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전후사의 재인식
김도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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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작가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한 건, 한 지인이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읽었던 때의 아련한 감동을 적은 글을 보고나서였다.

사실, 작가의 이름도 그 소설의 제목도 그 글을 통해 처음 접했다.

책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그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에 보내는 찬사와 사랑을 보며 작가의 글이 무척 궁금해졌더랬다. 한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사로잡아버린 글이라니! 아아, 나는 이처럼 누군가로부터 뜨거운 애정과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는 작가에 대해서는 일단 마음이 푸근해지며 문이 활짝 열리는 편이다. 살면서 어느 누군가의 영혼을 사로잡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아마, 평생 단 한 사람의 마음도 사로잡지 못 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는 쓸쓸한 인생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므로, 읽어봐야 한다. 이 작가!

마침 작가의 신간이 나왔기에 나는 나를 유혹한 그 책 대신 신간 『이별전후사의 재인식』을 먼저 만나보게 되었다.

 

책 속 글의 분위기는 나의 지레짐작과 많이 달랐고, 내가 즐겨 읽는 글들(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주위를 둘러보면 소설속 주인공을 닮은 이웃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글들?)과도 느낌이 많이 달라, 낯선 동네에서 어쩌면 조금 길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편 한 편 모두다 인상적인 글들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온전히 나누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남는 건, 내가 평소에 익숙지 않은 것에 적응하는 능력이 조금 떨어져서인지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은 「떡ㅡ병점댁의 긴 하루」였는데(아, 그게 그러니까, 결코 야한 장면들이 등장해서가 아니고, 흠흠...)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 여성이 이 물 설고 말 선 나라에서 남편에게 학대 받다가 그런 남편이나마 죽고 난 후 홀로서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장면이 굉장히 애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세상에 좋은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 병점댁도 이제 좋은 남자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지도 몰라, 제발 그렇게 되길 바라던 마음은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이지 '헉!!' 소리가 터져나올 정도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가슴에 철렁, 돌멩이 하나 던져진 느낌... 「메밀꽃 질 무렵」('메밀꽃 필 무렵'의 오타가 아니고, 허생원의 아들 동이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다)의 마지막도 가슴이 쩡, 하는 그런 느낌이 안타까웠는데... '상심'에 이르게 만드는 결말이 조금쯤 원망스러우면서도, 통속적인 '해피엔딩'보다는 이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현실은 그런 거라며 씁쓸하게 마음을 토닥여야 했다.

 

나귀 대신 승합차를 몰고 메밀꽃 밭을 지나는 동이와 허생원 부자의 마지막 대화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 인생이 뭔가요?"

"뭐긴. 장보러 왔다가 장보고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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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혼자 올 수 있니
이석주 사진, 강성은 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12월
품절


이 겨울, 뜻밖의 선물을, 우주 저편에서 보내온 것 같은 선물을 받았다.

기다렸지만 기대하지는 못 했던,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못 했던, 故 이석주 작가의 사진집 『너 혼자 올 수 있니』.

이석주 작가가 생전 마지막 여행지였던 홋카이도와 아키타에서 찍은 설경에 강성은 시인이 글을 붙이고 박상순의 시 '너 혼자'에서 제목을 따 이 세상에 탄생하게된 사진집이다. 혼자서는 올 수 없어, 작가를 아끼는 많은 이들의 사랑과 관심과 도움을 받아 태어나게 되었으리라. 그래서 더욱 애틋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이석주 작가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작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투병 생활을 하던 중에 방송을 통해 전해진 작가의 이야기라든가, 그 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되어 자주 방문했던 작가의 블로그에서 본 사진과 글 등을 통해, 내게 남아 있는 모습들이 있는 것인데, 그 중 가장 강렬한 이미지 하나는 바로 눈[雪]이다. 작가가 눈을 참 좋아했던가? 사진집 『눈이 오는 날』을 다시 펼쳐 본다. 프롤로그에 작가의 눈에 대한 단상이 적혀 있다.



