밤에만 썼으니 밤에만 읽어주길 바란다는 작가의 당부가.

살풋 속살이 내비칠 듯한 흰 원피스의 소녀 그림이.

가슴을 뒤흔드는 작가의 문장문장이.

은교, 그 제목 자체가.

 

  눈이 내리고, 그리고 또 바람이 부는가. 소나무 숲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13)

 

살면서 '관능적'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떠올려 보고 몇 번이나 입 밖에 내어봤던가?

내 기억으로는, 처음이었다. 『은교』가 처음으로 내게 '관능적'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박범신 작가의 블로그에서 '살인 당나귀'를 처음 만났던 그 관능적인 밤,이 떠오른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던가? 그 벅찬 느낌을 혼자 간직하기 어려워 지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던가?

'살인 당나귀'는 매일 밤 내게 찾아오는 벅차고도 아름다운 문장들이었다.

그 연재의 느낌이 채 식기도 전에 '살인 당나귀'가 책으로 만들어져 찾아왔다. '은교'라는 가슴 떨리는 제목을 달고서.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203)

 

그 고유명사, 은교의 이야기가, 다시 나의 밤을 노크했다.

나는, 부디 밤에만 읽어달라는 작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밤에도, 그리고 이어진 아침에도 은교를 읽었다.

은교를 읽는 아침에는, 어쩐지 그 전날 밤의 향기가 가시지 않고 떠도는 듯 했다.

밤,에만 은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은교를 읽는 시간이 내게는, 밤이었나 보다.

그래서 나는 은교를 생각하면, 밤의 향기가 떠오른다.

 

모니터 앞에 앉아 '살인 당나귀'를 읽던 가슴 떨리던 그 밤의 향기, 노시인이 뜨거운 가슴을 식히기 위해 밖으로 나가 맡았던 그 밤의 향기, 내리치던 빗발 사이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던, 그리하여 모든 걸 끝장내 버리자고 다짐하게 만들었던 그 밤의 향기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려고 뛰어본 적이 있는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를 향해 뛰고 있는 사람은 다 아름답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하나의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그리운 그를 향해 뛰는 것이다.(206)

 

노시인, 서지우, 은교.

그들이 뛰는 길이, 단 한 갈래뿐이었던가? 왕복 차선이었던가, 혹은 일방통행이었던가?

노시인이 은교를 사랑한다, 서지우가 은교를 사랑한다, 은교가 노시인을 사랑한다, 은교가 서지우를 사랑한다, 노시인이 서지우를 사랑한다, 서지우가 노시인을 사랑한다…… 나는 이들이 누구를 향해 뛰었는지, 몇 갈래의 길을 뛰었는지, 잘 모르겠다. 이들이 달리는 길은 미로 같았다.

 

은교,는

노시인의 사랑에 대한 고유명사이기도 하고, 노시인과 서지우의 애증의 기폭제이기도 했으며, 누구나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을 '나의 처녀'이기도 했다.

'은교'라는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떨릴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이, 『은교』에 대해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느낌이다.

 

  나는 진실로 청춘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내 정체성에 따른 뜻을 세운 적도 없었다. 그냥 허망하게 시간을 따라 흘러왔을 뿐이다. 내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나의 조국'

 

  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었던가.(260)

 

『은교』를 덮은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 밤이 되면 은교가 떠오른다.

그래, 은교는 밤에 읽어야 하는 책이다. 아니면 나처럼 은교를 읽는 모든 시간을 밤으로 느끼던가.

많은 이들의 밤에, 은교가, 살인 당나귀가, 찾아갔으면 좋겠다.

우리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관능적'이라는 단어를 이처럼 절절하고도 애틋하게 느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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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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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라는 이름은 어쩐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어서 그의 작품을 읽어볼 엄두도 못 냈었다.

먼길 외출 나갔다가 전자책 배터리가 다 되는 바람에 지인에게 이 책을 빌려 집에 오는 길에 읽었다.

