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책 북멘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지음 / 더블유북(W-Book)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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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왔군요!^^* 책좋사 카페에서 봤던 주옥같은 서평들을 책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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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위한 스테이크
에프라임 키숀 지음, 프리드리히 콜사트 그림, 최경은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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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는 입소문을 워낙 많이 들어 위시리스트에 담아두었던 책인데 이번에 구입할 책들을 고르다가 그제야 작가 이름을 보게 되었다.

에프라임 키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편』의 저자 에프라임 키숀의 책이라니! 아니, 왜 이 책을 여태 미뤄두고 있었지?

어쩐지, 재밌다고 재밌다고, 주변에서들 그렇게 말하더라니!!

주문한 책이 오기를 기다려 당장 펼쳐 읽었다. 아아, 역시나 유쾌상쾌통쾌한 에프라임 키숀 식 유머의 향연!!

 

이 책은 에프라임 키숀의 '짧은 소설'이라고 되어 있지만, 아마 거의 에세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다. 다만 실제보다 뻥이 많이 가미되어 '허풍'에 가까운 이야기들도 있기 때문에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작가는 독일, 헝가리, 구소련 등지의 강제수용소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삶의 아픔을 지니고 있지만, 내가 읽어 본 몇 권의 책들에서는 정말이지 그런 삶의 암흑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저 유쾌하기만 하다. 작가 내면에 절대 꺼지지 않고 빛나는 삶에 대한 희망과 밝음과 유머가 있었기에 그처럼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책, 시작부터 그야말로 사람을 '빵빵 터지게' 만들어준다.

표제작인 '개를 위한 스테이크'가 맞아주기 때문이다. 개를 위한 스테이크. 어쩌면 이에 공감할 사람들 꽤 많을지도. 그러니까, 한번쯤 이런 우스갯소리 들어보셨을 듯. 시장에서 생선을 사던 엄마가 생선 손질을 하는 주인에게 "생선 머리도 넣어주세요. 우리 개 주게요."라고 하니 옆에서 딸이 눈치도 없이(!) 말한다. "엄마, 우리집에 개가 어딨어요?" 그렇다. 그 생선 머리는, '어두육미'의 맛을 아는 엄마 혹은 아빠의 몫인 거다. 순식간에 '개'가 되어버린 엄마 혹은 아빠. 그것은 '개를 위한 생선대가리'. 우리집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고깃집에서 고기를 과하게 시켰다. 불판 위에 올려지지도 못한 고기가 몇 점 남았는데, 두고 가자니 아쉽고 그걸 또 싸달라기도 뭣하고. 그래 조금 생각 끝에 "이거 아까우니까 개나 주게 좀 싸주세요." 했다. 그리고 물론, 우리집 개님은 그 고기 맛도 못 봤다. 다음날 개로 빙의한 내가 맛있게 구워먹었다. '개를 위한 스테이크'도 그런 이야기다. 레스토랑에서 남은 스테이크를 '개'를 위해 싸가기 위해 가족들 모두 열심히 머리 굴리는 이야기. 성공적으로 싸갔으면, 에프라임 키숀이 아니겠지. 그 좌충우돌 우여곡절 갈팡질팡 짧은 이야기가, 정말 신나고 신난다.

 

빨간 양탄자에만 오줌을 싸는 개, 빨래를 돌리면 신나게 춤을 추며 온 집안을 돌아다니는 세탁기,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잃어버리고 되찾고 정신없는 우산 쇼, 아기 고양이를 위한 아주 비싼 젖병, 가로 줄무늬가 있는 추잉검 구입 대작전 등등 작가의 일상에서 일어났을 것만 같은 일들이 뻥튀기 기계에서 한 번 '뻥ㅡ!' 하고 튀겨져나온 것처럼 부풀려지고 유머의 옷을 입어, 아주아주 신나는 시간을 내게 선사해주었다.

이 책을 읽으니 몇 해 전에 읽고 반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편』,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내』도 다시 읽고 싶어지고, 작가의 다른 소설들도 무척 궁금해진다.

에프라임 키숀,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속에서 킥킥킥 웃음이 절로 나온다. 웃고 싶어지면, 에프라임 키숀을 만나야지. 생각만으로도, 그냥,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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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의 중국식당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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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밤, 문득 '고향' 생각이 났다.

아, 잠깐, 고향이라... 어디를 내 고향이라 말할 수 있는 거지? 고향이란, 나고자란 곳을 말하는 건가.