난 눈을 좋아한다. 지금 막 하늘에서 내리는 눈 속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한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 위에 닿아 흐르는 눈(雪)물을 좋아한다. 내 눈(眼)이 눈(雪)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넨다. 눈의 인사는 참 따뜻하다. 어느새 어깨 위까지 내려와 날 감싸주는 배려까지 보인다. 난 그런 눈이 참 좋다. _ 『눈이 오는 날』 중에서


사실, 『너 혼자 올 수 있니』를 받아들고 그 안의 사진을 감상하며 책상 한켠에 잠들어 있던 『눈이 오는 날』을 다시 꺼내어 펼친 건, 작가가 직접 쓴 글을 읽고싶어서이기도 했다. 『너 혼자 올 수 있니』는 작가의 사진집이기는 하지만, 직접 글을 붙이진 못 했다. 그의 삶은, 그가 생애 마지막 설경을 담는 것까지만을 허락했기에. 이에 시인 강성은이 그만의 감성이 담긴 글을 지어 사진집의 여백들을 채워주었지만, 신예 시인의 글을 만나게 되는 반가움과 기쁨도 작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전에 멀리서나마 그를 응원하고 그의 건강을 기도했던 한 사람으로서 무언가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사진을 통해 그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모두 전했을 테지만. 아니, 어쩌면 그냥, 사진이면 되었을지도.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그냥 사진이면, 되었을지도. 그 사진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이 읽히고, 서로의 마음이 전해진다면 더욱 좋을 테고.



내가 바라보는 눈과 지금의 내 마음을 찍어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 맘과 다르게 왜곡되는 말과 행동 대신, 마음이 고스란히 보여질 수 있는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사진을 바라보며 '참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면 내가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 같았고,

사진을 보면서 외로워 보인다고 말해주면 내 외로움을 알아봐주는 것 같았다.

마음을 알아달라고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조용히 그 사람의 눈(眼)이 내 마음을 알아보는 것에 난 감동했다. _ 『눈이 오는 날』 중에서


그렇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작가의 마음이 이 책, 『너 혼자 올 수 있니』 속의 많은 사진들로 남았다. 이제 우리가 사진을 바라보며 '참 아름답다' 혹은 '외로워 보여'라고 말해도 '그래, 그게 바로 내 마음이야'라고 말해줄 작가가 곁에 없어 사진과 나, 오롯한 둘 만의 대화가 되었지만, 내가 어떤 눈으로 사진을 보고 어떤 감상을 남기든, 우주 저편의 그가 다 미소지으며 고개 끄덕여줄 것 같다. 그래, 맞다고, 바로 그 마음이라고.



당신이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지 못했던 것

당신이 보여주고 싶었는데

보여주지 못했던 것

당신이 껴안고 싶었는데

껴안지 못했던 것



그러나 나는 압니다

말하지 않아도 보여주지 않아도 껴안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우리 영혼이 닿아 있어

모든 것이 투명합니다



그러니 걱정 말아요 _ 『너 혼자 올 수 있니』, 299쪽


책 속 사진들은 참 따스하기만 하다. 분명 2월의 홋카이도는 무척이나 추웠을 텐데, 분분히 흩날려 머리에 뺨에 손등에 와 닿는 눈송이는 차가웠을 텐데, 겨우내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들은 발끝을 시리게 만들었을 텐데, 어쩐 일인지, 꽁꽁 얼어붙은 날씨나 차가운 눈송이 모두 그의 마음 필터를 통과한 뒤에는 은은하고 따스한 기운으로 화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이 그처럼 따스했던 것일까? 여행지 숙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알약 마저도, 조금 더 희망차 보이고, 그로 인해 모든 걸 떨쳐버리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듯한데 말이다... 차가운 눈을 사랑했지만, 눈송이가 닿으면 순식간에 녹아버리도록 따스한 심장을 가진 이였을 것이다. 이 사진들을 찍은 이는...



이제 작가가 남긴 사진들을 더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이 사진집이 더욱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겨울을 몹시 싫어하는 나이지만, 내가 그래도 겨울을 추억할 수 있고 겨울에 애틋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건,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이 세상을 살았던, 그리하여 이 겨울의 찬기마저도 훈훈한 따스함과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긴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느 한 사람의 사진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폭설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종종 그의 사진을 떠올리곤 했으니까, 아마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니까. 사진의 힘이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꿔놓기도 하는 거니까.



