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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ㅣ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1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내 책장 맨 윗줄에 토지 스물한 권 세트와 나란히 꽂혀 있는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여섯 권.
방바닥에 누워 멀뚱멀뚱 책장을 올려다보다가, 이런 거장의 책도 안 읽고, 나는 만날 뭘 그렇게 읽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올해 안에 내게 있는 두 거장의 책을 다 읽어야겠다,는 야심찬 생각을 하며,
작년에 읽다가 중단한 토지와 박완서 선생님의 책 한 권을 빼어들었다.
여름을 좋아하는 나이니까, 제목에 끌려 『배반의 여름』을 먼저 꺼내들었다가, 출간 년도별로 엮여 있다는 걸 알고는 순서대로 읽기로 했다.
1971년에 여성동아에 발표된 「세모」부터, 1975년에 주간조선에 발표된 「서글픈 순방(巡房)」까지, 모두 16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우리 엄마 아빠가 만나기도 전, 우리 엄마가 아직 소녀이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 시절에 이 세상에 태어난 이야기들.
글이 아닌, 그때의 다른 어떤 것들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일테면 옷이랄까 대중가요랄까 사람들의 머리 모양이랄까 뭐 그런 것들.
조금쯤은 촌스럽다고, 또는 완곡한 표현으로 예스럽다고 표현하게 될까?
지금의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어딘가 시간의 흐름이 크게 느껴져서 부담스럽거나 거부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런 시대에 유행했던 옷이나 머리 모양이나 노래 등에 매력을 느끼거나 빠져들지 못하니까. (아, 노래라면 몇 곡 쯤은...)
이 책을 읽기 전에 잠깐 생각했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나는 얼만큼 느끼고 공감하고 그려볼 수 있을까?
내가 읽는 책들은, 거의가 '신상'들이었으므로, '옛날 이야기'들을 만나는 데 있어 조금은 염려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유행을 타는 옷이나 머리 모양이나 대중가요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이건, 글,이니까.
이 책속의 글은, 1980년대에 태어난 나를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태어나기도 전, 우리 엄마 아빠가 만나기도 전, 우리 엄마가 아직 소녀이던 때까지' 데리고 들어갔으며, 어떤 거리감이나 '세대 차이' 같은 것도 거의 느낄 수 없이, 그냥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1970년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박완서라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작가가 써낸 '초기작들'. 거기에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염려가 있을 게 무엇인가.
올해로 등단 40년을 맞은 작가의 초기작들을, 작가 나이의 반토막도 안 되는 '어린 독자'가 이제서야 읽어보는 것이다.
사실, 진작 읽어봤어야 했을 책들이나, 작가 '등단 40주년' 맞이 기념 독서,라고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괜시리 혼자 뿌듯해하며...
이야기 한 편 한 편 모두 참 재미있고 맛깔스럽게 읽었지만,
이 이야기들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제 막 부자의 반열에 올라선, 그전에는 서민이었던 사람들의 심리였다.
'이십오 만원 위에 '단돈'을 붙여서 부를 때의 통쾌감, 부르주아가 된 기분이란 이래서 좋은 거다(주말 농장)', '돈을 가졌다는 건, 이 백화점에 진열된, 제아무리 빼어난 고급품이라도 아양을 떨지 않고는 못 배길 돈을 가졌다는 건 얼마나 신바람나는 일이냐 말이다(세모)', '나는 문득 잘사는 여러 친구들의 이름을 아무런 아픔 없이 구구단처럼 암송할 수도 있어진다(세모)', '맹자님이 지금 세상에 살아 계시다면 별수 없이 돈 세는 재미를 인생 삼락 중 으뜸가는 열락으로 꼽으셨으리라(세모)' 같은 문장들.
아마 나는 아직 만 원짜리 한 장 앞에도 '단돈'이라는 표현을 붙이기에 벌벌 떨며, '잘사는 여러 친구들의 이름을 아무런 아픔 없이 구구단처럼' 욀 수 있어본 적 없는, 서민 중의 서민이기 때문인 걸까? 그리고 언젠가는 '부르주아가 된 기분'을 느껴보길 꿈꾸고 있는 걸까?
나도 내 마음을 명확하게 해석할 수는 없지만, 이런 문장들을 무척 흥미롭게 지켜봤으며, 책을 덮은 지 두 달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기억에 남아 있다는 것. 내 안의 재미있는 반응이다. 속물적인, 지극히 속물적인!
아, 아무튼,
토지와 박완서 단편 전집을 다 읽겠노라 다짐했던 건 6월이고, 한 달 여가 지나는 동안 토지는 이제 겨우 두 권을 더 읽었을 뿐이고, 박완서 단편 전집도 한 권을 읽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읽고 싶은 '신상'들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 탓이다.
이 여름이 가기 전에는 그 둘째 권인 『배반의 여름』까지 꼬옥 펼쳐보리라, 다시 한 번 마음먹어본다.
거장의 책을 펼쳐보는 일은, 현실적 물질 세계야 어떻든 내 정신 세계가 '부르주아'가 되는 일인가보다.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아무 때고 내 책장에 빼곡히 늘어서 있는 이 책들을 뽑아 볼 수 있는 것에 대한 통쾌감, 부르주아가 된 기분이란 이래서 좋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