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순간 : 시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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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길을 걷다 메타세쿼이아를 만나면 절로 발길을 멈추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아련하게 그려낸 나무이다.

서울 모처에 있는 '뉴욕 제과점'이라는 이름의 빵집 앞을 지나게 되면 나는 괜히 간판을 조금 더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떠올라서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남쪽 어느 도시로 향하다가 김천 쯤 가까워오면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며, 역에 멈춘 잠깐을 틈타 '김천역' 간판을 카메라에 담곤 한다. 이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시장을 지나다 좌판에 푸릇하게 놓여 있는 열무를 보고 기분 좋게 훗, 웃어본다거나 인터넷에서 오로라 사진을 보면 잠시 손을 멈추고 오로라에 시선을 빼앗긴다거나, 스페인 말라가는 어떤 곳일까 궁금해 인터넷 검색창에 '말라가'를 넣어본다던가, 남아공 월드컵 때 경기를 지켜보다 그 뜨거운 나라를 다녀온 누군가를 생각한다거나, 이런 것들, 역시 내가 존경하는 누군가가 떠올라서이다.

그와 (그의 책과) 짧다면 짧을, 길다면 길 여러 시간을 함께 하며 내 안에 새롭게 생겨난 관심들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우리가 보낸 순간들 때문이라고...

 

'우리' '보내다' '순간' 이런 단어들이 실은 얼마나 가슴 뛰는 단어들인지,

'우리가 보낸 순간'이란 정말이지 얼마나 애틋하고 소중하고 아련한 시간들인지...

나는 그 '순간'에 빠져버린다.

이 지구상 수많은 존재들, 사람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건물이든, 장소든, 그 어떤 존재가 되었든, 그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나와 너, 그러니까 '우리'가 보낸 순간,이라 명명하고 그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될까? 너와 나, 우리가 만난 그 확률의 아찔함을 생각해 본다면, 내 곁의 존재 하나하나에 정말 이 순간 최선의 애정과 노력을 쏟아야 마땅하건만, 때로는 허투루, 때로는 띄엄띄엄 흘려버린, 내 인생의 수많은 '보내버린' 순간들에 대해, 나는 잠시 고개 숙여 미안함을 표하고 싶어졌다.

'우리가 보낸 순간'이라는 말 그 한 마디가, 내 안에서 건드린 건, 내가 소중히 여기지 못 한 내 생애 수많은 페이지에 대한 애도, 그리고 아직도 내 안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황금빛 페이지들에 대한 가슴 벅찬 추억.

 

어쩌면 이 책에 실린 글들도, 그렇게 김연수 작가가 세상 많은 존재들과 함께 보낸 그 시간들에 대한 기록. 지금의 '김연수'라는 사람을 이루게 된 작은 세포 하나하나들에 대한 애틋한 연애편지.

"어떤 날은 그냥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오늘이 그날이네요. 그냥 문장을 읽기만 합시다."라고 '말하지 않을 권리'와 보낸 순간도 있지만, 그 외 이 책에 담긴 많은 순간들은 정말이지, 어느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참으로 곱고 눈부시다.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인가, 그와 함께 한 '순간'이란 녀석들은 참으로 행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암흑으로 가득한 순간이었을지라도, 그 순간들을 이겨내고 통과해냄으로써 빚어낼 수 있었던 지금 바로 여기 이 자리,에서 돌아보는 그들이 보낸 순간은, 참으로 애틋하기만 하여 부러움에 가슴이 뛰는걸!

그런 김연수 작가의 '순간'들에 대한 연애편지를 이끌어 낸 것은, (어쩌면 편지 내용과는 조금쯤 거리가 있어보이기도 하는) 그가 날마다 읽고 보듬었던 소설과 시 들. 몇 해 전 '문학집배원'으로서 매주 배달해주었던 그 소설들과, 지난해 신문 연재를 통해 만날 수 있었던 시들을 다시 한번 음미하며, 그 글들이 작가의 마음속 샘에서 길어올린 문장들을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게 내 안에 차곡차곡 담는다. 정말이지, 마중물과 콸콸 쏟아져나오는 물 모두 일급 청정수 같은 책들! 내 안에 새롭게 새겨진, 우리가 보낸 순간.

 

 

_ 사랑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려보라고 한다면 저는 엄마 얼굴을 그리겠습니다. 태어나서 엄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름답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아름답다는 말은 결국 '근사近似하다'는 말. 내가 아는 뭔가와 닮았다는 말. 그래서 거기 아무리 많은 불빛들이 반짝인다고 해도 그중에 무엇이 아름다운 불빛인지 우리는 금방 알아낼 수 있어요. (소설, 20)

 

_ 그러지 말고, 가능하면 편애하려고 노력합시다. 모든 걸 미적지근하게 좋아하느니 차라리 편애하고, 차라리 편애하는 것들을 하나둘 늘려가도록 합시다. 편애한다는 건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무조건 지지하는 일이에요. 다들 콩꺼풀을 준비하세요.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싫어합시다. 우리가 이 세상의 판관도 아닌데, 공연히 공정해지려고 반대로 행하지 맙시다. (소설, 37)

 

_ 저는 순간瞬間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눈꺼풀이 한 번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그 짧은 찰나 말이죠. 처음으로 꺼내 입은 스웨터에서 옷장 냄새가 훅 풍기던 순간, 달리기를 한 뒤에 등을 수그리고 심호흡을 할 때 이마의 땀이 운동장 바닥으로 뚝 떨어지던 순간, 작업실 창 옆으로 새 한 마리가 휙 날아가던 순간. 그런 순간들 속에 나의 삶을 결정짓는 모든 의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짧은 순간도 그냥 보낼 수 없잖아요. 기나긴 인생이란 결국 그런 순간들의 집합체죠. (소설, 146)

 

_ 그러므로 쓰라.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작가로서 쓰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 쓰라. 비난하고 좌절하기 위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고통 없이, 중단 없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계 안에서, 지금 당장,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쓰라. (소설, 223)

 

_ 실수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건 제 버릇이랍니다. 반성하고 후회해서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놀라기 위해서. 동네를 산책하다가 잘못 들어선 길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작은 공원을 발견하고는 놀랐던 지난해 여름처럼. 거기 그렇게 예쁜 공원이 있을 줄이야…… 그 공원 벤치에 앉아 어쩌면 실수가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때처럼. (시, 115)

 

_ 우리의 소망이 이뤄질 확률은 반반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될 일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고, 안 될 일은 어떻게 하든 안 됐으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일과 어떻게 하든 안 되는 일은 낮과 밤처럼 다르죠. 우리의 희망은 아마 낮과 밤의 그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노을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노을만큼이나 희망은 아름답죠. (시, 142)

 

_ 그러니까 줄루족의 안부 인사는 사우보나sawubona라고 한다지요. 글자 그대로 옮기자면,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이죠. (……) 제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걸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왜 태어났는지, 또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죽을지 다 알 수도 있겠네요. 나는 당신을 봅니다, 그건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압니다, 그런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건네고픈 인사군요. (시, 284)

 

_ 우리가 지금 좋아서 읽는 이 책들은 현재의 책이 아니라 미래의 책이다. 우리가 읽는 문장들은 미래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까 지금 읽는 이 문장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시,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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