그가 있는 우주 저편은, 눈이 자주 내리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아무리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도 추위를 느끼지 못할 뜨거운 심장이 그와 함께이니까.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에서 그는 영원히 그가 사랑하는 사진과 함께이리라. 오늘도 가만히 사진집을 펼쳐 그의 사진들과 대화를 나눠본다. 거센 눈보라를 뚫고 기차가 달려요. 그대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가 보아요...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어쩌다 슬픈 이야기를 하려 하면

괜찮아 다들 슬픔은 있어



어쩌다 아픈 이야기를 하면

괜찮아 다 나을 수 있어



어쩌다 외로운 이야기를 하면

괜찮아 누구나 혼자야. 라고 말했지



그럼 난 그냥 웃었지



어쩌다 너에게 슬픔이 올 때

어쩌다 너에게 아픔이 올 때

어쩌다 너에게 외로움이 올 때



그때 넌 정말 괜찮았니? _ 『너 혼자 올 수 있니』, 19쪽, 이석주 블로그 글 (http://blog.naver.com/soar0108)



시들지 않는 건 없지만

영원할 순 없지만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는

아름다운 시간은 지속된다. _ 『너 혼자 올 수 있니』, 279쪽



기억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 갑니다. _ 『너 혼자 올 수 있니』, 123쪽


그리고, 이석주 작가가 내 심장에 남긴 한 마디.

"인생에, 나중은 없더라구요."







이석주 작가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고, 군 전역 후 1년간 사진작가 조선희의 스튜디오에 출근하며 사진에 대한 안목을 길렀다. 2007년부터 홍대에 스튜디오를 마련해 여러 예술가와 교류하며 사진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2009년 간암 투병을 선고받은 뒤에도 지치지 않는 사진에 대한 열정으로 여러 사진전들을 기획 전시했다. 충남 당진에 마련한 갤러리 겸 작업실 ‘호련’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그의 이야기는 2009년 2월 KBS 다큐멘터리 <사미인곡>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2009년 9월 MBC <생방송 오늘 아침>에도 ‘말기 암 사진작가 아들의 어머니 전상서’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폐암까지 전이된 몸을 이끌고 홀로 겨울 홋카이도와 아키타 여행을 다녀온 후 눈(雪)에 관한 사진전을 준비하던 2010년 4월, 만 스물여덟의 나이에 하늘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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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앨런 베넷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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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일반적인 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제목,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어떤 독자를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라고 말하는 거지?

표지 그림의 우아한 노부인이 바로 그 주인공 되시겠다. 우아할 뿐만 아니라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있기까지 한, 바로 영국 여왕이 이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이다.

'여왕'이라는 직위 자체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지만, 책 앞에 모두가 평등한 것이지, 어찌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일까?

그건, 아마도 여왕의 본분 중 하나가 '취미를 갖지 않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취미에는 기호가 끼어들고, 기호는 피해야 했다. 기호에는 배척되는 사람이 있다. 여왕은 기호가 없어야 한다.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스스로 어디에 관심을 쏟아서는 안 된다.'(12) 고로 뚜렷한 기호에 포함되는 '독서'는 여왕으로서는 피해야 할 것이었고, 그런 여왕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책읽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이, 그러다가 정사에 시큰둥해졌다는 것이, 역시 일반적인 일은 아닌 거다.

 

이 책의 초간단 줄거리는 '여왕이 독서에 빠졌다! 큰일났다!'가 되겠는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왕과 그 주변의 크고 작은 변화들, 여왕의 책읽기에 특별한 조언자가 되는 인물을 둘러싼 '궁중암투' 등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책에 관해 사유하는 문장들이 이 '일반적인 독자'에게 꽤나 진지하게 사색할 시간을 마련해준다. 책읽기에 대한 여왕과 주변인물의 견해, 책읽기에서 찾아지는 즐거움, 읽는다는 것과 쓰는다는 것의 차이 등이 "그러니까 너는 책 읽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듯이 등장한다.

꽤 얇은 이야기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번 눈길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공감가는 문장들을 옮기기도 하는 까닭에 자주 쉬어갔다. 물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오래 쉴 수는 없었지만!