난생처음으로 사전에서 '고향'이란 단어를 찾아본다. 한번도 의심하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던 그 단어를.

고향: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그렇구나. 그렇다면 내가 떠올린 '고향'이란 곳은 3번이겠구나.

(나는 줄곧 1번의 의미로만 생각했으나, 그렇게 따지자면 내게는 고향이 없는 셈인가 갸우뚱거려진다. 태어날 당시에 살던 곳은 경상도 합천, 막상 태어난 곳은 충북 청주, 자란 곳은 경남 밀양과 경기도 수원. 어디가 내 고향인 거지? 어쩌면 고향이 없거나 고향이 많은 셈인가? 모르겠다. 갑자기 '고향'이란 단어가, 어려워진다.)

어찌되었든, 그날 밤 내가 그리워한 곳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내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남쪽의 한 시골 마을이다.

여름이면 기록적인 폭염 운운하는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고, 느긋하게 걸어서 30분이면 온 시내를 다 돌아다닐 수 있으며(시내 한 바퀴 돌라치며 몇 걸음 걷다 멈춰서서 마주오는 친구들과 "집에 안 가나?" "너거는 어디 가는데?" 수시로 인사를 주고 받아야 하며!), 폭우가 쏟아지면 집 가까이 개천의 물이 마당까지 차 올라와 식겁하게 만들던 그런 곳이었다.

이제는 친구들도 거의 그곳을 떠나고 없다. 마지막으로 가본 건, 몇 년 전, 한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한 때는 내가 살았던 곳인데, 묵을 곳이 없어 기차로 왕복 8시간 거리를 당일치기로 다녀와야 했다. 그 이후, 어쩌면 내 마음에서 더 멀어져버렸는지도 모른다. 남의 고장 다녀가듯이, 그렇게 다녀오는 것이 슬펐던 그 날 이후로.

그랬는데, 이제는 그리운 이도, 두고온 것도 없는 그곳이, 그날 밤, 나는 왜 그리 사무치도록 그리웠을까? 어쩌다 아버지가 "다시 이사 갈까?"라고 빈말처럼 건넬 때면 펄쩍 뛰며 손사레를 치던 내가, 왜 갑자기 그 고향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리움에 절절 마음이 끓어야 했을까...?

책 읽다 말고 웬 딴 생각이라니, 피식 실없는 웃음 지으며 다시 책으로 돌아와 몇 페이지 읽지 않았을 때, 나는 다시 삼천포로 빠져 이번에는 다른 고향('3번' 의미의 고향)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느닷없이 무언가가 심장을 꽈악 쥐었다 놓듯이, 꽤나 강렬한 그리움이었다. 그렇게 나는 수시로, 이 고향 저 고향을 떠올리며, 고향과 관련된 그 무엇, 냄새라든지, 사람이라든지, 물이라든지, 밤하늘이라든지, 음식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그리워하며, 그리움에 사무쳐하며 더디게 더디게 책 읽기를 마쳤다.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에야, 나는 무엇이 내 안의 그 많은 고향들을 불러 일으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랬다. 삼천포가 아니었다. 이 책에 나를 위해 놓여 있는 그 돌다리들을 나는 따라 걸었을 뿐이다. 시인이 그립다는 말 대신, 보고싶다는 말 대신, 외롭다는 말 대신, 쓸쓸하다는 말 대신, 하나 하나 가슴으로 놓아둔 그 단어의 돌다리들을.

 

그것은 어시장에서 맡는 생선 냄새이거나, 독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정선 아리랑이거나, 냉장고 불빛 받아 환한 멸치볶음이거나, 노르망디의 사과주스이거나, 고대 수메르 시대의 여신 난쉐이거나, '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이거나, 끓인 흑맥주이거나, 저녁 밥상에 오른 싱싱한 굴이거나, 터키 작은 마을에서 햇볕에 말라가는 고추이거나, 사내들의 오줌 줄기 길이를 다투는 내기라거나, 고향 다녀온 누군가가 가져다준 매실술이거나,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이거나, 그런 것들이었다.

