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다 내게로 오다
김경미 지음, 고명근 구본창 외 사진 / 눈빛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내가 사랑하는 김경미 시인의 글이 실려 있는, 바다 사진 에세이!
얼마 전, 김경미 시인의 글이 무척 고프던 날, 바다가 몹시도 그립던 날,
내 두 가지 그리움 모두를 달래줄 수 있는 이 책을 꺼내들었어요.
밤에, 더위 때문에 활짝 열어놓은 창밖으로 들려오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는 마치 멀리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소리 같았고,
내게는 언제라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바닷가 풍경이 있었으므로, 자동차 소리를 파도소리 삼아 내 방을 바닷가 민박집 삼아,
눈앞에 환하게 바다를 그리며, 이 책을 만났어요.
그리고, 정말,
바다가 내게로 왔지요.
바다가 그리운 건 여름만이 아닙니다. 계절에 상관없습니다. 봄에도 겨울에도, 일상이 십 원짜리 동전처럼 구차하고 초라할 때, 사랑이 단지 상처이거나 모욕일 때, 마음만큼 잘 안 되는 일과 칫솔컵만한 인간관계가 절망스럽고 쓸쓸할 때, 그럴 때면 언제나 문득 바다가 그리워지곤 합니다. 보들레르가 "자유인이여, 언제나 너는 바다를 사랑하리"라고 노래했다면, 우리는 "일상인이여, 나는 언제나 바다를 그리워하리"인 것입니다. ('서문' 중에서)
언제나 바다를 그리워하는 일상인, 그런 내게 김경미 시인이 들려주는 바다 이야기, 일상 이야기, 상처 이야기...
거기에 더해, 내 마음속 바다 풍경과는 또다른 이미지와 느낌의 여러 바다 사진들.
사실, 사진들은, 바다 그대로의 바다를 보여준다기보다, 작가들의 예술성과 독창성이 많이 가미된 예술작품에 가까웠으므로,
그저 소소한 일상의 풍경 같은 바다를 그리워하는 내게는 사진이 주는 감흥은 그리 크지 않았어요.
내 마음을 그 바다 한가운데로 끌어들인 것은 바로, 김경미 시인의 글들.
시인의 시를 읽을 때 느꼈던 것처럼,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싶은 그런 글귀들로 인해 그 깊은 밤, 내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새하얀 파도가 밀려와 부서졌지요.
'칫솔컵만한 인간관계가 절망스럽'다고 말하는 시인, '누군가가 좋아한다고 해도 자신 없어서 도망가려는 성격'의 시인, '아직 어떤 남자의 뺨도 때려본 적이 없'어 '마치 청춘이라는 유효기간 내에 못 쓰고 만' 어떤 것처럼 여겨져 아쉬워하는 시인, '누군가가 문득 바닷속으로 해가 완전히 가라앉는 그 시점에 환호와 함께 두 사람씩 옆사람을 껴안자고' 제안했지만 '아마 내가 멋쩍어서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껴안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신경쓰고 있'느라 노을 감상은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인……
아마 남들은 무심코 읽어 넘길지도 모를 이런 문장들에 저는 슬몃 심장을 쥐어보기도 합니다.
시인께는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기어이 책 한 귀퉁이에 이런 문장을 적어넣기도 했어요. '시인은, 나와 무척 닮았다…'라고요.
김경미 시인의 시를, 글을 읽을 때면 저는 유난히, 내 모습이, 내 마음이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은 문장들을 많이 발견하곤 해요.
『고통을 달래는 순서』에서 저는 이 시를 무척 좋아하기도 합니다.
너무 허름한 기분일 때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 미안하다 오후 여섯시여, 오늘 나는 참석지 못한다 ('불참' 전문)
두 줄짜리 이 짧은 시가, 어째서 제 마음을 그렇게 깊이 울렸는지는, 바로 밑 여백에 적힌 제 메모에 담겨 있지요.