 

"심심풀이? 책은 심심풀이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네. 책은 다른 삶, 다른 세상을 다루는 것이야. 심심풀이와는 거리가 멀어. 케빈 경, 짐은 다른 세상을 더 알고 싶을 뿐이야. 짐이 심심풀이를 원했다면 뉴질랜드로 갔겠지." (여왕)

 

노먼은 그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고, 깨달음이 아닌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었다. 물론 그 즐거움의 일부는 깨달음에서 온다는 것을 노먼도 알고 있었지만, 의무는 그 안에 없었다. (노먼)

 

여왕과 노먼의 각기 다른 책읽기에 대한 견해를 보며, 나는 등장한 순서대로 여왕의 말에 공감해 밑줄을 그었다가, 다시 노먼의 말에 공감하며 거기에도 밑줄을 그었다. 굳이 '심심풀이'라는 단어를 경계로 해서 본다면, 여왕은 심심풀이보다는 다른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읽는, 목적이 있는 책읽기를 주장하고, 노먼은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심심풀이'로 책을 읽는다. 그 둘을 섞어 놓으면 대부분의 독자들이 책을 읽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단순한 재미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만도 아니고. 때로는 심심풀이로, 때로는 무언가를 알고 싶어서. 하지만 아무래도 내게 책읽기란 '심심풀이'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목적이 읽는 책읽기는 책을 '읽는다'라는 행위보다는 뭐랄까 '본다'라는 행위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참고서를 '읽는다'고는 하지 않으니까... 종종, 책을 왜 읽느냐라는 물음을 들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글쎄, 내가 책을 왜 읽지?'라고 고민하면서도 아직까지 이렇다할 대답을 궁리하지 못했다. 뭐, 기껏 생각한 정도가 '습관'이라는 것. 흠, '나와 책읽기'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때인 것 같다. (아니아니, 그냥 좋으니까 읽으면 되는 거지 뭐, 굳이 왜 읽는지 정의 내릴 필요는 없는지도!)

 

책 읽기가 매력적인 이유는 책이 초연하기 때문이라고 여왕은 생각했다. 문학에는 당당함이 있었다. 책은 독자를 가리지 않으며, 누가 읽든 안 읽든 상관하지 않는다. 여왕 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독자는 평등했다. (39)

 

책은 누구에게도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독자는 누구나 평등하다. (40)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려질 때, 세상은 왜 내게만 이래! 분노가 치솟을 때, '법 앞에 만민 평등'은 얼어죽을, 그 따위 말 개나 물어가라 그래!라고 외치고 싶을 때, 자자, 책 앞으로 갑시다. 책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니까. 책은 당신이 누구든 누구이지 않든(?) 사람 가리며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니까. 당신이 친하고자 마음만 먹고 한 발짝 다가간다면 그 순간 당신의 절친한 친구가 되니까. 뭐, 이런 캠페인이라도 펼치고 싶어지는, '책 앞에 만민 평등' 문장이다. 속 시원하다.

 

책에 빠진 여왕으로 인해 비서관이 골머리를 앓고, 여왕이 새로 신임하게 된 조언자는 멀리 '유배' 당하고, 국민들은 '각본'에서 벗어난 여왕의 질문("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나?"와 같은)에 대답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여왕의 개는 놀이 시간을 앗아간 책을 미워하기에 이르르지만, 그 무엇도 책에 빠진 여왕을 말리지 못한다. 아니, 그 끝에는 오히려 여왕이 새로이 찾고자 하는 길이 나타난다. '책을 쓰는 일은 자신의 인생을 적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메모가 의미하는 바는, 그렇다, 여왕은 이제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쓰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발견하'기 위해서일까? 그렇다면 여왕이 발견해 내는 여왕 자신의 인생은 어떤 것일지, '일반적이지 않은 작가'의 이야기도 꽤 궁금해지는 그런 대목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작가' 이야기도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이야기만큼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여왕님, 꼭 작가로서 다시 한 번 이 독자 앞에 서주시겠어요, 네?


"책을 읽고 마음에 든 작가가 생겼는데,

그 작가가 쓴 책이 그 한 권만 있는 게 아니라,

알고 보니 적어도 열 권은 넘게 있는 거예요.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요?"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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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순간 : 시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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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길을 걷다 메타세쿼이아를 만나면 절로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아련하게 그려낸 나무이다.

서울 모처에 있는 '뉴욕 제과점'이라는 이름의 빵집 앞을 지나게 되면 나는 괜히 간판을 조금 더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떠올라서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남쪽 어느 도시로 향하다가 김천 쯤 가까워오면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며, 역에 멈춘 잠깐을 틈타 '김천역' 간판을 카메라에 담곤 한다. 이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시장을 지나다 좌판에 푸릇하게 놓여 있는 열무를 보고 기분 좋게 훗, 웃어본다거나 인터넷에서 오로라 사진을 보면 잠시 손을 멈추고 오로라에 시선을 빼앗긴다거나, 스페인 말라가는 어떤 곳일까 궁금해 인터넷 검색창에 '말라가'를 넣어본다던가, 남아공 월드컵 때 경기를 지켜보다 그 뜨거운 나라를 다녀온 누군가를 생각한다거나, 이런 것들,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떠올라서이다.