시인은 그런 것들을 밟고, 기억 저편 '추억'이라 이름 부를 것들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가 아닌 '저기'에 있기에 더욱 강렬하고 환한 실체로 떠올려지는, 막연히 통틀어 '그리움'이라 부를 것들을 향해. 시인이 '여기'에 있었다면 그의 친구들에게 동료들에게 들려주었을 이야기들이, 글자로 책 속에 담겼다. '저기'의 그녀가 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방도는 그것 뿐이었으리라. 시인은, 담담한 어조로 그저 그때 그 시절 혹은 그 장소 혹은 그 사람의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다는 듯이 적고 있지만, 그 단어 사이사이에서,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시인이 차마 하지 못하는 그 뜨거운 말이 읽히는 것만 같다. 그립고 그립고 또 그립다는 말. 너무나 그립지만 지금 당장 달려가 만날 수 없고 볼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문장에 담겨 있던 그 기운이 나를 자꾸 그리움 속으로 밀어 넣은 거다. '저기'에 앉아 '여기'를 그리워했을 그 마음이, 내 마음도 함께 당겨, 나 역시 문득 떠나온 많은 것들을 떠올리도록.

 

그렇게 해서,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시인 뒤를 살금살금 따라 내 안의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에 앉아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시인이 들려주는 고고학과 발굴에 관한 이야기들, 외국 생활 이야기들에도 흥미롭게 귀기울였다. 참으로 조근조근하면서도 사람 마음에 와 닿는 글들이어서 감탄이 났다. 시인의 목소리처럼 말이다. 평생 언성 높이는 일이라고는 몰랐을 것만 같은 조근조근하던 그 말씨와 이 책에 담긴 시인의 글이 참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시인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해봤다. 그리고 십 년만에 그립고 그립던 '여기'로 돌아온 시인이 '저기'로 돌아가기 전에, 그 많은 그리움들 만나 실컷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달래는 시간 보내기를 살며시 빌어봤다. 돌아가면 또 그리워질 테지만. 곱절로 곱절로 그리울지도 모르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어이, 여기 탑골이야, 한잔하러 나오지." "여기 광화문이야, 뮤즈에서 만날래? 그리고 이모집에 밥 먹으러 가자" 하는 전화를 주고 받으며 마음이 무너지는 대신 화사해질 수 있기를...

 

 

왜 이렇게 마음은 자주 어지러운지, 제 마음의 어느 골목이 그렇게 구불구불한 길을 가지고 있는지…

 

자주 구불구불한 길을 걸었던 만큼 자주 피곤하기도 하구요. (60)

 

_ 가끔 혼자 앉아서 고향 갔다 온 누군가가 가져다준 매실술을 마셨다. 술도 술이지만 향에 실려오는 전설 같은 그날 그 절집, 그리고 온힘을 다하여 퍼덕이던 그때까지도 살아 있던 장어의 검고 진득한 피부…… 산딸기술에 씹히던 기름 많은 장어의 살 같은 그런 기억이 하나둘 떠오른다. 마치 마음이 어둑한 등불을 켜고 있는 것 같았다. (69)

 

_ 그때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웃기는 일은 말이 많은 건 내 쪽이었는데 정작 내가 그 많은 말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아마도 그래서, 말 많은 쪽이 나라서, 그 말에서 도망가고 싶은 내 마음의 어느 구석이 나를 떠밀어 다른 기슭으로 보낸 걸 거다. 그 말이라는 거, 내가 했던 그 많은 말이라는 거…… (161)

 

_ 어시장을 서성이며, 마음이 사나워질 때마다 그 옛날에 내가 보고 자랐던 쪽으로만 가려는 나를 생각한다. 무엇이 그렇게 그리워서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시장가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풍겨나오는 생선 냄새를 맡는다. 그 옛날,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 어머니와 함께 저녁 무렵이면 함께 시장으로 갔다. 그때 그 시장에서 어머니의 작은 지갑에서 나오는 돈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나는 몰라도 되었다. 그때 나는 사람들 사이를 오고가는 그 생선 냄새를 맡았던 것. 내가 나를 책임지지 않아도 좋았을 무렵의 냄새……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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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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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 두었던 줌파 라히리의 장편을 드디어 꺼내 읽었다.

『축복 받은 집』으로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고 『그저 좋은 사람』으로 내게 '그저 좋은 작가'가 되어버린 줌파 라히리.

그녀가 태어난 곳은 영국이다. 부모님은 인도 벵갈 출신이다. 그녀는 출생 후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국에서 자랐다.

그녀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녀는 영국 사람일까, 인도 사람일까, 미국 사람일까?

