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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결혼식
한지수 지음 / 열림원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1월에는 세 권의 소설밖에 읽지 못 했다.
올 들어 가장 바쁜 한 달을 보내느라, 하루에 책 한 쪽도 읽지 못 하는 (정말 근 년 몇 동안 거의 없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잠자리에 들어 잠들기 전까지 조금씩 읽어나갔던 이 책.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싶어 새벽까지 해야 할 일을 조금 서둘러 끝내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흡인력 있는 책이었다.
2006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중단편소설 부문 당선작인 「천사와 미모사」는 물론이거니와, 수록작 일곱 편 모두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온두라스에 있는 한지수 님 덕분에 쉽게 기억할 수 있었던 '한지수'라는 이름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배꼽의 기원」이었다.
이틀 밤 동안 읽었는데(앞서 말했듯이, 일하다 지친 눈으로 읽었던지라, 매일 야곰야곰, 조금씩밖에 읽지 못했다)
읽을 때마다 아는 이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눌러야 했다. 문자를 보내기에는 너무 늦은 새벽 시간이었으니까.
그때 보내지 못한 문자, 지금 여기에서라도 보내보고 싶다.
"한지수소설집자정의결혼식수록작'배꼽의기원'정말강추예요.특히자궁을가진우리여자들에게!!"
자궁의 어원이 매트릭스인데, 어머니라는 뜻이죠. 신의 작은 피조물을 키우는 그릇이고, 그래서 무엇보다 소중한 곳이에요.
여자의 본질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목소리에 이상한 적의가 묻어 있었다. (139)
'신의 작은 피조물을 키우는 그릇'인 자궁이 바로 이 소설의 화자이다.
아아, 나도 내 안에 품고 있지만, 다달이 그것의 존재를 느끼지만(그러면서 무척 귀찮아 하지만) 한번도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바로 그 자궁 말이다.
사실, 나는 '자궁'하면 내 안의 그것보다도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에서 만난 한 표현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우리를 세상으로 불러준 당신의 아기집'이라는 그 표현.
지극히 당연한 표현이지만, 그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한번도 내 어머니 안의 그것에 대해 '우리를 세상으로 불러준' 귀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자궁'은 이 두 작품을 통해 내 안에 어떤 문학적인 신체 기관으로 감각되는 존재가 되었다.
'신의 작은 피조물을 키우는 그릇', '우리를 세상으로 불러준 당신의 아기집', 그 귀한 자궁이 '당신'의 몸 안에서 한 번도 '아기집'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당신'의 몸에서 분리되는 그 사건 속에서, 자궁이 들려주는 이야기.
어쩌면 신비롭고, 어쩌면 애틋하고, 어쩌면 서글프기도 한 자궁의 그 이야기, 정말 내 곁의 모두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배꼽의 기원」 뿐만 아니라 첫 수록작으로 단번에 나의 마음을 사로 잡은 「미란다 원칙」, 한 모텔방을 낮과 밤으로 나누어 공유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 「이불 개는 남자」, '국내산' 소는 될 수 있어도 '한우'는 될 수 없는 사이란 이야기를 통해 우리 주변의 수많은 국제 가정을 떠올려 보게 되는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 등 수록작 한 편 한 편을 만나는 시간이 참 행복했다.
비록 많은 책을 읽지는 못한 11월이지만,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읽은 까닭인지, 생각보다 섭섭지 않은 느낌이다.
그러니, 책 읽을 시간은 부족하고, 신중하게 한 권 골라 읽어야 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 이 책을 집어든다면, 꽤 괜찮은 선택이다.
오랜만에 나의 '선택'을 칭찬해주고 싶다. 쓰담쓰담.
"아, 왜 자꾸 존대를 하고 그러십니까 형님? 말을 그냥 턱, 내려노십쇼. 근데요 형님? 지금 쟤하고 똑같은 얼굴이 왜 이리 많습니까?"
"21번 염색체가 우리보다 한 개 많아서요. 그래서 모두들 웃고 있잖아요."
"모자라는 게 아니라 형님, 많아서 저리된 겁니까?"
"가끔씩 우리보다 진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화구 뭐구 잘 모르겠지만요 형님? 쟤네들 얼굴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고 있더라니까요." _ 「미란다 원칙」
언젠가 아내의 사전에서 불법의 뜻을 찾아보았다. '법에 어긋남'이라고 씌어 있었다. 내친김에 범법을 찾아보니, '법을 어김'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러니까 범법은 고의적인 것이고 불법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인데,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 다 자기들이 정한 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_ 「천사와 미모사」
인간의 모든 장기들이 그것을 담고 있는 사람을 닮았다고 하면 당신들은 아마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장기관들은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자세와 거의 맞먹는 기질을 지녔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나도 당신만큼 비밀스러운 기관이다. _ 「배꼽의 기원」
"그래? 상처를, 수학처럼 논리적으로 보여줄까? 그래야 직성이 풀려?" _ 「이불 개는 남자」
누군가의 비밀을 안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이해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그때의 당신은 몰랐다. 또한 그 비밀의 무게만큼 책임을 짊어지는 일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_ 「자정의 결혼식」
그때의 그녀에게 중요한 건, 어딘가에 자신의 마음을 모두 쏟아내는 일이었다. 논리는 체험 밖의 일이다. 삶은 체험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살아갈 만하다. 언제 어디에서든. _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
삶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을 때와 같다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항상 정말로 아픈 건 지금부터라고 생각하지만 그땐 이미 끝난 뒤라는 것이다. _ 「페르마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