그와 (그의 책과) 짧다면 짧을, 길다면 길 여러 시간을 함께 하며 내 안에 새롭게 생겨난 관심들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우리가 보낸 순간들 때문이라고...

 

'우리' '보내다' '순간' 이런 단어들이 실은 얼마나 가슴 뛰는 단어들인지,

'우리가 보낸 순간'이란 정말이지 얼마나 애틋하고 소중하고 아련한 시간들인지...

나는 그 '순간'에 빠져버린다.

이 지구상 수많은 존재들, 사람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건물이든, 장소든, 그 어떤 존재가 되었든, 그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나와 너, 그러니까 '우리'가 보낸 순간,이라 명명하고 그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될까? 너와 나, 우리가 만난 그 확률의 아찔함을 생각해 본다면, 내 곁의 존재 하나하나에 정말 이 순간 최선의 애정과 노력을 쏟아야 마땅하건만, 때로는 허투루, 때로는 띄엄띄엄 흘려버린, 내 인생의 수많은 '보내버린' 순간들에 대해, 나는 잠시 고개 숙여 미안함을 표하고 싶어졌다.

'우리가 보낸 순간'이라는 말 그 한 마디가, 내 안에서 건드린 건, 내가 소중히 여기지 못 한 내 생애 수많은 페이지에 대한 애도, 그리고 아직도 내 안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황금빛 페이지들에 대한 가슴 벅찬 추억.

 

어쩌면 이 책에 실린 글들도, 그렇게 김연수 작가가 세상 많은 존재들과 함께 보낸 그 시간들에 대한 기록. 지금의 '김연수'라는 사람을 이루게 된 작은 세포 하나하나들에 대한 애틋한 연애편지.

"어떤 날은 그냥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오늘이 그날이네요. 그냥 문장을 읽기만 합시다."라고 '말하지 않을 권리'와 보낸 순간도 있지만, 그 외 이 책에 담긴 많은 순간들은 정말이지, 어느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참으로 곱고 눈부시다.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인가, 그와 함께 한 '순간'이란 녀석들은 참으로 행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암흑으로 가득한 순간이었을지라도, 그 순간들을 이겨내고 통과해냄으로써 빚어낼 수 있었던 지금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돌아보는 그들이 보낸 순간은, 참으로 애틋하기만 하여 부러움에 가슴이 뛰는걸!

그런 김연수 작가의 '순간'들에 대한 연애편지를 이끌어 낸 것은, (어쩌면 편지 내용과는 조금쯤 거리가 있어보이기도 하는) 그가 날마다 읽고 보듬었던 소설과 시 들. 몇 해 전 '문학집배원'으로서 매주 배달해주었던 그 소설들과, 지난해 신문 연재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시들을 다시 한번 음미하며, 그 글들이 작가의 마음속 샘에서 길어올린 문장들을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게 내 안에 차곡차곡 담는다. 정말이지, 마중물과 콸콸 쏟아져나오는 물 모두 일급 청정수 같은 책들! 내 안에 새롭게 새겨진, 우리가 보낸 순간.

 

 

_ 사랑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보라고 한다면 저는 엄마 얼굴을 그리겠습니다. 태어나서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름답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아름답다는 말은 결국 '근사近似하다'는 말. 내가 아는 뭔가와 닮았다는 말. 그래서 거기 아무리 많은 불빛들이 반짝인다고 해도 그중에 무엇이 아름다운 불빛인지 우리는 금방 알아낼 수 있어요. (소설, 20)

 

_ 그러지 말고, 가능하면 편애하려고 노력합시다. 모든 걸 미적지근하게 좋아하느니 차라리 편애하고, 차라리 편애하는 것들을 하나둘 늘려가도록 합시다. 편애한다는 건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무조건 지지하는 일이에요. 다들 콩꺼풀을 준비하세요.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합시다. 우리가 이 세상의 판관도 아닌데, 공연히 공정해지려고 반대로 행하지 맙시다. (소설, 37)

 