아아, 배터리가 다 된 전자책에 축복을!!

 

내가 탄 지하철이 금정 쯤 도착해서는 아아, 벌써 내려야 하는구나 슬퍼졌고, 수원에 도착해서는 이대로 모른 체하고 신창까지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 돌아오면 바로 일을 해야 해서 책을 펴볼 수 없기에. 어쨌든 정말 지하철에서 내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푹 빠져 이 책을 읽었고, 미친듯이 손가락을 놀려 일을 하고 짬을 내어 남은 부분을 마저 읽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지금의 내가 읽기에 딱,이라는 표현 말고 뭐가 더 있으랴, 말 그대로 딱,이었는데,

그러니까 고백하자면 요즘의 나는 마음이 두근두근하는 상태라는 거지.

나는 바로 베르테르로 빙의하여 내 마음속 로테를 상상하며 이 책의 모든 문장을 내 심장으로 빨아들였다.

로테에게 반하는 베르테르, 로테의 주위를 맴도는 베르테르, 로테의 미소에 행복해 하는 베르테르, 로테를 보지 못해 괴로워하는 베르테르, 로테의 약혼자를 질투하는 베르테르, 로테에게 마음을 보이자고 결심하는 베르테르, 로테를 떠나자고 다짐하는 베르테르, 아, 베르테르....

 

어제 본 영화 '시'에서 시란 누군가 표현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주는 것이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야 말로 내 마음을 대신 표현해주는 한편의 길고도 긴 서정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들도 많았고, 이건 바로 내 마음이야! 공감 가는 문장도 무척 많았다. 얼마나 많은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던지(아, 빌린 책이라 밑줄은 못 긋고 쪽수를 적어 두었는데 그 양이 엄청나다) 밑줄 그은 문장을 읽으려면 결국은 책을 다시 읽는 셈이 될 거 같다.

 

또 다시, 어제 읽은 책 <은교>에서는 '내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나의 조국'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었던가.'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베르테르에게는 로테가 '나의 조국'이 아니었을까. '조국'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칠 수 있는... 나도 문득, 내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나의 조국'이라고 부를 사람이 있었는지 뒤돌아보게 된다. 비록 지금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중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번 짝사랑을 해봤지만, 그 모든 게 지나고 과거가 되어 버리니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아직까지, 나의 진정한 로테를, 나의 조국을 만나지 못했다니, 심히 슬프다.

 

어찌되었든, 사랑이든 짝사랑이든, 지금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

 

 

_ 그렇게 해서, 우리는 로테의 집 앞에 당도할 때까지 졸음을 견디어냈다. 이윽고 하녀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로테의 물음에 아버님과 아이들이 다 무사하고 아직 모두들 주무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헤어질 때, 그날중으로 다시 만나달라고 간청했다. 그 순간에 태양과 달과 별들이 조용히 계속해서 돌고는 있었겠지만, 나는 그때가 낮인지 밤인지를 가릴 수 없었다. 온 세계가 내 주위에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47)

 

_ 로테를 너무 자주 만나지는 않겠다고 나는 벌써 몇 번이고 결심을 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지켜질 수 있을는지! 나는 매일 유혹에 못 이겨 나가면서, 내일은 가지 말고 집에 머무르겠다고 스스로 굳게 다짐해 보곤 한다. 그러나 막상 날이 새고 그 내일이 오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이유를 찾아 어느 결에 그녀 옆에 와 있는 것이다.(68~69)

 

_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동시에 불행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과연 변할 수 없는 것일까?(85)

 

_ 그렇지만 이런 일은 산을 넘어가야 하는 나그네처럼 꼭 참고 체념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산이 없으면 가는 길은 훨씬 편하고 거리도 한결 가까워지겠지요. 그러나 산은 이제 엄연히 가로놓여 있으니, 넘어가지 않을 수 없어요!(106)

 