줌파 라히리의 책에는 미국에서 이민자 2세로 자라며 그녀가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많은 이민 2세, 3세들이) 느꼈을 정체성의 혼란과 인도 벵갈 출신의 부모 밑에서 전통 고수를 위한 일종의 강요와 억압 아래 느껴야 했을 수많은 번뇌가 담긴 글이 많다. (실제로는 작가가 그런 문제들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의 글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글들은 내 마음속에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해주며, 나를 작가의 열혈 독자, 작가를 내 마음속의 최고의 작가로 만들어주었다.

한국에서 나고자란 내가 어째서 미국 이민자 2세들이 느꼈을 고통과 고뇌에 공감을 느낄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내 인생에도 그와 비슷한 장면이 담겨 있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늘 줌파 라히리 작품 속 이민 2세들에게 무한한 지지를 보내며 글을 읽곤 한다. 그들이 결코 원치 않음에도 그저 부모님의 강압에 의해 미국에서도 철저히 벵갈인의 삶을 살아가지 않기를, 거기에서 벗어나 그들이 바라는 그들만의 삶을 살아가기를... 비록 그는 부모에게서 나왔으나, 그렇다고 그 삶이 반드시 부모의 '연작소설'이 될 필요는 없는 거니까(그러니까,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아무튼,

 

이 책 속 주인공도 바로 인도 벵갈 출신 부모 밑에서 태어난 '미국인' 고골리이다. '고골리'라는 이름은 짐작가다시피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에서 딴 것이다. 주인공 아버지의 삶을 바꿔놓게 되는 큰 사건에 이 고골리가 연관을 맺게 되어 아버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작가가 된다. 그러다가 후에 아들에게까지 (우여곡절 끝에) 고골리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된 것이다. 아버지 마음속에 고골리라는 작가가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으며,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없는 아들은 후에 이 이름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미국에서 벵갈 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러시아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아무런 이음새도 찾을 수 없는 그 이름 아래 혼란스러울 법하다. 후에 고골리는 자신의 본명이 될 뻔 했던 '니킬'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이름을 바꾼다는 행위가 아니라 그에게 더 큰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고골리는 다른 미국 친구들과 달리 크리스마스 대신 벵갈 전통 명절을 지키고 늘 부모님의 벵갈 인 친구와 그 자녀 들로 북적대는 파티에 참석해야 하며 주기적으로 캘커타를 방문해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친척과 지내야 하는 등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지만 그건 '고골리'라는 이름처럼, 자신이 아무리 바꾸고 싶어도 설령 진짜로 바꿔버렸다고 해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영원히 고골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듯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의심 한 번 품지 않고 너무나 당연스레 부모님의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싫'지만 그렇다고 훌훌 벗어나버릴 수도 없는 그 현실의 굴레가 내게도 너무 절절하게 와닿아 읽는 내내 마음에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우울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 고골리는 자신의 이름을 고골리로 받아들였는지 철저하게 니킬로 바꿔버렸는지, 확신은 가지 않지만, 아마, 고골리는 영원히 고골리일 것이다. 아무리 법적 과정을 거쳐 니킬로 이름을 바꿨더라도. 고골리라는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은 결국 고골리를 다시 그 자리로 돌려 놓게 되는지도. 벗어날 수 없는 치명적인 사랑.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리는 치명적인 사랑. 원망을 해야 할까, 수긍하고 감사해야 할까... 고골리의 문제는 고골리가, 내 문제는 내가, 각자의 삶은 각자가 알아서 결정하고 잘 헤쳐나가야겠지.

 

외국에서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거나, 부모님 혹은 다른 외부에서 오는 강요와 억압을 벗어날 수 없어 자신만의 삶을 그리기 어렵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 때문에 많은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 들이 읽으면 정말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자신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 볼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는 책이다.

이러저러한 환경에서 오는 공감을 빼더라도, 그냥, 무조건 읽어보면 한없이 빠져들게 될 그런 작가, 그런 책이다. 줌파 라히리의 책들은.

다음 책은 언제 나오려나? 신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작가!

 

 

_ 고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자네는 아직 젊네. 자유롭다고." 그는 강조하느라 양손을 벌리며 말했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더 늦기 전에 복잡하게 생각 말고, 베개 하나에 담요 한 장 챙겨서 가능한 한 많은 세상을 보고 오게나. 후회하지 않을 걸세. 언젠가는 너무 늦고 말 거야."