_ 저는 순간瞬間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그 짧은 찰나 말이죠. 처음으로 꺼내 입은 스웨터에서 옷장 냄새가 훅 풍기던 순간, 달리기를 한 뒤에 등을 수그리고 심호흡을 할 때 이마의 땀이 운동장 바닥으로 뚝 떨어지던 순간, 작업실 창 옆으로 새 한 마리가 휙 날아가던 순간. 그런 순간들 속에 나의 삶을 결정짓는 모든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짧은 순간도 그냥 보낼 수 없잖아요. 기나긴 인생이란 결국 그런 순간들의 집합체죠. (소설, 146)

 

_ 그러므로 쓰라.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작가로서 쓰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 쓰라. 비난하고 좌절하기 위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고통 없이, 중단 없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계 안에서, 지금 당장,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쓰라. (소설, 223)

 

_ 실수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건 제 버릇이랍니다. 반성하고 후회해서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놀라기 위해서. 동네를 산책하다가 잘못 들어선 길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작은 공원을 발견하고는 놀랐던 지난해 여름처럼. 거기 그렇게 예쁜 공원이 있을 줄이야…… 그 공원 벤치에 앉아 어쩌면 실수가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때처럼. (시, 115)

 

_ 우리의 소망이 이뤄질 확률은 반반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될 일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고, 안 될 일은 어떻게 하든 안 됐으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일과 어떻게 하든 안 되는 일은 낮과 밤처럼 다르죠. 우리의 희망은 아마 낮과 밤의 그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노을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노을만큼이나 희망은 아름답죠. (시, 142)

 

_ 그러니까 줄루족의 안부 인사는 사우보나sawubona라고 한다지요.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이죠. (……) 제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걸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왜 태어났는지, 또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죽을지 다 알 수도 있겠네요. 나는 당신을 봅니다, 그건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압니다, 그런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건네고픈 인사군요. (시, 284)

 

_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시,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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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순간 : 소설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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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길을 걷다 메타세쿼이아를 만나면 절로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아련하게 그려낸 나무이다.

서울 모처에 있는 '뉴욕 제과점'이라는 이름의 빵집 앞을 지나게 되면 나는 괜히 간판을 조금 더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떠올라서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남쪽 어느 도시로 향하다가 김천 쯤 가까워오면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며, 역에 멈춘 잠깐을 틈타 '김천역' 간판을 카메라에 담곤 한다. 이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시장을 지나다 좌판에 푸릇하게 놓여 있는 열무를 보고 기분 좋게 훗, 웃어본다거나 인터넷에서 오로라 사진을 보면 잠시 손을 멈추고 오로라에 시선을 빼앗긴다거나, 스페인 말라가는 어떤 곳일까 궁금해 인터넷 검색창에 '말라가'를 넣어본다던가, 남아공 월드컵 때 경기를 지켜보다 그 뜨거운 나라를 다녀온 누군가를 생각한다거나, 이런 것들,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떠올라서이다.

그와 (그의 책과) 짧다면 짧을, 길다면 길 여러 시간을 함께 하며 내 안에 새롭게 생겨난 관심들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우리가 보낸 순간들 때문이라고...

 

'우리' '보내다' '순간' 이런 단어들이 실은 얼마나 가슴 뛰는 단어들인지,

'우리가 보낸 순간'이란 정말이지 얼마나 애틋하고 소중하고 아련한 시간들인지...

나는 그 '순간'에 빠져버린다.

이 지구상 수많은 존재들, 사람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건물이든, 장소든, 그 어떤 존재가 되었든, 그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나와 너, 그러니까 '우리'가 보낸 순간,이라 명명하고 그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될까? 너와 나, 우리가 만난 그 확률의 아찔함을 생각해 본다면, 내 곁의 존재 하나하나에 정말 이 순간 최선의 애정과 노력을 쏟아야 마땅하건만, 때로는 허투루, 때로는 띄엄띄엄 흘려버린, 내 인생의 수많은 '보내버린' 순간들에 대해, 나는 잠시 고개 숙여 미안함을 표하고 싶어졌다.

'우리가 보낸 순간'이라는 말 그 한 마디가, 내 안에서 건드린 건, 내가 소중히 여기지 못 한 내 생애 수많은 페이지에 대한 애도, 그리고 아직도 내 안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황금빛 페이지들에 대한 가슴 벅찬 추억.

