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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의 중국식당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밤, 문득 '고향' 생각이 났다.
아, 잠깐, 고향이라... 어디를 내 고향이라 말할 수 있는 거지? 고향이란, 나고자란 곳을 말하는 건가.
난생처음으로 사전에서 '고향'이란 단어를 찾아본다. 한번도 의심하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던 그 단어를.
고향: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그렇구나. 그렇다면 내가 떠올린 '고향'이란 곳은 3번이겠구나.
(나는 줄곧 1번의 의미로만 생각했으나, 그렇게 따지자면 내게는 고향이 없는 셈인가 갸우뚱거려진다. 태어날 당시에 살던 곳은 경상도 합천, 막상 태어난 곳은 충북 청주, 자란 곳은 경남 밀양과 경기도 수원. 어디가 내 고향인 거지? 어쩌면 고향이 없거나 고향이 많은 셈인가? 모르겠다. 갑자기 '고향'이란 단어가, 어려워진다.)
어찌되었든, 그날 밤 내가 그리워한 곳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내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남쪽의 한 시골 마을이다.
여름이면 기록적인 폭염 운운하는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고, 느긋하게 걸어서 30분이면 온 시내를 다 돌아다닐 수 있으며(시내 한 바퀴 돌라치며 몇 걸음 걷다 멈춰서서 마주오는 친구들과 "집에 안 가나?" "너거는 어디 가는데?" 수시로 인사를 주고 받아야 하며!), 폭우가 쏟아지면 집 가까이 개천의 물이 마당까지 차 올라와 식겁하게 만들던 그런 곳이었다.
이제는 친구들도 거의 그곳을 떠나고 없다. 마지막으로 가본 건, 몇 년 전, 한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한 때는 내가 살았던 곳인데, 묵을 곳이 없어 기차로 왕복 8시간 거리를 당일치기로 다녀와야 했다. 그 이후, 어쩌면 내 마음에서 더 멀어져버렸는지도 모른다. 남의 고장 다녀가듯이, 그렇게 다녀오는 것이 슬펐던 그 날 이후로.
그랬는데, 이제는 그리운 이도, 두고온 것도 없는 그곳이, 그날 밤, 나는 왜 그리 사무치도록 그리웠을까? 어쩌다 아버지가 "다시 이사 갈까?"라고 빈말처럼 건넬 때면 펄쩍 뛰며 손사레를 치던 내가, 왜 갑자기 그 고향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리움에 절절 마음이 끓어야 했을까...?
책 읽다 말고 웬 딴 생각이라니, 피식 실없는 웃음 지으며 다시 책으로 돌아와 몇 페이지 읽지 않았을 때, 나는 다시 삼천포로 빠져 이번에는 다른 고향('3번' 의미의 고향)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느닷없이 무언가가 심장을 꽈악 쥐었다 놓듯이, 꽤나 강렬한 그리움이었다. 그렇게 나는 수시로, 이 고향 저 고향을 떠올리며, 고향과 관련된 그 무엇, 냄새라든지, 사람이라든지, 물이라든지, 밤하늘이라든지, 음식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그리워하며, 그리움에 사무쳐하며 더디게 더디게 책 읽기를 마쳤다.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에야, 나는 무엇이 내 안의 그 많은 고향들을 불러 일으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랬다. 삼천포가 아니었다. 이 책에 나를 위해 놓여 있는 그 돌다리들을 나는 따라 걸었을 뿐이다. 시인이 그립다는 말 대신, 보고싶다는 말 대신, 외롭다는 말 대신, 쓸쓸하다는 말 대신, 하나 하나 가슴으로 놓아둔 그 단어의 돌다리들을.
그것은 어시장에서 맡는 생선 냄새이거나, 독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정선 아리랑이거나, 냉장고 불빛 받아 환한 멸치볶음이거나, 노르망디의 사과주스이거나, 고대 수메르 시대의 여신 난쉐이거나, '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이거나, 끓인 흑맥주이거나, 저녁 밥상에 오른 싱싱한 굴이거나, 터키 작은 마을에서 햇볕에 말라가는 고추이거나, 사내들의 오줌 줄기 길이를 다투는 내기라거나, 고향 다녀온 누군가가 가져다준 매실술이거나,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이거나, 그런 것들이었다.