_ 아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다.(129)

 

_ "상상력이란 정말 신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고 나는 소리쳤다. "나는 일순간 이 편지를 나에게 쓰신 거라 멋대로 상상했지요"(138)

 

_ 어제 내가 떠나려고 나왔을 때,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사랑하는 베르테르 씨!" 사랑하는 베르테르 씨! 그녀가 나보고 <사랑한다>는 말을 붙여서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 말이 나의 골수에 사무쳤다. 나는 혼자서 그 말을 백 번도 더 되풀이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며 횡설수설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안녕히 주무세요, 사랑하는 베르테르 씨!"라는 말이 잠결에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고는 혼자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151~152)

 

_ 그녀의 모습이 내게서 영 떠나질 않는다! 자나깨나 그녀의 그림자가 내 마음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다. 눈을 감으면, 이마 속으로 마음의 시력이 집중되어,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나타난다. 바로 이곳에 말이다. 자네에게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눈을 감으면 그것이 나타난다. 바다처럼 심연처럼 그녀의 눈동자는 내 앞에 내 속에 깃들이고 내 이마 속을 꽉 채운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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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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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뮈소의 책은 몇 년 전에 한 권 읽어본 적이 있는 듯 한데 그 책이 뭐였는지(아마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였던 듯 한데 확실치는 않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이번에 읽은 책이 기욤 뮈소와의 '첫 만남'이라고 해도 되겠다.

 

하지만,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것 같다.

 

베스트셀러고 워낙 유명하다보니 뭔가 기대를 하고 본 게 사실인데, 글쎄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뭘 봤는지...?

 

차라리, 조금 유치하더라도, 앞부분의 사랑 이야기가 쭈욱 이어졌더라면, 요즘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고팠던 나로서 조금 참고 읽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이건 조금 넘어가니까 갑자기 웬 10년 전에 죽은 사람이 등장해서 '데스티네이션' 같은 스토리를 이끌고 나가다가 갑자기 스릴러가 되기도 하고, 마지막엔 또 생뚱맞게 해피엔딩.

 

그래도 워낙 연애소설을 많이 쓰는 작가여서인지 사랑에 관한 문장은 밑줄 긋게 되는 게 몇 부분 있었다. 그리고 각 챕터를 열 때마다 '명언' 같은 걸 실어놨는데, 그게 제일 볼만 했다.

 

그래도 이 책이, 이 작가가 베스트셀러인 데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는 그 이유가 있겠지.

다만, 내게는 이 책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기욤 뮈소의 책을 읽을 엄두(!)도 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줄 그은 몇 문장은 정리해둬야겠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으면서도 나를 보았다.

그것은 봄날이고 태양이며 따뜻한 바다였다. _ 앨버트 코헨

 

사랑은 열병과도 같다.

사랑은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나고 사라진다. _ 스탕달

 

인생에서 내가 배운 것, 그걸 몇 마디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네.

누군가가 날 사랑해주는 날, 그 날은 날씨가 아주 좋아!

나는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을 모른다네. 날씨가 정말 좋아! _ 장 가뱅이 부른 노래 <난 이제 알아> 중에서

 

(결국, 기욤 뮈소의 말보다 더 기억에 남은 건 '남'의 말들이었군...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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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 행복한 비움 여행
최건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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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문경새재에 다녀왔다.

봄이 왔는지 겨울이 돌아오는지 분간할 수 없던 날씨가 이번 주말만큼은 확실한 봄날의 기운을 뿜어내주었다.

그리하여 화창하고도 화창한 5월의 문경새재를 마음껏 감상하며 행복지수를 가득 충전해올 수 있었다.

 

이번에 문경새재를 걸으며 나는 내가 가보지 못한 수많은 아름다운 곳들을 떠올렸다.

내가 집안에서 시간의 흐름도 모르고 사는 동안, 그곳들에서는 끊임없이 아름다운 자연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자연의 향기가 떠돌겠지.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삶에 감사하게 되는 축복이 가득한 곳들.