 

어쩌면 이 책에 실린 글들도, 그렇게 김연수 작가가 세상 많은 존재들과 함께 보낸 그 시간들에 대한 기록. 지금의 '김연수'라는 사람을 이루게 된 작은 세포 하나하나들에 대한 애틋한 연애편지.

"어떤 날은 그냥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오늘이 그날이네요. 그냥 문장을 읽기만 합시다."라고 '말하지 않을 권리'와 보낸 순간도 있지만, 그 외 이 책에 담긴 많은 순간들은 정말이지, 어느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참으로 곱고 눈부시다.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인가, 그와 함께 한 '순간'이란 녀석들은 참으로 행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암흑으로 가득한 순간이었을지라도, 그 순간들을 이겨내고 통과해냄으로써 빚어낼 수 있었던 지금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돌아보는 그들이 보낸 순간은, 참으로 애틋하기만 하여 부러움에 가슴이 뛰는걸!

그런 김연수 작가의 '순간'들에 대한 연애편지를 이끌어 낸 것은, (어쩌면 편지 내용과는 조금쯤 거리가 있어보이기도 하는) 그가 날마다 읽고 보듬었던 소설과 시 들. 몇 해 전 '문학집배원'으로서 매주 배달해주었던 그 소설들과, 지난해 신문 연재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시들을 다시 한번 음미하며, 그 글들이 작가의 마음속 샘에서 길어올린 문장들을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게 내 안에 차곡차곡 담는다. 정말이지, 마중물과 콸콸 쏟아져나오는 물 모두 일급 청정수 같은 책들! 내 안에 새롭게 새겨진, 우리가 보낸 순간.

 

 

_ 사랑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보라고 한다면 저는 엄마 얼굴을 그리겠습니다. 태어나서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름답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아름답다는 말은 결국 '근사近似하다'는 말. 내가 아는 뭔가와 닮았다는 말. 그래서 거기 아무리 많은 불빛들이 반짝인다고 해도 그중에 무엇이 아름다운 불빛인지 우리는 금방 알아낼 수 있어요. (소설, 20)

 

_ 그러지 말고, 가능하면 편애하려고 노력합시다. 모든 걸 미적지근하게 좋아하느니 차라리 편애하고, 차라리 편애하는 것들을 하나둘 늘려가도록 합시다. 편애한다는 건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무조건 지지하는 일이에요. 다들 콩꺼풀을 준비하세요.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합시다. 우리가 이 세상의 판관도 아닌데, 공연히 공정해지려고 반대로 행하지 맙시다. (소설, 37)

 

_ 저는 순간瞬間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그 짧은 찰나 말이죠. 처음으로 꺼내 입은 스웨터에서 옷장 냄새가 훅 풍기던 순간, 달리기를 한 뒤에 등을 수그리고 심호흡을 할 때 이마의 땀이 운동장 바닥으로 뚝 떨어지던 순간, 작업실 창 옆으로 새 한 마리가 휙 날아가던 순간. 그런 순간들 속에 나의 삶을 결정짓는 모든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짧은 순간도 그냥 보낼 수 없잖아요. 기나긴 인생이란 결국 그런 순간들의 집합체죠. (소설, 146)

 

_ 그러므로 쓰라.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작가로서 쓰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 쓰라. 비난하고 좌절하기 위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고통 없이, 중단 없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계 안에서, 지금 당장,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쓰라. (소설, 223)

 

_ 실수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건 제 버릇이랍니다. 반성하고 후회해서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놀라기 위해서. 동네를 산책하다가 잘못 들어선 길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작은 공원을 발견하고는 놀랐던 지난해 여름처럼. 거기 그렇게 예쁜 공원이 있을 줄이야…… 그 공원 벤치에 앉아 어쩌면 실수가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때처럼. (시, 115)

 

_ 우리의 소망이 이뤄질 확률은 반반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될 일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고, 안 될 일은 어떻게 하든 안 됐으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일과 어떻게 하든 안 되는 일은 낮과 밤처럼 다르죠. 우리의 희망은 아마 낮과 밤의 그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노을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노을만큼이나 희망은 아름답죠. (시, 142)

 

_ 그러니까 줄루족의 안부 인사는 사우보나sawubona라고 한다지요.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이죠. (……) 제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걸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왜 태어났는지, 또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죽을지 다 알 수도 있겠네요. 나는 당신을 봅니다, 그건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압니다, 그런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건네고픈 인사군요. (시, 284)

 

_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시,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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