시인과 나 사이에 비슷한 어떤 일들이 있었을 것만 같은, 비슷한 농도의 눈물을 흘렸을 것만 같은, 비슷한 형태의 아픔을 느꼈을 것만 같은, 그런 글들.
그런 글들을 시집에서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김경미 시인의 글들이, 김경미 시인이, 제게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같아요.
김영랑 시인의 시 제목처럼, 내게는 그야말로 '내 마음 아실 이'인 것이죠.
시인과 내가 손끝과 손끝이 통하는 존재일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글 말고도,
이 책에는 나 자신에 관해, 우리의 삶에 관해, 기억할 만한 아름다운 글귀들이 가득 실려 있답니다.
인생에서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은 계속되는 나쁜 날씨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좋은 날씨나 축제라고도 합니다. (……) 불행과 절망은 지하도 같아서 내려가면 반드시 햇빛 환하게 터진 밖으로 올라오게 되어 있기도 합니다. 내가 쓰러지면 박수를 칠 것 같은 진흙 같은 사람이나 세상이 정말로 내가 쓰러졌을 때 실은 제일 먼저 손 내밀어 붙들어 줄 때도 있습니다. (41)
삶에는 크기도 규모도 아무 의미가 없다, 저마다 자기 그릇 속에서 그 그릇을 살면 된다. 누구나 다 자기로서 소중하고 깊고 넓은 것. (76)
"땅은 이름없는 풀을 내지 않고, 하늘은 녹없는 사람을 내지 않는다 하지 않는가. 누구나 다 나름대로의 존재 의의와 가치가 있는 것. 설사 빈둥대면서 밥값도 제대로 못하고 산다 해도, 어쨌든 살아 주는 것만으로도 삶이, 세상이 뭔가 내 덕을 보는 게 있는 거다. 그럴 거다."
바다, 엎질러진 후회의 물바다에 살면서 다시 또 번번히 컵에 물 담아 보는 것, 그것이 삶, 아니겠는지요. (85)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람들 속에 섞이려고 애썼던 마음. 그러면서 받았던 상처. 혹은 모욕. 혹은 암담함이거나 막다른 벽 같은 것….
그래서 서로 누추해지고 비굴해지던 시간들. 그런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엇이든 문질러 흐려 버리고 섞어 버린 마음과 시간들…. (103)
두세 사람의 삶을 동시에 살아 볼 수 없는, 살아 있는 한은 평생 지녀야 하는 '나'라는 이 끈질긴 부착의 살갗과 그 살갗 안의 보이지 않는 희망이나 절망 같은 내면의 무수한 크고 작은 섬들…. 어쨌든 그것들과 끝없이 화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긴 해야 할 텐데…. (151)
그렇게 김경미 시인의 글들은 다시 한번 제 마음을 샅샅이 훑어 어루만져주고, 달래주고, 행여 아픈 곳이 있으면 빨간약도 발라주고,
정말 품 넓은 바다처럼 나의 밤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답니다.
문득문득 허름한 마음이 들 때마다 바다를 그리워하는 나는, 앞으로 바다와 함께 이 책도, 그리고 시인도 계속 그리워하게 될 거예요.
고백하자면, 요즘 얼마 동안, 나는 시인의 시들만 반복해 읽고 있어요.
고통을 달래는 순서란 없다 견딘다. (『고통을 달래는 순서』)
그 견딤의 시간을 함께 해주는 내 마음의 든든한 상비약, 있으니 아무리 고통에 잠을 설치는 밤이 있더라도, 나는 행복한 거죠?
아아, '내 마음을 아실 이' 김경미 시인의 글들을 만난 건, 정말 내 인생에 있어 크나큰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마음과 마음은 통하는 거니까, 시인께도 아마 내 목소리가 들릴 거예요. 정말 진심을 담아, 전하고 싶은 한 마디. "고맙습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09840144586698.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