그렇게 내가 속으로 그리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제주이다.

 

아직, 제주를 한 번도 가보지 못 했다.

 

바다를 건넌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매번 바다와 함께 국경도 넘어버렸다. 그래서일까, 제주는 어쩐지 내게, '국경 밖'의 느낌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바다를 건너가면, '국경 안'이 아닌 '국경 밖'이 존재할 것만 같은 이 기분이라니.

하지만 제주는 '국경 안'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국경 안'의 정서가 살아 숨쉬는 곳, '국경 안'의 풍경이 빛나고 있는 곳.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 마음속 제주의 이미지를 조금씩 새로이 하고, 제주를 향한 그리움을 조금 더 많이 키웠다.

애초에 바란 것이었다. 이 책을 읽고, 제주를 더 많이 그리워할 수 있길, 그리하여 빠른 시일 내에 제주로 떠날 수 있길.

 

한 권 가득 제주 이야기만 담긴 책은 이번에 처음 읽어보았다.

이 책은 제주 이야기 중에서도 제주 올레 이야기들이 담긴 책이다.

제주 올레 열두 길을 소개하며 그 길 위에서 저자가 본 것, 느낀 것, 맛본 것 등을 들려준다.

'제주'가 내게 주는 느낌 때문일까, 내 멋대로 간질간질하고 감성적인 글일 거라 지레짐작하고 읽었는데, 글은 의외로 투박한 질그릇의 맛이 났다. 마음을 간질이고 구름 위에 뜬 듯한 느낌을 주는 문장들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비워내는 듯한 고요하면서도 차분한 마음으로 따라 '걷는' 올레길도 나쁘지 않았다. 함께 실린 사진들도, 차분한 글의 영향인지 마음을 들뜨게 하기보다는 어딘가 숙연하고 진지해지는 기분이 많이 들었다.

내 마음속 제주가, 새로워졌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준 5월의 문경새재를 생각하니, 제주로 떠나고픈 마음도 더욱 굴뚝같아진다.

제주에서는 또 어떤 느낌의 행복을 충전할 수 있을까? 제주는 내게 어떤 향기를 선사해줄까?

제주, 제주, 제주!!! 아아, 제주 올레를 걸어보고 싶어, 역시 마음이 간질간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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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쟁이, 루쉰
왕시룽 엮음, 김태성 옮김 / 일빛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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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번역가, 교수 등으로만 알고 있던 루쉰이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림쟁이 루쉰'이라. 과연 루쉰은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궁금증에 집어든 책이다.

 

작가 루쉰이 아닌 '그림쟁이'로서의 루쉰의 모습을 들려주는 에세이인가 했는데, 루쉰의 작품을 한 점 한 점 소개해주는 책이었다.

먼저 루쉰의 그림이 나오고 그 밑에는 그림과 관련하여 루쉰이 남긴 글, 관련 기록, 해설 등이 나와 있다.

'루쉰이 남긴 글'만 모아 읽어본다면, 그림쟁이 루쉰의 수필 느낌이 나기도 한다.

 

이 책을 보며 참 여러 차례 감탄을 했는데, 가장 먼저 감탄한 것은 아무래도 루쉰의 그림 실력!

아아, 루쉰이라는 이 대문호는 글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전각, 평면 디자인, 선묘, 책과 잡지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로 나뉘어 소개된 그림들은 한 점 한 점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들었다.

귀여운 부엉이나 코끼리 그림부터 세세하고 섬세하게 그린 책 표지나 멋진 글씨체를 감상할 수 있는 잡지 디자인 등 그 그림 감상만으로도 참으로 값진 시간이고 값진 책이라는 생각이다.