시인은 그런 것들을 밟고, 기억 저편 '추억'이라 이름 부를 것들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가 아닌 '저기'에 있기에 더욱 강렬하고 환한 실체로 떠올려지는, 막연히 통틀어 '그리움'이라 부를 것들을 향해. 시인이 '여기'에 있었다면 그의 친구들에게 동료들에게 들려주었을 이야기들이, 글자로 책 속에 담겼다. '저기'의 그녀가 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방도는 그것 뿐이었으리라. 시인은, 담담한 어조로 그저 그때 그 시절 혹은 그 장소 혹은 그 사람의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다는 듯이 적고 있지만, 그 단어 사이사이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시인이 차마 하지 못하는 그 뜨거운 말이 읽히는 것만 같다. 그립고 그립고 또 그립다는 말. 너무나 그립지만 지금 당장 달려가 만날 수 없고 볼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문장에 담겨 있던 그 기운이 나를 자꾸 그리움 속으로 밀어 넣은 거다. '저기'에 앉아 '여기'를 그리워했을 그 마음이, 내 마음도 함께 당겨, 나 역시 문득 떠나온 많은 것들을 떠올리도록.
그렇게 해서,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시인 뒤를 살금살금 따라 내 안의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에 앉아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시인이 들려주는 고고학과 발굴에 관한 이야기들, 외국 생활 이야기들에도 흥미롭게 귀기울였다. 참으로 조근조근하면서도 사람 마음에 와 닿는 글들이어서 감탄이 났다. 시인의 목소리처럼 말이다. 평생 언성 높이는 일이라고는 몰랐을 것만 같은 조근조근하던 그 말씨와 이 책에 담긴 시인의 글이 참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시인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해봤다. 그리고 십 년만에 그립고 그립던 '여기'로 돌아온 시인이 '저기'로 돌아가기 전에, 그 많은 그리움들 만나 실컷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달래는 시간 보내기를 살며시 빌어봤다. 돌아가면 또 그리워질 테지만. 곱절로 곱절로 그리울지도 모르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어이, 여기 탑골이야, 한잔하러 나오지." "여기 광화문이야, 뮤즈에서 만날래? 그리고 이모집에 밥 먹으러 가자" 하는 전화를 주고 받으며 마음이 무너지는 대신 화사해질 수 있기를...
_ 왜 이렇게 마음은 자주 어지러운지, 제 마음의 어느 골목이 그렇게 구불구불한 길을 가지고 있는지……
자주 구불구불한 길을 걸었던 만큼 자주 피곤하기도 하구요. (60)
_ 가끔 혼자 앉아서 고향 갔다 온 누군가가 가져다준 매실술을 마셨다. 술도 술이지만 향에 실려오는 전설 같은 그날 그 절집, 그리고 온힘을 다하여 퍼덕이던 그때까지도 살아 있던 장어의 검고 진득한 피부…… 산딸기술에 씹히던 기름 많은 장어의 살 같은 그런 기억이 하나둘 떠오른다. 마치 마음이 어둑한 등불을 켜고 있는 것 같았다. (69)
_ 그때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웃기는 일은 말이 많은 건 내 쪽이었는데 정작 내가 그 많은 말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아마도 그래서, 말 많은 쪽이 나라서, 그 말에서 도망가고 싶은 내 마음의 어느 구석이 나를 떠밀어 다른 기슭으로 보낸 걸 거다. 그 말이라는 거, 내가 했던 그 많은 말이라는 거…… (161)
_ 어시장을 서성이며, 마음이 사나워질 때마다 그 옛날에 내가 보고 자랐던 쪽으로만 가려는 나를 생각한다. 무엇이 그렇게 그리워서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시장가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풍겨나오는 생선 냄새를 맡는다. 그 옛날,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 어머니와 함께 저녁 무렵이면 함께 시장으로 갔다. 그때 그 시장에서 어머니의 작은 지갑에서 나오는 돈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나는 몰라도 되었다. 그때 나는 사람들 사이를 오고가는 그 생선 냄새를 맡았던 것.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좋았을 무렵의 냄새…… (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