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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평점 :
"니가 읽기에는 조금 불편할 것이다."
표지의 핏자국 같은 빨간 얼룩 때문에 선뜻 책을 펼쳐보지 못하고 오래도록 이 책을 묵히고만 있던 내게, 지인이 일러준 말.
무서운 이야기, 징그러운 이야기, 괴기한 이야기를 잘 읽지 못하는 내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지인이 한 말이므로, 과연 내가 이 책을 펼쳐볼 날이 올 것인가, 책꽂이에 꽂힌 책등만 바라보며 그렇게 자꾸만 시간은 갔다.
흠, 하지만! 그렇게 선한 얼굴로 웃을 줄 알고, 그렇게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할 줄 아는 그 작가가, 도대체 어떤 '불편한 이야기'를 썼다는 것인지,
도무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게, 한 달 반 전.
불편하지만, 이것이 현실, 혹은 진실.
머리가 띵했다. 이것이 소설인가, 르포인가?
내가 읽고 있는 것은 분명 허구의 이야기, 소설이지만, 신문과 뉴스에서 접해봤을 법한 사건사고를 떠올리게 하는 내용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신문을 읽다가, 뉴스를 보다가, "저런 나쁜 놈..." "저런 썩을 것을 봤나..." "세상이 어찌 되려고!" 등등의 말을 내뱉게 만드는 그런 사건들.
바로 며칠 전에도, 단골 피씨방에서 애를 낳아 버리고 달아난 20대 커플 이야기가 뉴스에 나왔었지.
그 뉴스 제목을 보고 퍼뜩 이 책을 떠올렸다. (아, 아직도 리뷰 안 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책에는 장기 투숙하던 모텔에서 낳은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는 커플이 나온다.
그 외에도, 돈벌이 하느라 바빠 며칠 씩 집을 비우기 일쑤인 엄마가 지하 단칸방에 가둬둔 아이가 사체로 발견되기도 하고, 일용직 할아버지가 방 한켠 내주고 보살피고 있는 가출 소녀가 친구들 데려와서 할아버지 등골을 빼먹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해 세상을 등질 남자가 노모를 자동차 트렁크에 넣어 차째 친구에게 맡기기도 한다.
정말 신문 사회면 한구석에 등장할 법한 이야기들.
나는 신문 사회면에 실린 사건사고들을 읽을 때, 신문 지면을 정시하지 않는다.
신문 오른쪽 페이지 끝을 손에 쥐고, 당장이라도 다음 면으로 넘어갈 것처럼, 그냥 지나가다 눈에 들어와서 본다는 듯이, 살짝 눈동자만 굴려 읽는다.
어쩐지, 남의 불행한 사고 소식을 단순한 흥밋거리로 읽고 있는 것 같은 데서 오는 죄책감이랄까 미안함이랄까 불편함이랄까.
그러면서도, 읽는다. "도대체 이런 사건사고들을 뉴스에 신문에 왜 내보내는 거야?!"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읽는다.
타인의 불행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서 뭐 어쩌자는 건지. 참, 사람의 심리, 희한하다.
그 희한한 심리, 이 책을 읽는 데도 충분히 발동됐나보다.
나,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지독한 현실감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손에서 책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게' 읽었다.
신문을 볼 때처럼 안 보는 듯 하며 보는 것도 아니고, 이건 소설책이니까, 이건 소설이니까, 생각하며 책에 아주 코를 박을 듯이...
단순히 이야기적인 재미만을 떠나서, 백가흠 작가의 필력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고 싶다).
무서운 표지(네, 제게는 이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무서운 표지입니다. 핏방울이잖아요! 흠) 때문에 오랫동안 꺼내어 읽지 못했던 이 책을 읽고 나니,
백가흠 작가의 다른 글들도 몹시 궁금해진다.
"귀뚜라미가 온다는 좀 더 사실적이고 좀 더 불편해."라던 지인의 충고(?)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 위한 청심환 정도로 쓰겠다.
귀뚜라미가 온다,도 용감하게 만나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