 

이 책에 보면 일본인 마쓰다 쇼가 루쉰의 글을 포함하여 중국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잘 이해가지 않는 용어를 루쉰에게 물어보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그러면 루쉰은 그에 대해 무척 자상하고 세세한 답변과 함께 마쓰다 쇼의 이해를 도울 그림을 함께 그려주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또 한 번 감탄하고 마는데, 바로 루쉰의 그 자상함과 섬세함 때문이다. 중국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글과 그림으로 설명해주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이 때 그려진 그림들은 비교적 간단하고 '후딱' 탄생된 느낌이 드는데 대문호의 사적인 메모를 엿보는 기분에 살짝 영광스러워지기도!

 

'책과 잡지 디자인' 부분에서는 루쉰의 그림 실력 외에도 루쉰이 지었거나 번역했거나 펴낸 책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무척 유익했다. 이 과정에서 (내가 관심 있는 부분인) 번역가로서 루쉰의 마음도 엿볼 수 있었고, 출간 금지 당한 책을 표지와 제목을 바꾸어 다시 펴내면서 관리들은 알아보지 못하도록 원래 책 제목을 살짝 표지에 실어 놓은 데서는 루쉰의 지조에 감동했다,고 한다면 너무 아부 일색일테고, 사실 '루쉰도 엉뚱하고 개구진(?) 면이 있군' 하며 재미있어 했다.(물론 루쉰이야 장난이 아니라 정말 분한 마음을  표출한 거였겠지만.) 앞에서 말한 마쓰다 쇼가 중국 서적을 끊임없이 일본어로 옮긴 것이나, 루쉰이 다른 외국어 원서를 일본어판을 통해 중국어로 중역하는 내용을 보면서는 '역시 일본은 번역 대국이군' 하는 생각에, 또 한 번 감탄.

 

이 책을 통해 루쉰의 그림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음도 무척 좋지만, 그 외에도 루쉰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봤다거나,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관심으로) 번역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던가 등등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사서 읽지 않고 책꽂이에 꽂아둔 루쉰의 책들이 내 손을 잡아 끈다. 더 미루지 말고 얼른 읽고 싶어졌다.

 

 

_ 내 숨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자신의 것이기만 하다면 나는 언제든지 내 지난 일을 정리해 두고 싶었다. 단 한 푼의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미련이 없을 수는 없어, 잡문들 한데 모으고 무덤이라 이름을 짓기로 했으니, 뜻밖에도 제법 그럴듯하다.(168)

 

_ 한 시대의 기념비가 될 만한 글은 문단에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지금까지 위대하고 찬란한 각 시대의 기념비적인 문학 작품 주위에는 단편 소설도 나름대로 충분한 존재의 이유를 갖는다. …… 우리 역자들이 이 책을 엮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그러나 한송이 꽃을 피워야겠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부패한 풀도 그다지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189~190)

 

_ 듣자 하니 중국의 훌륭한 작가들은 대체로 '젊은 시절에 쓴 작품들을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문집을 편집하면서 젊은 시절의 작품은 가능한 한 빼거나 전부 삭제한다고 한다. …… 하지만 나는 내 초기 작품에 대해 다소 부끄러운 생각은 들지만, 참회의 감정은 한 번도 가져보지 않았다. …… 놀랍게도 양제운 선생이 대량으로 초록해 두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심지어 30년 전에 쓴 시문이나 10여 년 전에 쓴 신시도 들어있다. 이는 내가 50년 전에 엉덩이를 내놓고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을 때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 나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 자신도 당시의 유치함과 부끄러움을 몰랐던 것에 의아할 따름이다. 하지만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이것이 나의 참모습임에 틀림이 없으니, 그대로 공개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277~278)

 

_ 나는 그저 깊은 밤 길거리에 좌판을 펼쳐놓고 작은 못 몇 개, 기와 조각이나 파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희망도 있다. 나는 누군가 내가 파는 잡동사니 속에서 쓸모가 있는 적당한 물건을 찾아내기를 바라고, 또한 그러기를 믿어 마지않는다.(29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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