"할아버지께서는 그게 바로 책을읽는 이유라고 항상 말씀하셨는데요." 아쇼크가 그 틈을 타 손에 쥔 책을 펴들며 이렇게 말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여행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른 법이지." (28)

 

_ 애칭이란 인생이 항상 그렇게 심각하고, 형식적이고, 복잡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는 유물, 어린 시절이 남겨준 유물인 것이다. 애칭은 또한 사람이란 함께 있는 사람,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지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준다. (41)

 

_ "디다, 곧 돌아올게요." 아시마는 이렇게 말했었다. 벵골 사람들은 안녕이라는 말 대신 언제나 이 말을 썼다.

"가서 마음껏 즐기거라." 할머니는 그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치듯 말씀하시면서 아시마를 일으켜주셨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아시마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닦아주셨다. "가서 이 할미가 못한 일을 하거라. 다 잘되기 위한 거란다. 명심해야 한다. 자, 이제 그만 가거라." (56)

 

_ 아시마는 요즘 들어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임신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림은 끝도 없고, 언제나 버겁고, 끊임없이 남과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한때는 평범했었던 삶에 이제는 불룩하게 괄호가 하나 삽입되었고, 이 괄호 속에는 끝나지 않는 책임이 들어 있었다. 이를 통해 이전의 삶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그 삶은 오히려 더 복잡하고 힘든 무엇인가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임신했을 때처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호기심과, 그리고 동정심과 이해심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자아내는 어떤 것이라고, 아시마는 생각하였다.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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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
한창훈 지음 / 창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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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티브이에서 "**을 글로 배웠어요~"하는 게 유행이었는데, 내게도 글로 배운 게 몇 가지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바로 '섬'이다. 나는 섬을, 글로 배웠다. 섬에 산다는 것, 섬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 섬의 풍경 같은 것들. 내게는 기억할 만한 섬 방문기도 없고(제주도도 한 번 못 가봤으며, 혹시 제부도도 섬으로 쳐준다면, 그 섬은 몇 번 가봤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섬의 풍경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 내게 마치 섬을 내 마음속 고향이라도 되는 듯 새겨넣어 준 것은 바로 한창훈 작가의 책들이었다.

작가의 책을 읽으면, 순식간에 공간 이동을 해 파도가 찰싹이는 바닷가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문득 입안 가득 신선한 해산물의 맛과 질감이 퍼져 견딜 수 없이 괴로워지기도 하고(그렇다, 그건 행복과 동시에 괴로움이다!), 코끝으로는 짭쪼롬하면서 비릿한 갯내가, 귓가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조잘거리는 바다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이 증상은, 거문도를 다녀와서 더욱 심해졌다.

섬을 글로 배운 내가, 섬을 내게 가르쳐 준 한창훈 작가가 있는 거문도를 직접 찾아가 몸소 섬을 느껴본 것이다. (1박 2일 다녀와 놓고 섬을 느꼈다고, 섬을 알았다고 말하는 건 말도 안되겠지만, 적어도 실질적인 풍경과 냄새와 맛과 질감과 느낌을 조금이나마 내 안에 담아올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육지(!)에서의 생활이 서글플 때가 있는데 말이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 '일견'하고 났으니, 책속의 문장 문장이 이제는 그냥 글이 아닌 거라. 책 속의 낱말 하나 하나가 그냥 가슴에 콕콕 와서 박히는 거라. 거문도를 구르던 돌멩이 하나도 그리워지는 책읽기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절절하게 만든 건, 바닷가 자갈이 파도에 휩쓸려 이리 또로록 저리 또로록 굴러 다니듯이, 육지에서 이리 저리 '굴러 다니며' 온갖 고생(이라고 쓰고 경험이라고 읽는다)을 하고 섬으로 돌아온 사내가 섬 외딴 곳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스스로를 닦음질 하는 장면들이었다.

고령의 외조모가 살고 있는 섬으로 돌아온 사내는 동네와 외따로 떨어진 '도깨비가 나오는 집'에 거처를 꾸미고 그곳에서 자신의 내면을 벼리는 시간들을 보낸다. 온갖 세간이며 집 구조물까지 다 뜯겨나간 집을 수리하면서 육지에서 헐어버린 마음 어딘가를 함께 수리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고쳐 '내집'으로 만든 곳에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적막에 맞서 홀로 '버틴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사내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낯선 여인의 방문을 받기도 하고, 과거 자신 앞에서 훌러덩 속바지를 까내리고 오줌을 싸던 한 얄미운 계집을 중년의 모습으로 재회하기도 하고,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 온 파도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불나방과 밧줄과 날치의 각자 나름대로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기도 하며, 과거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던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기억의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사내의 모습을 빌려 작가가 들려주고 싶었던 것 중에는 섬 사람들의 '삶'도 있었을 것이다. 육지에서 나고자란 사람들은 결코 상상하지도 못할, 섬 사람들만이 아는, 그들만의 삶. 혹은 천형으로 여기고, 혹은 가혹한 운명으로 여기고 순응해야 하는 그런 삶. 가끔 바다를, 섬을 그리워하여 찾아가 그곳의 풍경에 흠뻑 빠져 낭만을 즐기는 도시것들의 행위는 그야말로 사치일, 바다로 울고 웃는 바다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마음은, 어쩐지 조금쯤 쓸쓸하기도 하고, 나는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애잔함 같은 것이 느껴져 마음속에 자꾸자꾸 파도소리만 높아져갔다.

