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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정치학 ㅣ 현대시세계 시인선 20
신혜정 지음 / 북인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처음에 이 시집은 내 '취향'이 아니구나 했다.
소설은 취향에 맞지 않아도 설렁설렁 읽어낼 수 있지만, 시집은 취향에 맞지 않으면 도통 읽기가 힘들므로 읽다 덮기를 여러 번.
이건 시집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내 취향의 문제인 것이다.
내 취향,이라는 건 일상의 행복과 그리움과 덤덤함 등이 꼭 내 마음 그대로 옮겨진 듯 쓰여 있는 시들이다.
이 시집에는 개인의 감성보다는 이 시대와 사회가 녹아 있는 시들이 많이 실려있는 듯 했다.
현대는 엑기스의 시대다 / 정보의 집합체에 접근하기 / 혹은 접근 금지의 아고라에 모여들기 / 농축이 아닌 것들은 천대 받는 시대 // (...) // 라면은 현대 식문화의 집대성으로 / 영양학자와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들이 만들어내는 / 정치적인 이슈는 스프 속에 감춰진 비밀 레시피 / 소고기맛 베이스 / 지미강화육수분말 / 육개장양념분말 / 햄맛분말 / 향미증진제 / 돈골엑기스…… / 엄청난 살육의 엑기스를 분말로 만들어내는 / 물리학의 기적 ('라면의 정치학' 부분)
대한민국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 미8군에 들어가 본 자와 / 그렇지 못한 자 // 전쟁과 살상의 기술을 / 배우고 가르치고 전수하는 그곳에만 / 오직 평화가 있다 ('평화의 눈 2' 부분)
인권과 인권 / 투쟁과 투쟁 / 천국과 천국 / ……사이를 비집고 / 런치 타임, // 식판에 남겨진 밥을 그가 / 먹는다 // 비둘기와 함께 // 침묵하는 오후의 평화 ('런치타임' 부분)
그래서 이 시집에서 만난 이런 시구들에 시를 향한 경이는 느꼈을지 몰라도,
내 마음을 살콤살콤 만져주는 손길을 느끼지는 못해 '내 취향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록 내 '취향'이 아니라고 하긴 했으나, 덕분에 내가 평소에 우리 사는 세상에 대해, 내가 살아가고 있는 발판이 되어주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게 지내고 있나를 떠올리는 시간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고 성찰해봐야 하건만, 나는 도무지...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취향 운운하지 않고 이 시집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처음 읽을 때 내 공감을 얻지 못하고 머리 아프게만 한 그 시들 위주로.
특히 표제시인 '라면의 정치학'은, 인스턴트 식품의 대표주자인 라면으로 풀어낸 현대 문명에 대한 고찰이 멋지다.
깊이 읽고 헤아려봐야 할 시.
그 중에 만난 이런 시들.
금세 마음 말캉해지며 시 속에 내 마음 녹아드는 시들, 역시 있었다.
햇살이 강물에 / 은어떼처럼 반짝거릴 때 /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다가 // 어느새 나 강물처럼 / 출렁이고 있었던 것은 / 그대에게 떨어뜨린 / 인연의 비늘 때문 ('은어' 부분)
등 뒤에 커다란 말풍선을 감춘 그대여 / 한 번의 날카로운 상상만으로도 나는 그대의 / 말풍선을 톡, / 하고 터뜨릴 수 있다네 // 이미 그대는 그걸 / 기다리고 있지 // 두부처럼 으깨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나의 언어가 될 수 없는 그대에게' 전문)
팽팽하게 조인 라켓에서 / 커트가 풀어지듯 // 아침에 새로 한 머리끈이 툭, / 끊어지듯 // 단단히 동여맨 허리띠가 / 느슨해지듯 // 양말의 엄지발가락 귀퉁이가 닳듯 // 하루하루 머리카락이 빠지듯 // 상처 위로 상처가 쌓인 채 // 스르르르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것이었다' 전문)
여러 색깔의 느낌이 나는 시집이었다.
강하다가 여리다가, 이성적이다가 감성적이다가...
엉뚱하게도,
제목 때문인지, 라면 한 그릇 끓여 먹고 싶어지는 점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