작가, 하면 책상 앞에 앉아 공책 펴 놓고 연필을 쥐고 있거나,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이 연상되지만, 한창훈 작가만은 그보다는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거나 바닷가에서 갯것을 채취하거나, 포장마차에서 늦은밤까지 술꾼들의 고단한 술상을 봐주는 등의 모습, 그러니까 삶의 현장들이 떠오른다. 온몸 부딪쳐 직접 체험한 삶의 수많은 경험들이 작가의 문장들에 녹아 있음은, 책을 조금만 읽어봐도 금방 느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문장 곳곳에는 삶을 살아간다는 진지한 행위 뒤에 흐르는 땀방울이, 고뇌가, 고달픔이 그대로 묻어나있기도 하다. 마음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부분들이다. 삶이라는 건 거저 살아지는 게 아니지, 이렇게 온몸 부딪쳐 살아내야 하는 거지, 하는 깨침과 반성 같은 것들. 한창훈 작가가 들려주는 섬 이야기에서, 바다 이야기에서 내가 건지는 '갯것'들은 이런 것.

이 섬 이야기에서도 나는 많은 것들을 건져 올려 마음을 살찌우며, 또 한 번 글로 섬을 배웠다. 책을 읽는 밤마다, 거문도에서 먹고 마신 삼치회와 잎새주 생각에 침을 꼴깍거리기도 해가며...

 

 

_ "그때는 이런 노을을 보지 못했어요. 만약 그때 이렇게 아름다운 노을을 봤다면 혹시 삶이 바뀔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16)

 

_ 수십마리의 생선이 반찬이라는 아주 간단하고 흔한 단어 하나로 통일되어 죽었다. 사람 하나 살기 위해 죽어가는 것이 얼마인가. 그리고 그들은 각각 얼마나 오래도록 플랑크톤과 해초와 새끼 물고기들을 먹으며 살았나. 내 손아귀에서 마지막 몸부림을 치며 죽음을 맞이하는 이것은, 이것들의 살은, 결국 숱한 죽음들의 축적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삶은 그러니까 죽음의 축적으로 인해 진행된다. 다른 것의 죽음이 내 삶을 진행시켜주는 것이다. (46)

 

_ 적막과 맞대면을 하면 무엇이 나오는지를, 사실은, 그것을 아직 모르고 있어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동안 내가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깨달았다기보다는 눈치챘다는 표현이 더 옳은데, 적막을 견디기에는 소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적막의 무게를 견뎌내기 위해 소음을 내면 소음의 끝부분에서 적막을 다시 만나야 했고 그럴 때마다 그것은 더욱 크고 넓고 깊어져 있었다. (137)

 

_ 외로웠죠. 있잖아요, 외로움이라는 건 말이죠, 그걸 해소할 방법이 전혀 없을 때 찾아오는 거랍니다. 그 전까지는 외로움이 아니에요. 뭐라고요? 그렇죠, 그건 심심한 거죠. 심심한 거와 외로운 것은 달라요. (179)

 

_ 하지만, 그렇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미래를 잘 몰라서이죠. 알 수 없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죠. (196)

 

_ 그래, 왜 세상에 나와 이런 고단한 삶을 살다가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알 수 없어도 할머니가 소녀시절 늙은 할머니의 머리맡을 지켰듯이, 훗날 늙은 내 옆에도 어린 누군가가 앉아 있겠듯이 삶은 할머니 대에서 끝나는 건 아니었다. 삶은 이어질 것이고 할머니나 나나, 대(代)를 이음으로써 우주의 적막한 시간을 견디는, 알 수 없는, 그 긴 행렬의 중간조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훗날 어린 내 피붙이에게 세상은 무어라고 나는 말하게 될까.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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